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리산 "최후의 원시림" 계곡 전체 청정한 선경. (상당한 기간 산림보호를 위하여 입산통제 중)
* 10경 - 섬진 청류(蟾津淸流)
섬진강의 푸르고 맑은 강물과 백사장과 돛단배 (참조 : 대한민국 구석구석)
1차 등산은 작년(2022) 추석 다음날 성삼재에서 출발하여 노고단 정상과 반야봉 등산 후 화엄사로 하산하는 지리산 맛보기 엿보기 탐색 수준의 등산을 했다.
2차 등산은 작년 가을 지리산을 종주(백무동-장터목-천왕봉-장터목대피소-세석대피소-벽소령대피소-성삼재 코스) 목표로 시도했었지만 실패했다. 동서울터미널 야간 고속버스를 타고 백무동에서 하차, 장터목대피소를 거처 천왕봉 정상(1,915m)을 무사히 올랐었다. 그러나 장터목대피소를 거처 세석대피소 근처에서 오른 다리 우측 근육 통증으로 종주를 포기하고 백무동으로 다시 내려와 귀경했다. 벽소령대피소 1박 예약도 취소했다. 특히 벽소령 명월을 꼭 보고 싶었었지만 무리였다.
이번 3차 지리산 산행은 천왕봉~촛대바위구간을 제외한 나머지 구간(성삼재-벽소령대피소-세석대피소-백무동코스)을 돌아보기로 했다. 그동안 절치부심, 때를 기다렸다. 마침내 그런 기회가 찾아왔다.손 2호의 유치원 여름방학(1주간)이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1차와 2차와 금회 3차 등산을 합하면, 실질적으로 지리산을 종주하는 풀코스였다. 결산하여 보면, 첫째 날은 성삼재~벽소령대피소간 거리는 도표상의 자료에 따르면 약 16.6km, 공식 소요시간 8시간 30분(실재 소요 시간 약 10시간), 걸음걸이수 약 39,000보를 걸었다. 둘째 날은 벽소령대피소~백무동 간 거리는 약 12.8km, 공식 소요시간 7시간(실재 소요시간 약 9시간), 걸음걸이수 약 34,000보를 걸어 하산하였다. 세석대피소~백무동 구간이 하산코스지만, 내리막 가파른 위험한 코스여서 걸음수가 많이 늘어났다. 만만하지 않았다.
동서울 고속버스 터미널 34번 탑승장
주말(2023. 07.28. 22:50 출발, 금, 장마 끝 맑음, 32도 전후), 동서울 고속버스 터미널에서 야간 심야 버스를 탔다. 성삼재(1,090m)에 다음날 02:40분경 도착했다. 특히 7월 말 8월 초 주간에 등산객이 폭증하여 심야 버스를 5분 간격으로 출발 증설 운행하고 있었다.
하루 만에 지리산 종주하는 열혈 젊은 크레이지급의 베테랑들이 즐비하지만 나에게는 무리다. 따라서 중간 지점의 대피소 1박 예약(국립공원 숙박 예약 사이트에서)은 필수다. 출발 일주일 전쯤에 고속버스를 예매하고대피소 예약 사이트에 접속하여 보니, 벽소령대피소는 이미 예약 완료 매진되어 있었다. 부득이 등산을 8월 말로 잠정 연기했다. 물론 고속버스 예매도 취소했다. 그런데 다음날 심야에 숙박 예약 사이트에 들어가 보니, 벽소령 대피소에 왕창 자리가 났다. 아마 어떤 단체 등산팀이 취소한 것 같았다. 즉시 대기소 예약을 먼저 하고, 누군가가 갑자기 취소한듯한 마지막 1자리 지리산 성삼재행 버스 티켓을 거머쥐었다.
성삼재 버스정류장 (노고단대피소)
성삼재의 노고단대피소 앞 주차장에 도착한 버스 탑승객들은 하차와 동시에 헤드랜턴을 머리에 장착하거나 손전등을 들고 노고단 방향으로 일제히 올라갔다. 한국인은 역시 뜨겁고 맹렬하게 산다. 달은 이미 넘어갔다. 모두 약속이나 한 듯이 캄캄한 어두움 속에서 행군 행열로 줄지어 움직이기 시작하였다.
장마가 끝난 직후라 땅이 축축하게 젖어 있었고 식물들은 수분을 잔뜩 머금고 있었다. 돌부리에 차이거나 미끄러지기도 했다. 엎어지거나 자빠질 뻔한 아찔한 자세가 몇 번 나왔다. 안개가 자욱하게 끼어 발아래 등산로의 돌부리가 잘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등산로 옆의 풀과 덩굴식물의 줄기가 팔을 휘감아도 차가운 이슬방울의 감촉이 좋았다.
노고단 고개 / 노고단 정상 출입구 표시
노고단 정상(1,507m)은 1차 탐방 시에 이미 올라가 보아서 패스했다. 이곳은 별도로 예약 후에 출입구를 통과할 수 있다. 자연을 보호하기 위함이다. 올라가는 시간도 오전 5시부터 가능하다. 노고단 고개(1,440m) 출입구('천왕봉 가는 길'이란 표시 있음)에서 몇 발자국 옮겨 등산로에 접어들자 드론이 날개를 펼친 형상의 산수국과 키 작은 조릿대가 어둠 속에서 반겨줬다. 조릿대 이파리 뒷면이 불빛에 반사되어 형광을 발휘한다.
돼지령 / 밤하늘
돼지령 근처에서 “히야~ 별들이 정말 아름답다”라는 어느 남성의 떨리는 감동의 목소리에 하마터면 “정말 그렇지요”라고 내가 실수로 대답할 뻔했다. 알고 보니 일행(아내)에게 한 말이었다. 완전한 암흑세계여서 하늘에 무수한 별들이 선명하게 박혀있었다. 사진을 찍어 보았지만 헤드랜턴의 불빛 때문에 별빛을 잡아 낼 수가 없었다.
어릴 적 시골 마당에서 짚으로 만든 돗자리 (덮석) 위에서 엄마 무릎 베고 누워서 보던, 그동안 잊고 지냈던 그 별들에 대한 아련한 추억이 되살아났다. 대청마루에서 잠결에 모기장을 몸에 둘둘 말고 축대 위로 떨어졌던 개구쟁이 코흘리개 시절도.
임걸령 샘터 / 여명
임걸령 쉼터에서 5m 북쪽, 등산로 좌측에 샘터가 있다. 여명이 밝아 왔다. 얼마나 오래간만에 보는 장면인지 모른다. 바쁜 일상을 살다 보니, 이렇게 이른 시간대에 일어날 일이 몇 번이나 있었겠는가? 밤하늘의 별과 여명을 잊고 살아온 것이다.
반야봉 정상(1,732m) 구간은 1차 탐방 시에 이미 올라가 보아서 패스했다. 해가 떴다. 노루목을 지나 반야봉 뒷모습을 보았다. 구상나무 고사목들이 많이 보였다. 구상나무 고목은 지리산의 또 다른 상징이라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삼도봉 / 햇살
삼도봉(삼도의 경계란 의미, 경남 전북 전남)에서 바라본 반야봉과 산평선이 아름답다.
화개재 / 회복 복구 중인 터
화개재에 전설이 있을 법했다. 예를 들면, 외동딸이 재너머 뱀사골로 시집가서 홀로 살아가는 아버지의 안부가 걱정이 되어서 화개재 5일 장날마다 먹거리를 인편에 부쳤다는 등. ‘재너머 산촌에는 누가 살기에‘라는 노래가 맴돌았다. 뱀사골야영장으로 내려가는 길과 연결되어 있다. 산평선이 보이고 안전쉼터 훼손지 복원 사업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헬리콥터 착륙장 근처 산수국에 벌들이 머리를 박고 꿀을 빨고 있었다. 평지의 주먹만 한 크기의 수국꽃덩어리는 향이 없고 모양만 꽃이다. 줄기의 일부분이기 때문이다. 꺾꽂이 혹은 뿌리 번식이다. 벌이 있는 것으로 보아 산수국은 열매가 있을 것으로 짐작이 된다. 이슬을 머금은 보라색 꽃잎이 이파리 위에 떨어져 핑크빛으로 물들어 변해 있었다.
토끼봉과 잠자리
토끼봉에 평지가 있어 쉬어 갔다. 산평선과 어우러진 오솔길이 걷기에 참 좋다. 편안하고 아늑한 느낌이다. 나의 나머지 생도 그러하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 사진에 담아 보았다. 잠자리가 아침 햇빛과 이슬을 먹고 있다. 산줄기와 계곡이 아름답다.
토끼봉~명선봉 일원 훼손지 복원 안내
토끼봉~명선봉 구간은 훼손지 복원 중이다. 산평선과 구상나무 고사목이 지리산의 멋을 더한다.
연하천 대피소
마침내 연하천대피소에 도착하였다. ’ 천’이란 이름처럼 지리산 대피소중에서 물이 제일 풍부한 곳이다. 식수, 식탁과 의자 그리고 조그마한 도랑이 잘 어우러진다. 어느 노부부가 도랑옆 숲 속에 앉아 아침 식사를 하고 있었다.
대피소 출입구에 나이테가 있는 소나무 판자에 지리산 시인 이원규의 시의 일부분을 새겨 걸어 두었다. “그대는 나날이 변덕스럽지만 지리산은 변하면서도 언제나 첫 마음이니 행여 견딜만하다면 제발 오지마시라”. “지리산의 눈으로 지리산의 가슴으로 지리산의 가르침으로”가 새겨진 목판이 지리산을 함축하여 잘 표현했다.
행여 지리산에 오시려거든 / 지리산의 눈 가슴 가르침
형제봉 산평선이 멋져 동영상으로 담아 보았다.
부자 바위 / 산평선
벽소령대피소에 도착하기 약 30분전에 부자 바위가 있다. 거대한 암석으로 등산로를 거대한 벽처럼 떡하니 버티고 앉아 웅장한 자태를 드러내고 있었다. 선녀와 나무꾼의 전설과 유사한 전설이 있다. 나무꾼(인걸)이 목욕하던 선녀 중 한 명(아미)의 옷을 훔쳤다. 두 아들을 낳고 알콩달콩 살다가, 어느날 선녀의 꾐에 빠진 나무꾼이 선녀를 믿고 찢어진 옷을 건네주었다. 선녀가 옷을 기워 입고서는 남편과 두 아들을 버리고 하늘로 날아 올라갔다. 결국 나무꾼과 두 아들은 기다리다가 바위가 되었다. 그 누구도 도와줄 수 없는 애절한 사연이다. 부자 바위는 지리산 벽소령의 또 다른 상징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일설에는 형제 바위라고도 부른다고 한다.
벽소령대피소
오후 1시경에 벽소령대피소에 도착했다. 명성과 다르게 열악한 환경이었다. 수도꼭지 1개로 식수를 해결하고 있었다. 화장실건물 아래 세면시설로 내려가는 길을 출입금지 폐쇄했다. 과거 일부 등산객들이 무분별하게 비누로 샤워를 하거나 음식찌꺼기를 무단 폐기하여 부득이 한 조치를 하게 된 것이라는 관리인의 설명이 있었다.
숙소 내부
오후 3시부터 입실이 허용되었다. 입구에 신발장이 있다. 약 60인용 수용 규모로 남녀구역으로 구별되어 있다. 내부는 목재 2층 구조의 숙소다. 바닥에는 전기 온열 배선이 개인별로 설치되어 있다. 등산 전문인들은 배낭에서 침낭을 꺼내서 그 속에서 잤다. 충분한 숙면을 취하는 것 같았다. 긴 산행에 지친 등산객들의 숙면 소리(코골이)가 들려왔다. 그 소리는 다음날 숙소를 벗어날 때까지 계속되었다. 물론 나도 그 코골이 소리를 만든 등산객 중 일인일 것이다. 자연스러운 현상으로 흠이 되지 않는다.
저녁을 해결하기 위해 배낭을 뒤져보니 컵라면 한 개, 김밥 한 줄, 계란 한 개, 사과와 참외 몇 조각, 딸이 챙겨준 간식이 조금 남아 있었다. 컵라면 제외하고 나머지는 다음날 먹기로 했다. 산중에서는 생존을 위하여 아껴 먹어야 한다. 매점에 가서 메뉴를 살펴보니 먹을 것이라고는 햇반 밖에 없었다. 컵라면은 법으로 못 팔게 되어 있다고 한다. 뜨거운 물도 공급이 안된다고 했다. 햇반 2개를 샀다. 햇반 1개는 전자레인지에 돌려 따뜻하게 해 주었다. 1개는 비상용이다. 갈대로 만든 젓가락을 얻었다. 배낭 속 컵라면 1개를 꺼내 들고 식당에 갔다. 노년의 남성 두 분이 부스터를 켜 음식을 끓여 먹고 있었다. 부탁하여 뜨거운 물을 얻었다. 고맙게도 물을 손수 끓여 주셨다.
대학 산악회 출신의 키 큰 분은 등산 중에 자주 만나게 되더니, 세석대피소에서 손수 지으신 농장의 방울토마토를 주셨다. 대학 엠티 때 세석 계곡의 급류에 휩싸여 큰일을 당할 뻔했다는 추억을 이야기해 주셨다. 나중에는 천왕봉을 가뿐하게 등산하고 내려온 그분을 백무동 버스정류장에서 또다시 만나 이야기를 나누었다. 튼튼한 긴 다리가 부러웠다. 농담으로 지리산 100회 등반이 목표라고 하셨다. 서울 생활을 청산하고 오 년 전에 고향 남원으로 내려오셨다고 했다. 그분은 음정 가는 버스를 타고 먼저 떠났다. 그렇게 아쉽게 헤어졌다. 이즈음 나이 대에는 서로 연락처를 잘 묻지 않는다. 서로에게 부담이 되기를 피하는 것이다.
벽소령의 명월
낮에 미리 잠을 자 두어서 초저녁에 일어났다. 오늘의 하이라이트 행사인 벽소령 명월을 감상하기 위함이다. 암흑 속의 벽소령대피소 서산에 온달에 가까운 명월이 걸려 있었다. 캄캄한 밤하늘 무수한 별들, 서산의 명월을 느끼기 위해 마당 탁자 의자에 드러누워 버렸다. 한밤중 흰색 물체(흰 고양이 혹은 흰 토끼로 추정)가 음정으로 내려가는 소로 길을 휙 가로질러 지나갔다. 습기가 많아 지붕에서 물이 뚝뚝 흘러내린다. 20도 정도로 포근한 느낌의 밤이었다. 지리산 반달곰이 찾아와도 무섭지 않은 그런 별이 빛나는 산중의 밤이었다. 야외 나무 식탁이 축축하게 젖어 있었다. 풀벌레소리가 가끔씩 들러 온다. 숙소의 희미한 실내등 불빛이 흘러나왔다. 별과 둥근달과 함께 벽소령을 밝히고 있다. 평화로운 한여름 밤의 벽소령 풍경이다.
벽소령 숙소 출입구 / 산평선
오전 5시경에 벽소령대피소를 출발했다. 숙박객 중에서 제일 먼저 나섰다. 오전 3시경부터 출발할 수 있다. 사고방지를 위하여 입산시간 지정제를 실시하고 있다.
산평선과 급경사지 위험 표지판
여명, 하늘이 옅은 주황색을 띠고 열리고 있었다. 급경사지 낙석 위험지역 표지판, 예측 시스템(중환자 신체 외부 각 부위를 연결한 어지러운 선처럼 연결, 각 각 바위에 부착)이다. 집채만 한 바위들이 당장에 무너져 흘러내려도 이상하지 않은 형상이다.
(구) 벽소령 길
(구) 벽소령 길의 설명판이 있다. 1968년 착공 1971년 준공한 군사작전도로로 현재 폐쇄되었고 자연회복중이다. 왠지 모르게 노란 원추리가 지리산의 아프고 슬픈 역사를 대변하는 것 같다. 임진왜란 의병, 동학혁명군, 항일 빨치산, 여순 사건, 한국전쟁의 빨치산도 이곳에 몸을 숨겼고, 지리산은 피신한 이들을 보듬어 주었다. 태양이 솟아오른다. 산평선은 지리산 줄기 어디에 서서 보아도 어김없이 펼쳐진다.
덕평봉 / 산수국
덕평봉(1,558m) 근처에는 산수국이 많이 눈에 띈다.
선비샘
선비샘 설명판이 세워져 있다. 옛날 덕평골에 화전민 이 씨라는 노인이 살았다. 노인은 천대와 멸시를 받으며 살아 죽어서라도 존경을 받고 싶어 자식들에게 자신의 묘를 상덕평의 샘터 위에 묻어 달라고 유언을 하였다. 효성스러운 자식들은 그의 주검을 샘터 위에 묻었다. 그로부터 지리산을 찾는 사람들이 샘터의 물을 마시고자 하면 자연스럽게 허리를 구부려서 무덤으로 절을 하는 형상이 되었다. 죽어서도 남들로부터 존경 아닌 존경을 받게 되었다는 해설이다.
산평선과 돌무덤
약수터 위에 그분의 돌무덤이 있다. 약수터에 물을 마실 수 있는 국자가 2개 있었다. 일부러 엎드려서 물을 샘터 입구를 통해 마셨다. 그분 덕분에 갈증을 해소했고, 그분에게 존경을 표하는 것이 나그네로서 당연한 예의가 아니겠는가? 시험성적표도 게시판에 부착되어 있다. 물론 “적합”이다.
산평선과 잠자리
아침 해를 받은 산평선이 장엄하게 펼쳐져 있고 이파리 끝의 이슬이 영롱하다. 잠자리와 산평선이 지리산의 신비와 평화로움을 나타낸다. 잠자리에게 날아가지 말라고 통사정하는 심정으로 조심스럽게 다가가 카메라에 담았다. 운 좋게도 지리산 하늘에 떠 있는 잠자리의 비상 순간을 포착했다.
벌써 가을을 알리는 단풍이 언듯 언듯 비친다. 천왕봉이 어렴풋이 보였다.
칠선봉(1,558m)이 사람 형상으로 우뚝 서 있다. 한 여름이지만 가을 단풍이 벌써 시작되었다. 계절의 개념은 인간이 편의상 만들어 놓은 것이 아닌가? 구상나무 고사목들 사이에 각종 산중의 꽃이 피고 지고 있었다.
영신봉
영신봉(1,652m)에 도착하니, 구름들이 몰려오고 있었다. 지리산의 예측불허 변화무쌍한 묘미다.
세석대피소
세석대피소에는 식당과 기후변화 대응 스테이션(지리산국립공원 아고산대)이 있다. 청학동 의신마을 거림 가는 길 생태계 복원 공사 중으로 폐쇄 중이다. 철쭉, 진달래, 키 작은 나무, 산오이풀, 쑥부쟁이, 노루오줌, 일월비추, 동의나물 등 자생하는 야생화 지상낙원이다.
세석대피소 야외 식탁 / 샘터
대피소 밖 식탁이 있는 곳에서 아래쪽으로 약 30m 떨어진 곳에 계곡수가 호스를 통해 흘러내리고 있었다. 계곡아래 마을 사람들에게 깨끗한 물을 보내주자는 글귀가 눈에 띈다.
세석평전의 키 작은 나무들 / 구상나무 나이 판별법
빈 물통에 물을 가득 채웠다. 근처에 구상나무의 나이 아는 법이 자세히 적혀 있다.
지리산 한신계곡 유래 / 탐방로 안내
세석대피소를 출발, 한신계곡(한신폭포, 오 층 폭포, 가내소폭포, 첫나들이 폭포 방향)으로 내려왔다. 깊고 넓은 계곡 또는 한여름에도 한기를 느끼는 계곡이라는 뜻으로 물이 차고 험하며 굽이치는 곳이 많아 한신하다고 부르던 이름이 한신이 되었다고 한다. 혹은 한신이라는 사람이 농악대를 이끌고 세석으로 가다가 급류에 휩쓸려 죽어서 그 이름이 한신이 되었다는 설도 있다고 한다. 강도래, 날도래, 도롱뇽, 갈겨니, 가재, 미유기, 산두꺼비, 노랑할미새, 물까마귀가 서식하고 있다.
작년 가을에 백무동으로 하산할 때 어느 중년 신사분이 어느 나무 앞에서 사진을 부탁하였다. 사연이 있는 나무라고 했다. 다리 힘이 풀리고 마침 장마 후여서 바위돌이 미끄러웠다. 그 나무를 조금 더 지나 등산로 바위돌에서 미끄러져 계곡으로 추락할 뻔했다. 신문에 날 뻔한 아찔한 순간이었다. 올라오는 어느 아주머니가 몸으로 막아 주셨다. 너무나 죄송하고 감사한 마음이 들었다.
한신 폭포, 오층 폭포, 가내소 폭포 (확인 요)
한신폭포, 오 층 폭포, 가내소폭포(세석대피소에서 4km 지점)를 지났는데, 2차 등산 때 보았던 표지판들이 보이지 않았다. 어느 폭포가 그 폭포인지 헷갈렸다. 올라오는 어느 등산객이 가내소 폭포 위치를 물어왔지만, 그분들이 분명 지나친 것은 틀림없어 보였다. 그러나 나도 긴가민가하면서 폭포처럼 보이는 곳의 사진을 몇 장 찍었다.
첫나들이 폭포 / 수서생물
첫나들이폭포에는 많은 등산객들이 모여 있었다.
너덜겅
너덜겅을 지났다.
백무동야영장 근처에 도착하자, 굵은 소낙비가 지리산 완주를 축하해 주는 듯이 쏟아졌다. 산행 종료 시간대에 비가 와서 천만다행이다.
화전민
화전민에 대한 설명판이 있었다. 아마 야영장 주변이 화전민터였는가 보다. 이런 골짜기에서 살아가는 것이 얼마나 힘들었을까 상상해 보았다.
백무동 유래 / 야영장
세석길 표지판과 백무동 유래를 적은 간판이 보였다. 백무동탐방지원센터 구조대 남자 화장실 내부에서 옷을 갈아입었다. 2시 전에 도착하여, 5시 출발로 예매한 시간을 변경하려고 매표소에 물어보니, 빈자리가 없다고 하였다. 멋진 키다리 노신사는 음정으로 가는 버스를 타고 떠났다. 우리는 그렇게 기약없이 헤어졌다. 근처 식당에서 저녁을 산채 비빔밥으로 미리 먹었다. 결국 5시 출발 버스에 몸을 실었다.
지리산 국립공원 입구 (백무동) / 세석길
나의 버킷리스트, 사연 많은 지리산 등산 완주를 무사하게 끝까지 보살펴 주신 노고할머니 천왕님께 감사를 드린다. 지리산 10경 중 어느 하나가 생각나면 그곳으로 몰입할 기회가 또 있기를 원한다.
특히 기회가 된다면 아직 못 가본 붉게 물든 피아골(직전) 단풍(2경)이나, 불일현 폭포(7경), 지리산 최후의 원시림 칠선계곡(9경)을 가보고 싶다. 올라가는 등산보다 내려오는 하산 길이 더 힘들다. 인생 하산 길도 평온하고 고요한 그런 길이기 되기를 소망하여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