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지요리 Aug 25. 2020

결혼생활의 사소한 행복들

예민하지만 귀여운 남편 

남편과 결혼한지 1383일, 처음 만난지는 1992일이 되었다. 

예민하고 까칠해 보이지만 대체로 귀여운 남편은 35살 결혼하는게 목표였지만 나의 닦달에 31살에 결혼을 했다. 남편은 올해 35살이다. 

남편은 어제 "오빠, 올해 결혼했으면 코로나때문에 제대로 식이나 올렸겠어? 나한테 고맙지?"라는 나의 발언에 코웃음을 쳤다. 또 남편은 (나랑 몸무게 차이가 많이 안 날 정도로...) 슬림하지만 피자 한판을 혼자 먹어치우고, 아이스크림 10개 사다놓으면 이틀만에 사라지게 하는 먹보이기도 하다. 예민하고 까칠해 보이지만 의외로 다정하고 귀여운 먹보인 남편에 대해 몇 자 적어보려 한다. 


#1. 분리수거 

아침에 운동을 가면서 재활용을 일부 버리고, 나머지는 다녀와서 하려고 문 앞에 남겨두고 갔다. 운동을 다녀와보니 내가 말도 하지 않았는데 남편이 출근길에 재활용을 버렸다. “미쳤다, 미쳤어. 너무 좋아. 고마워.” 라고 남편에게 카톡을 보냈다. (그런데 읽씹 당했당..^^;;) 

분리수거는 매일 발생하는 수많은 집안일 중 하나이고, 누군가는 “원래 분리수거는 남편이 하는거 아니야?”라고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우리는 덜 바쁜 사람이 집안일을 더 하는 것으로 협의를 했고, 현재는 덜 바쁜 내가 대부분 자잘한 집안일을 하고 있다. 아직 아이도 없고, 두 사람 사는데 집안일이 크게 많지 않아 불만은 없다. 집안일이 많지는 않지만 때때로 남편의 도움이 필요한 부분에 대해서는 꼭 미리 요청을 한다. 많은 남편들이 그렇듯 얘기를 하지 않으면 먼저 알아서 하는 스타일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가끔 이렇게 알아서 분리수거를 버리거나 하면 그렇게 좋을 수가 없다. 이게 이렇게 좋아할 일인가 싶겠지만, 나는 오늘 이 에피소드 하나로 오후 내내 기분이 좋았다.  사람마다 행복의 역치는 다르니까요. 


#2. 기억력이 좋지 않아 좋은점 

남편은 보통 주 7일 일을 하고, 출근 후에는 서로 연락을 잘 하지 않는다. (결혼 전에 똑똑하고 자기 일 열심히 하는 남자와 결혼하고 싶다고 했는데, 결혼은 “제대로” 했다 싶다. 아 심심해~) 

몇 주 전에 토요일 밤 귀가 중에 남편이 전화를 했다. 내 선물을 샀다며 먼저 자지 말고 기다리라고 한다. 전화 음성에서 막 신나고 자신감 충만한 목소리가 느껴져 어쩐지 너무 귀엽다는 생각도 들었다. 갑자기 무슨 선물이지? 혼자 온갖 상상의 나래를 펼친다. (가방인가?? 옷인가??? 짧은 시간에 여러가지 생각을 했다. 그 와중에 가방을 생각한 나 자신이 너무 속물같다… 반성해) 

위풍당당귀가한 남편이 들고 온 선물은 이솝(Aesop) 화장품이었다. 휴직하고 집에 있는 나에게 아무것도 사준 게 없는 것 같아 사왔다며, 3월 생일 때 뭘 사줬는지 기억이 나지 않아서, 혹시 선물을 안 사준 건지 두려움에 떨며 샀다고 한다. “여보, 나한테 목걸이 사줬잖아.” 라고 하니 남편이 절망했다. ㅎㅎㅎ 여러분 기억력이 좋지 않은 남편이 이렇게 좋을 때가 있습니다. 


나는 감정의 기복이 별로 없고, 좋은 게 좋은 거라고 생각하는 스타일인 반면, 남편은 나보다 감정적으로 예민하고 어떤 사건에 대해 옳고 그름을 따져 판단하는 쪽에 가깝다. 결혼 초에는 내가 무심코 한 어떤 행동에 남편은 기분이 상하고, 나는 남편이 어떤 포인트에서 화가 났는지 알 수가 없어 다투기도 했다. 이런 다툼은 보통 나의 무심한 행동과 그 무심함에 남편이 마음이 상하는 패턴이었고, 그 당시에 나는 그냥 넘어가면 될 일을 참 예민하다는 생각도 했었다. 

결혼 5년차가 되고 보니 대략 어떤 포인트에서 남편의 감정이 상하는지 대충 알게 되어 다툼은 거의 하지 않게 되었고, 이제는 예민하고 약간은 까칠한 남편과 사는 것이 단점보다는 장점이 많다고 생각한다.

내가 지나가는 말로 얘기한 어떤 아이템을 기억했다가 생일에 사다 준 일은 내가 아마 오래도록 고마워할 에피소드 일 것 같다. 또 친정에서 엄마가 요리를 하고 계시면 남편은 부엌에 들어가서 엄마에게 이것저것 물어는 등 가끔 보면 딸보다도 더 살가운 사위의 모습을 가지고 있기도 하다. 이 부분은 특히 내가 고마워하는 부분이다. 또 내가 부당한 일을 당했다거나, 가끔 타인에게 불편한 얘기를 해야할 때 남편은 나 대신 가서 할말을 똑 부러지게 해 주기도 한다. 최근에도 아래집에서 새벽부터 인테리어 공사를 해서 시끄러울 때, 내가 어려워하니 남편은 대신 내려가서 일을 해결해 주었다. 

어떤 성격이든 장단이 있고, 좋은 점만 취할 수는 없는 건 당연하다고 생각한다. 가끔 예민해서 나를 힘들게 하기도 하지만 그래도 같이 있으면 재밌고, 든든한(벌레도 척척 잡아주는) 남편과 살고 있다.  

작가의 이전글 사소하지만 사소하지 않은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