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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암사의 선암매 (1)

스님의 첫사랑

by 애바다

살구가 노랗게 잘 익었다.


지금의 옆지기, 하이디랑 30여 년 전 천년 고찰 선암사 내에, 진영각과 무전 사이에 있는 오솔길을 오르고 있었다.


어느 50대로 보이는 스님 한 분이 선암사 선암매에 달린 살구를 기다린 대나무 작대기로 혼자서 툭툭

털고 있었다. 기이하게도, 거기에 달린 열매를 꼭 따야겠다는 목표를 가진 그런 자세는 아니었다. 한눈에 보기에도 보통 스님은 아니었다.

참선을 수행하다가, 잠시 휴식을 취하는, 잘은 몰라도 이산사에서 오래도록 불도를 수행하고 있는 그런 고상한 스님 인상이었다. 툭! 툭! 어쩌다가 한 두 알이 땅에 떨어 지자, 줍지도 않았다. 긴 장대 끝을 땅에 대고 서서는 하늘에 있는 구름인가, 무엇인가를 쳐다보다가, 잠시 생각에 잠겼다. 우리를 보다가, 쉬었다가, 또 툭! 툭! 살구 나뭇가지를 건드렸다.


이 스님의 살구 따는 모습에, 처음에는 구경하다가 왠지 모를 친근감을 느꼈다. 어디서 그런 용기가 나왔던지 대뜸, “스님, 살구 한 알만 주십시오”그러나 ”이 사람 줄려고요”란 말은 안 나왔다. 그때는 나도 숙맥이었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이, 대나무 막대기를 땅에 뉘이더니, 노란 살구 몇 알을 스스럼없이 집어 주었다.

그리고서는 다짜고짜, 장대도 살구도 땅 위에 그대로 두고서는, 손으로 자기를 따라오라는 것이었다. 속으로 겁이 덜컥 났다. 뭔가 내가 큰 실례를 범한 것이 아닌가 하고.


대웅전과 건물 몇 동 지나면서, “괜히 살구 한알 얻으려다가 이거 혼나는구나” 하는 후회를 하기 시작하였다. 아니면, “너희들, 액땜을 하지 않으면, 뭔가 앞으로 큰일을 당하겠구나”하는 그런 옛날 고승의 전설 같은 예언이 나올지도.


어떤 건물의 방에 따라서 들어갔다. 스님 하시는 말씀이, 이방에는 일반 신도들은 절대 못 들어오는 곳인데, 당신들은 특별히 자기가 들어오게 했다는 것이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스님들 전용 강의실이었다. 그 스님은 대학으로 치면 교수님이었다. 어쩔 줄 몰라 안절부절못하고, 나도 모르게 무릎을 꿇고 앉았다. 물론 하이디도 나를 따라서. 점점 불안해졌다.


하, 이거 “너희들 관상을 보아하니, 나중에 결혼하면 큰 화가 있을 것이다”. 이런 말씀이 나오는 것이 아닐까? 고개를 들어 얼굴을 힐끗 보니, 인격이 고매하고, 무엇이든지 포용할 수 있는 그런 인품을 지닌 것 같아 조금은 안심이 되었다. 아마 “불도에 대해 강의를 하시려고 하나 보다”하고 두 손을 맞잡고 무슨 말씀인가를 기다렸다. 또, 불안이 엄습해 왔다. 내가 알고 있는 불교 지식이 고작, 손에 꼽을 정도였으니.


드디어, 스님의 입이 떨어졌다. 휴식 겸, 오늘 살구를 따고 있는데, 두 사람이 손을 잡고 이곳에 올라오고 있기에, 갑자기 옛날 스님의 속세의 일이 기억에 되살아나서, 우리를 이곳으로 불렀다는 것이었다.


스님이 불가에 입문하게 된 속세의 일은 이러하였다. 어느 시골 같은 한마을에, 담을 사이에 두고, 두 살 밑의 예쁜 아가씨와 사랑을 하게 되었다는 것이었다. 어릴 때는 소꿉장난 친구였으나, 소년 소녀 시절 성장하면서 사춘기 시절 한동안은 서로 지나치기만 하여도, 이야기는 커녕 가슴이 두근두근하고, 얼굴만 붉어졌었단다.


나이가 점점 차자, 둘은 너무나도 사랑하여, 하루라도 안 보면, 몸에 두드러기가 날 정도였다. 처녀 쪽은 대대로 격식 높은 엄격한 유교적 선비 집안이며 종갓집이었다. 외동딸이며 더군다나 한동네 결혼은 남세스러운 일이라며, 절대로 안된다며, 특히 처녀 아버지의 반대가 극심하였다고 했다.


그래도, 젊은 청춘이라! 하, 어느 날 그 처녀는 덜컥 임신을 하였다. 처녀 부모는 조상에 볼 면목이 없다고, 나가 죽어라고 종주먹을 댔다.


그러자, 처녀는 마침내 며칠 뒤, 두견새 우는 보슬비 내리는 밤에, 아무도 몰래 마을 뒤에 있는 큰 연못에 치마를 폭 뒤집어쓰고, 깊이가 얼마나 되는지도 모르는 소에 빠져 죽어버렸단다.


스님은 방바닥에 앉은 자세에서 두 팔을 뒤로 방바닥을 집고 천정을 한동안 응시하였다. 그리고 물기가 묻은 떨리는 음성으로 이렇게 말했다. “그놈의 가시네가 죽어부렀다 아이가! 그놈의 가시네가!


선암사 살구나무에 살구가 익어 갈 때쯤이면, 노란 살구를 집어 주던 스님의 커다란 눈방울이 떠오른다. 그리고 그 애달픈 이루지 못한 첫사랑도.


한갓 여행자에 불과한 스쳐 지나가는 방문자에게 솔직하게 말씀하신 옛 속세의 일을 그 스님에게 누가 될까 봐 그냥 묵혀두고 오랫동안 마음에 담아두었었다. 그 일로 해서 인간은 누구에게나 번뇌가 있고, 그것을 깨쳐 가는 과정이 인생이란 것을 깨달았다.


■ 제목을 실명 '선암사의 선암매'로 바뀌었습니다. 처음 글 올릴 때 제목을 '선불사의 선불매'로 한 이유는 스님과 사찰에 누가 될까 봐서 실재 사찰 이름을 숨겼었습니다. 그러나 인터넷에 검색하여 보니, 역시나 선불사라는 사찰 이름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글의 내용과 관련도 없는 선불사라는 사찰 이름 대신에 제가 자주 찾아갔던 선암사로 이름을 변경하였습니다. 천년 고찰 선암사는 언제나 중생을 따스하게 품어 주는 경치 좋은 사찰입니다. 그 스님과의 만남으로 해서, 스님은 제 인생의 폭과 지평선을 넓혀 주셨습니다. 스님 감사합니다.(20220318)


위치 주소 : https://goo.gl/maps/ovQ9VqiEG2coq44S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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