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픈 하늘
세월이란 시간의 흐름 속에서 유독 의미 있는 공간이 있다. 서울역의 의미가 그러하다.
강원도 철원의 휴전선 DMZ에서 일등병으로 근무 중 “모친 사망”이란 전보를 받았다. 10.26 사태가 일어나고 몇 달 후 겨울의 어느 날 아침이었다. 진지가 있는 산봉우리 아래 계곡에는 물안개로 채워져 바다를 연상하게 하였다. 멀리 보이는 산봉우리들은 섬처럼 군데군데 외롭게 떠 있었다. 믿기지 않는 현실이었다. 교통편은 열악하여 춘천, 마장동 버스 터미널을 거쳐서 서울역에 도착한 것은 저녁때였다.
일제 강점기 지었다는 서울역 광장에는 눈이 내려 있었고, 낮에 햇빛에 녹았다가 저녁 무렵에는 얼기 시작하여 석양을 받아 살짝 언 얼음이 반짝이고 있었다. 붉은색 벽돌 건물은 낯선 빛을 띠고 있었다. 정확히 말하면, 석양과 짙은 구름이 버무려진 회색을 띠고 있었다. 저녁이 되자, 사람들이 각자의 목적지로 떠나고, 남은 사람들은 야간열차를 기다리는 사람들과 갈 곳 없는 집 없는 사람들이 여기저기 모여 앉아 있었다. 영혼이 자유로운 그들은 제 세상을 만난 것처럼, 안주도 없는 소주를 병째로 마시고 있었다. 텃줏대감처럼, 몇몇 어린아이들에게 장난 삼아 어르고 밤의 무질서가 자리를 잡아가고 있었다. 무질서 가운데, 또 다른 그들만의 질서가 세워지고 있었다. 무질서가 질서를 세우고 있었다.
동대구역에 새벽 5시경 도착하였다. 택시를 잡아 타고서, 공사용 자재가 군데군데 흩어져 있는, 개통을 앞둔 구마 고속도로위에 내렸다. 그 새벽에 불이 환하게 켜져 있는 곳은 300미터쯤 떨어진 곳, 우리 집뿐이었다. 꼬박 출발부터 하루가 걸렸다. "설마 하니, 돌아가셨을라고. 나의 얼굴이나 보시려고 소위 말하는 거짓 전보(관보)를 보내셨겠지”. 그렇기를 간절히 바랐다. 점차 집이 가까워 오자 점점 발걸음이 무거워졌다. 논둑에 주저앉아 담배를 한대 피웠다. 입대 전까지만 해도 건강하셨는데, 설마 그럴라고. 나도 모르게 긴 한숨과 함께 멈춰 섰다. 그리고는 다시 담배를 한 대 더 물었다. 한데, 마당에 불길한 차양막이 처져 있고, 백열 등불은 환하게 켜져 있는데, 집안은 조용하였다. 그 시간에 대문은 활짝 열려 있었다.
뚜벅뚜벅 대문을 들어와 마당에 들어섰을 때, 누군가가 나를 발견하였다. “왔다!” 그 한마디에 이방 저 방에서 지쳐있던 식구, 친척들이 쏟아져 나왔다. 누나가 슬픈 목소리로 이렇게 말했다. “엄마가 세상을 버렸다.”
그날 아침이 발인날이었다. 국가 비상시국이라 전보가 늦게 전달되었던 것이다. 큰 방안의 관 속에 누운 엄마를 보고서는, 발인은 나의 미쳐 날뜀과 광분으로 진행이 제대로 되지 않았다. 큰방의 관을 마당의 상여로 옮기는 사람들을 가로막아 섰다. “우리 엄마 살려 내라!” 그대로는 보내드릴 수 없었다. 군복 위에 입은 상주복을 벗어던지고, 상주용 지팡이를 상여꾼과 식구들에게 마구 휘둘렀다. 그 누구도 막을 수가 없었다. 동네 친구들을 포함한 상여꾼들이 나를 피해 도망 다녔다. 지금도 내가 왜 그렇게 이성을 잃고 행동했는지 모르겠다. 잿빛 하늘을 향해, 고함을 쳤다. “차라리 나를 데려가라!” 누나의 설득으로 내가 조금 진정이 되자, 상여가 움직이기 시작하였다. 상여는 엄마의 정든 집을 떠나, 진눈깨비가 내리는 가운데, 마을 뒷산 장지로 향했다. 하늘이 무너졌다는 의미를 깨달았다.
그리고 다시 휴전선 DMZ임무지로 복귀를 하였다. DMZ의 칼바람은 차갑고, 뇌리에는 항상 자책감과 엄마와의 추억과 잔영이 떠나질 않았다. 어머니를 잃은 자식의 의미를 곰곰이 삭히고 또 삭히며 세월을 견디어 냈다.
어느덧 결혼을 하여 서울에 있는 회사에 근무 중, 아내로 부터, 장인어른이 갑자기 돌아가셨다는 전화를 받았다. 서울역에서 광주 가는 호남선 매표소에서 만나기로 하였지만, 아내는 황망 중에 이미 떠난 뒤였다. 수중에는 당일 아침 용돈으로 받은 점심값 밖에 없었던 지라, 차비를 누군가에게서 빌려야 했다. 세상이 어디 만만한가. 우선 근처의 매점부터 방문하여, 이차 저차 설명하였으나, 누구 한 사람 거들 떠 보는 사람은 없었다. 약국의 주인은 눈만 멀뚱멀뚱 떠고서는 “그런데?” 하는 식으로 쳐다보았다. 미장원 아주머니는 “세상에 별 사람 다 본다” 하는 표정이었다. 마지막으로 서울역 매표소에 선하게 생긴 직원에게 간곡히 사정을 말하였더니, “사정이 딱하시군요. 보아하니 급히 내려가야 하는가 본데 한번 믿어 보겠습니다.” 하면서 천사 같은 얼굴로 차비를 빌려 주었다. 그때의 서울역의 색깔은 밝은 분홍색이었다.
3일 후, 산자의 슬픔, 이별의 아픔과 통곡 속에서, 장인어른은 동네를 한 바퀴 돌아, 당신이 그토록 소중히 키워온 밤나무 밭 언저리에 조용히 묻혔다. 첫 삽의 흙이 관위에 떨어지자, 장례 진행자가 고인을 보내드리는 유족으로서 각자의 귀중한 물건을 하나씩을 넣어 드려라고 하였다. 아내의 손수건과 목걸이, 처제의 머리핀, 처남들의 지폐, 담배가 조용히 관위에 올려졌다. 나는 장인 어르신 영혼이 서울 구경하실 때 필요하실 것이라고, 버스 토큰을 올려드렸다. 그 당시 토큰은 버스 탈 때 100원짜리 동전 크기 모양으로 화폐 대신에 통용되었다. 영정 사진 속의 당신은 감나무 앞에서 환히 웃고 계시는데, 남은 자들의 아픔과 슬픔의 시작이었다. 사진 속의 제주도 조랑 말위의 부부는 웃고 있는데, 장모님의 긴 고독과 회상과 추억은, 시도 때도 없이 스멀스멀 기어 나와, 항상 짙은 회색빛 시골 밤을 밝혔다.
일본지사에서 근무할 때, 어느 겨울날 한국에 잠시 다니러 갔던 아내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것이었다. 하네다 공항에서 탑승하여, 김포공항에 내리자, 이미 해질 무렵이 되었다. 부산행 국내선 비행기를 타려 갔으나, 이미 마지막 비행기는 떠난 뒤였다. 고속버스도 이미 막차는 출발해 버렸다.
하는 수없이 택시를 타고, 서울역에 도착하였으나, 다음날 새벽에 가는 첫 기차를 탈 수밖에 없었다. 한 겨울밤의 서울역은 참으로 침울했다. 칼바람 부는 짙은 검은색이었다. 노숙자들이 한 사람 한 사람 의자 위에 라면 포장용 빈 박스 등을 펼쳐서 하루 밤의 휴식을 준비하고 있었다. 남자들의 밤의 세계는 제법 질서가 잡혀 있었다. 남루한 차림의 40대로 보이는 한 여자와 어린 여자아이는 추워서, 담요를 머리까지 뒤집어쓰고, 자고 있는지 깨어 있는지, 서로 꼭 껴안고 머리를 앞으로 숙이고 있었다.
새벽이 되자 호루라기 소리와 함께 갑자기 단속반이 나타났다. 마지막 기차 이후 역내에는 근무자 외에는 잔여 인원이 남아 있지 않아야 한다고 했다. 눈치를 보며 하나 둘 자리를 떴다. 그 한밤중에 어디로 가는 걸까? 한 여자와 어린아이도 담요를 들고서, 어디론가로 사라졌다. 어디로 간 걸까? 어디로 가야 하나?
새벽 열차를 타고, 부산역에 내려서 장례 병원에 도착하였을 때는 아침이었다. 아버지가 큰 형님이 살고 있던 부산으로 거처를 옮겼기 때문이다. 모두들 늦게 도착하였다고, 사고라도 난 줄 알고 걱정과 비난 일색이었다.
발인 전야에 고인의 옷을 갈아입혀드리고, 성당의 레지오 단원들의 찬송가 속에 아버지의 이마에 손을 대고, 눈물의 기도를 올렸다. 소중히 간직했던 묵주를 손에 쥐어 드렸다. 고향에 모셔져 있던 어머니도 개장 후, 화장을 하여 같이 모시기로 결정하였다.
화장터는 일정에 맞추어 사무적으로 바쁘게 돌아갔다. 관에 매겨진 번호가 엘리베이터의 층수를 알리는 깜빡임과 같이, 눈앞의 전광판에는 분주히 바뀌고 있었다. 어떤 30대 여인이 어린 아들과 함께 남편을 통곡 속에 이별하고 있었다. 그녀의 남편은 사진 속에서 빙그레 웃고 있었다. 분쇄된 유골을 안아 들고 돌아선 여인의 어깨가 들썩였다. 어디로 가야 하는 걸까?
마침내, 5번과 6번의 번호를 위에 얹은 어머니 아버지의 관이 쇠문을 열고 각각 들어 가자, 모두들 마지막 순간의 절망감과 후회와 소중한 추억과 남은 자들의 통곡이 화로 속으로 함께 빨려 들어갔다. 그리고 한 줌의 분쇄된 유골이 진공 포장에 싸여, 분청사기에 두 분이 모셔져 나왔다.
경남 양산의 영혼의 쉼터, 하늘 공원으로 모셨다. 모든 장례절차가 끝날 무렵 눈이 펑펑 쏟아졌다. 흰 눈이 눈에 들어 가자, 물인지 눈물인지 흘러내렸다. 그날 양산의 하늘색은 서울역에서 본 그 하늘의 색깔과 같은 짙은 회색이었다.
■ 서울역 지도 : https://goo.gl/maps/CDqSQEx1fZwbiSXL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