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근무지에서의 일이 점차 손에 익을 무렵, 처음 보는 할머니께서 처방전을 들고 오신 적이 있다. 위장약 한 달분을 처방받아 오셨는데, 기존에 다니시던 병원에서 받던 약을 그대로 처방받으셔서 우리 약국에 없는 약이 많았다. 추측컨대, 근처로 이사 온 지 얼마 되지 않으신 모양이었다. 대체 조제를 여쭤보니 똑같은 약을 고집하셔서 어쩔 수 없이 주문해서 드려야 하는 상황이었다. 상황 설명을 하고 동의를 구하는 과정에서 할머니의 말투가 약간 무뚝뚝하시고 세다는 걸 느꼈다. '앞으로도 자주 오실 텐데 투약할 때 고생하겠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인상적인 환자들은 이름과 외모가 기억에 잘 남는 법. 그 할머니의 첫인상은 썩 좋은 이미지는 아니었던 것 같다.
할머니는 그 이후로 자주 약국에 오셨다. 당신의 약을 타실 때도 있었고, 몸이 불편한 남편분의 약을 심부름으로 사가실 때도 있었다. 작은 키에 뽀글뽀글 펌을 하신, 항상 수요일이나 금요일 오전에 배드민턴 라켓을 백팩에 넣고 나타나셨던 할머니. "속이 많이 쓰리세요?"라고 말을 걸어보아도 할머니는 받아 주시지 않고 묵묵부답인 경우가 많았다. 오히려 검수 중인 약포지들을 당신께서 확인하시려고 챙기시려 할 때가 많았다. 말을 걸어도 안 받아주시고 자꾸 빨리 달라고 하셔서 심술이 난 나도 한동안은 검수에 집중이 안된다는 핑계로 약간의 짜증 섞인 말을 내뱉곤 했다.
그래도 내가 투약하는 시간에 주로 오시는 경우가 많아 응대를 자주 하다 보니 조금은 정이 들었나 보다. 대학교 다니기 전까지 함께 살았던 친할머니 생각도 나고 가끔이지만 웃으면서 말도 해주시니 오히려 내가 기다려지곤 했다. 약국에서 처음 생긴 나만의 고객 같은 느낌이 들었다고나 할까. 오시면 더 잘해드리고 싶고, 무릎이 아프신지 뒤뚱거리시는 걸음을 보면 뭐라도 챙겨드리고 싶은 마음이 생기곤 했다. 할머니도 받아주시는 경우도 잦아져서 응대하기가 편하고 재밌어졌다. 종종 할머니는 약을 잘못 사가면 할아버지께서 크게 역정을 내신다고 투덜대셨다. 항상 불평하시면서도 할아버지 약을 챙기시는 게 존경스럽기도 했고, 평생을 해로한 남편을 위한 사랑이 느껴지곤 했다.
일하기 시작한 지 1년쯤 됐을 때, 그 약국을 그만 두기로 하니 할머니 생각이 났다. 그만두고 계속 생각날 것 같은 환자 1순위였기 때문이다. 나만의 착각일 수 있지만 할머니와 친해졌다고 생각하니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 타이밍도 잘 맞지 않아 인사도 못하고 그만두게 되고 말았다. 위장은 많이 괜찮아지셨는지, 할아버지 건강은 괜찮으신지 문득 궁금해진다. 무뚝뚝함에 가려져 있던 주름이 깊게 파인 할머니의 밝게 웃으시던 모습이 그립다. 남편을 위해, 자식들을 위해 평생을 바치셨을 할머니. 노년에 이르러서 배드민턴을 배우면서 여생을 보내시면서도 당신의 남편을 위해 투덜대며 약 심부름을 하시는 할머니. 수년이 지난 지금도 건강히 잘 계신지 종종 생각이 나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