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2024.10.01, 국군의 날 화, 비, 25도), 백제의 두 번째 도읍지 웅진(공주)을 탐방하는 날, 공산성을 둘러보고 무령왕릉과 박물관 관람하기 위하여 도보로 이동하였다. 지도 앱을 켜고 가다 보니 제민천 근처에서 백제 병사들 모형 모습과 왕릉교 교량 난간에 그늘막 통로가 설치되어 있어 왕의 행차 모습을 멋지게 꾸며 놓았구나 생각하였다.
오늘 탐방할 두 번째 구간은 황새 순교 성지, 웅진 백제 역사관, 공주 무령왕릉과 왕릉원이다. (굵은 글씨)
공산성> 황새 순교 성지> 웅진 백제 역사관> 공주 무령왕릉과 왕릉원> 국립공주 박물관> 충청권역 수장고
백제의 수도 변천사를 잠깐 살펴본다. (금일, 굵은 선 웅진성 탐방)
한성 위례성 BC 18~ AD 475 (1대 온조왕~21대 개로왕, 약 495년간 -백제 흥망 680년의 73%, 2024.09.28. 방문, 토, 맑음, 28도)
시대별 왕 표지판(출처 : 부소성 출입문 우측)
웅진성 AD 475~ AD 538 (22대 문주왕~ 25대 무령왕, 약 64년간, 2024.10.01. 공주 방문, 화, 비, 25도 )
사비성 AD 538~AD 660 (26대 성왕 ~ 31대 의자왕, 약 123년간, 2024.10.03. 부여 방문, 목, 비, 22도)
475년 고구려 장수왕에게 한성 하남 위례성(풍납토성 몽촌토성)을 뺏기고 개로왕마저 몽촌토성밖에서 사로 잡혀 죽음을 당하고 남으로 남으로 쫓겨 피눈물을 흘리며 웅진에 도읍을 정하였다. 백척간두의 문주왕, 삼근왕, 동성왕 시대를 지나 무령왕대에는 국가의 안정을 되찾고, 고구려와 가야와의 전투에서 이겨 영토를 확장하고, 중국 양나라로부터 인정을 받을 정도로 국력이 신장되었다. 그 흔적을 추적해 본다. 우연히 발굴된 무릉 왕릉에서 국보로 지정된 유물들이 대량으로 쏟아져 나왔다.
황새 바위 순교 성지
역사 탐방할 때, 도보로 이동하면 의외의 소득 횡재를 하기도 한다. 오늘 우연히 방문하게 된 황새 바위 순교 성지가 그렇다. 배교를 하면 목숨을 살려 준다는 회유에도 그 제안을 거부하고 기꺼이 순교를 선택한 그 믿음의 터다.
제민천 다리를 건너가니, 공주중학교 건너편에 황새 바위 순교 성지 안내 간판이 보였다. 사전 정보가 없어 잠시 당황했지만, 망설이지 않고 언덕 위 황새 바위 순교 성지로 바로 올라갔다. 성지 순례를 하면 언제나 종교 혹은 신념을 위하여 목숨을 기꺼이 내어 놓는 선조 선현들의 용기에 경건한 마음을 가지고 돌아온다.
황새바위에서 공개처형이 있는 날은 처형장이 내려다 보이는 공산성에서 흰옷을 입은 많은 사람들이 병풍처럼 둘러서서 처형장을 바라보고 있었다고 한다.
황새 바위 순교 성지 안내도
공주에 5대 순교지가 있다고 한다.
1) 황새 바위 순교 성지
제민천 왕릉교를 건너면 좌측에 조그만 바위 언덕이 있다. 사람들은 이곳을 황새바위라고 부른다. 언덕 위 소나무에 황새가 많이 살았다고 해서 황새바위라고 부른다고 한다. 혹은 천주교가 조선의 왕권유지에 도전한다는 생각을 가진 집권자가 전국적으로 탄압에 나섰다. 체포된 천주교인들의 목에 항쇄(項鎖)를 씌우고 이곳에서 처형하였다고 해서 항쇄바위라고 부르던 것이 황새바위로 변했다고도 한다. 로베르트베버 신부가 그린 공주형장에서 내려다본 참수된 사람들의 무덤 전경이 있다.
2) 향옥터(환옥)
충청감영 산하의 감옥시설이다. 제민천인근에 위치해 있었으며, 교수형 혹은 가혹행위로 사망하였다. 순교자의 70~80%가 이곳에서 희생되었다. 대표적으로 김원중은 1866년 진천에서 서적문제로 체포되어 처형되었다.
3) 충청 감영터(공주사대부고)
1603년 설치되었다. 충청감사는 천주교 신자 정보 수집 및 단속하였다. 특히 이존창을 잡아들여 처형하였다. 감사는 행정권, 군사, 사법권까지 가지고 있었다. 조정에서 지방관에게 내려진 선참후계령은 관리의 자의적 해석 판단으로 자의적 처결 명분이 되었다.
4) 공주 중동 성당
1897년 설립되었다. 6.25 전쟁 중 북군이 성당을 점령, 성상과 제구 등 집기 손상하고 성물을 훼손하자 최종수 요한이 항거하자 총을 쏘았다. 십자가에 총탄자국이 박혀 있다.
5) 장깃대 나루
사형을 집행하는 곳에 꽂아둔 공주의 공개처형예고를 했다. 일례로, 1894년 7월 29일 프랑스 선교사 조조가 동학난을 피해 가던 중 청군에 붙잡혀 끌려왔다. 이곳에서 살해되었다. 그를 기리는 십자가가 그려진 나무 표지가 있었다고 한다.
공주 순교지 설명판
열두 개의 빛돌
열두 개의 빛돌
이 돌들은 열두 사도를 상징하며 동시에 이곳에서 순교한 수많은 무명 순교자들을 기념하는 비석이다.
무덤 경당
무덤 경당
예수님의 돌무덤을 형상화한 무덤경당이다. 돌무덤은 죽음이라는 종말과 부활이라는 새로운 시작이다.
"고통과 슬픔의 죽음을 넘어 부활의 기쁨과 영광이 기다리고 있음을 희망하며 기도하는 무덤경당이다. 죽음이 곧 삶이요 삶이 곧 죽음이다."
순교탑
순교탑
높이 13.8m의 탑이다. 순교자들이 받은 칼과 세상의 유혹에 맞서는 순례자 자신에 대한 칼을 맞댄 형상이다. 45개의 가파른 계단은 '나를 버리고 하늘에 다가가는' 의미를 담고 있다.
형구
형구
교수형을 집행할 때 사용하는 형구다. 목을 감고 반대편에서 당긴다.
황새바위 기념관
황새바위 기념관
황새바위 순교성지
한국천주교회사 연표
형구 (칼, 족쇠)
공주에서 순교한 사람들
공주 형장에서 내려다본 참수된 사람들의 무덤 전경 (노르베르트 베버 신부 그림)
1784년 이존창(루도비코 곤자가)이 세례를 받고 고향 내포에 내려와 신앙을 전하면서부터 시작된 내포교회는 곧 박해에 부닥치게 되었고 기록상 마지막 순교자를 낸 1889년까지 100여 년 간 공주는 박해의 땅이었다. 신유박해(1801년)부터 시작하여 이존창 루도비코 및 이국승 바오로 등 16명이 이 시기에 참수처형 되었고, 병인박해(1866년) 시기에는 약 1,000여 명의 순교자가 순교한 것으로 추정된다. 이렇게 공주는 천주교 4대 박해와 함께 100여 년 순교 역사의 현장이다.
무령왕릉과 국립공주 박물관 가는 길
유네스코 세계유산 공주
황새바위 순교성지에서 왕릉로를 따라 남서방향으로 약 700m 떨어져 있다. 무령왕릉을 포함한 백제역사유적지구는 2015년 대한민국 12번째로 세계유산으로 등재되었다. 백제후기(475~660) 문화를 대표하는 웅진시기의 공주 공산성, 공주 무령왕릉과 왕릉원, 사비시기의 부여 부소산성, 부여 정림사지, 부여 왕릉원, 부여 나성, 사비후기의 익산 왕궁리 유적과 익산 미륵사지로 연속된 8개의 유산이다.
웅진 백제 역사관
웅진 백제 역사관
백제의 두 번째 수도 공주에서 이어진 백제 역사 문화 콘텐츠와 IT시스템을 활용한 교육, 홍보, 체험이 가능하다. 흥미롭게 백제를 접할 수 있으며 전시실과 영상실로 구성되어 있다.
제1전시실
웅진으로 옮겨오게 된 배경과 웅진에서 다섯(5) 왕의 이야기를 스크린으로 보여 준다.
제2전시실
공주에 남아 있는 유적을 보여 준다.
제3전시실
백제의 바닷길과 문화교류, 무령왕의 수촌리에서 출토된 유물에 남아 있는 장인 정신, 백제인의 이상을 보여준다.
공주 무령왕릉과 왕릉원 관람 순서
출입문을 통과하여 먼저, 공주 무령왕과 왕릉원 전시관에서 무령왕릉 및 5.6호분 실물과 동일한 크기의 모형에 직접 들어가서 체험을 하고 관련 자료를 살펴본다. 그다음 밖으로 나가서 왼쪽 언덕 위로 올라가면 실재의 왕릉을 만나 볼 수 있다. 그러나, 왕릉안으로는 들어갈 수 없다. 훼손방지, 보존 차원에서 출입구를 봉쇄해 놓았다.
공주 무령왕릉과 왕릉원 개관
공주시 금성동과 웅진동 경계에 있는 송산의 경사면에 자리한 백제 웅진 도읍기(475~538)의 백제 왕과 왕족 무덤이다. 1920~1930년경에는 17기의 무덤이 있었다. 현재는 무령왕과 왕릉원 1~6호까지만 복원되어 있다. 무덤형태는 돌방무덤과 벽돌무덤 2종류로 구분된다.
왕릉원 1~5호분은 전통적인 굴식돌방무덤이다. 돌을 쌓아 무덤방(널방)을 만든 후 천정을 돔형태로 둥글게 마무리했다.
왕릉원 6호와 무령왕릉은 중국 남조영향으로 벽돌무덤으로, 터널형 무덤방앞에 짧은 터널형 널길이 있다.
무령왕릉을 제외한 나머지 무덤들은 도굴로 껴묻거리(부장품)가 거의 남아 있지 않다. 역사현장을 망친 아주 몹쓸 짓이다. 무령왕릉을 통하여 웅진도읍기의 우수성과 대외교류를 확인할 수 있다.
무령왕릉
25대 무령왕과 왕비 합장분이다. 1971년 배수로 작업 중 우연히 발견되었다. 중국 남조의 영향으로 벽돌무덤이며, 널방은 연꽃무늬를 새긴 벽돌로 쌓았다. 벽면에는 등잔을 올려놓았던 등감과 창문시설을 했다. 남북 길이 4.2m, 동서너비 2.72m, 높이 2.93m이다. 입구의 지석에서 무덤 주인공과 만든 연대를 알 수 있다. 왕릉군중에서 유일하게 도굴되지 않아, 무령왕과 왕비의 금제관장식을 비롯 5,200여 점 유물이 출토되었다. 백제 문화의 우수성을 증명한다.
왕릉원 1~4호분
1927년 조사된 4기의 굴식돌방무덤이다. 공주에서 처음으로 발굴된 백제유적이다. 당시에는 5기였으나, 4기만 복원되었다. 무덤방(널방)은 정사각형 돌을 수직으로 쌓았고 네 벽은 위로 갈수록 안으로 좁아져 둥근 천장을 이룬다. 가장 윗부분에 평평한 돌을 올려 마무리했다.
왕릉원 5호분
굴식돌방무덤이다. 1932년 1~4호 관람로 정비과정에서 발견되었다. 무덤방(널방)은 정사각형 돌을 수직으로 쌓았다. 네 벽은 위로 갈수록 안으로 좁아져 둥근 천장을 이룬다. 가장 윗부분에 평평한 돌을 올려 마무리했다. 벽면은 흰색의 회를 발랐는데, 지금은 흔적만 남아 있다. 바닥에는 벽돌로 만든 관 받침대 2개가 나란히 있는데, 목관을 올려놓았던 것으로 서쪽의 관 받침대가 조금 더 크다. 무령왕릉과 가까이 있다. 당시의 왕이나 왕족으로 추정한다.
왕릉원 6호
1932년 우연히 발견된 벽돌무덤이다. 무덤방(널방)은 남북 길이 3.7m, 동서 2.24m이다. 무덤은 동전무늬를 새긴 벽돌로 쌓았다. 터널 모양의 무덤방과 널길로 구성되어 있다. 벽면에는 등잔을 올려놓는 등감을 설치하였고, 네 벽면에 회를 바르고 청룡 백호 주작 현무의 사신도를 그렸다. 목관을 올려놓는 받침대가 하나로 한 사람 무덤으로 본다. 무덤입구 막는 벽돌에서 양관와위사의라고 새긴 글자를 확인했다. 벽돌이 중국 양나라 영향을 받았다고 한다.
공주 무령왕릉과 왕릉원 입구
공주 무령왕릉과 왕릉 전시관
공주 무령왕과 왕릉원 전시관은 무령왕릉 및 5.6호분 실물과 동일한 크기의 모형으로 재현한 곳이다.
5호분
5호 6호분 설명
무령왕 흉상
무령왕릉 내부 / 발굴 당시 장면
무령왕릉
무령왕릉 발견
무령왕과 왕비 목관 / 진묘수(무덤을 지키는 상상의 동물, 국보)
백제 금속세공술의 정수, 왕과 왕비의 금제관장식
무령왕릉 무덤 출토 당시
무덤의 토지 부분을 신과 계약으로 합법적으로 매입하였다는 증서
무덤 입구 (머리 허리를 숙여서 들어감)
무령왕 일대기 (사진으로 보는 요약집)
실재 무령왕릉과 왕능원
전시관 밖 왼쪽 언덕 위로 올라가면 왕릉을 만나 볼 수 있다. 왕릉안으로는 들어갈 수 없다. 훼손방지, 보존 차원에서 출입구를 봉쇄해 놓았다. 특이한 점은 왕릉들이 다닥다닥 이웃집과 같이 붙어 있고 모아놓은 듯한 형상이다. 한성 위례에서 웅진으로 긴급 천도한 당시의 상황을 대변하는 것 같았다.
무령왕릉과 왕릉원 접근 진입로
무령왕릉과 왕능원 위치도(무령왕릉 7번)
6호(좌) / 5호 출입구
5호 및 6호 안내판
무령왕릉
무령왕릉 입구 (1, 출입 금지)
무령왕릉 입구(2)
1~4호분 (현재 발굴 조사 중)
발굴조사 안내
발굴 조사 중(1~4호분)
백제의 무덤
백제의 무덤은 크게 적석총(돌무지무덤)과 봉토분(封土墳)으로 크게 나누어진다. 봉토분은 다시 석실분(石室墳: 돌방무덤) · 석관묘(石棺墓: 돌널무덤) · 토광묘(土壙墓: 움무덤) · 옹관묘(甕棺墓: 독무덤)로 구분된다.
한성 위례 도읍기 적석총
한성도읍기 적석총(위 사진)
웅진 도읍기 왕릉
무덤 축조 과정 설명
한성 위례도읍기 무덤 적석총은 석촌동, 양평 문호리, 연천 삼곶리 등에 남아 있다. 만주의 집안에 있는 고구려 적석총이 대표적이다. 석촌동 제3호분은 동서 55.5m, 남북 43.7m의 평면에 현재의 높이가 4.5m인 대형 적석총으로서 3단으로 되어 있다.
웅진도읍기에는 적석총은 없어지고, ‘ㄱ자형’ 석실분과 장방형 석실분이 유행하고 중국계통의 전축분(塼築墳)이 축조되었다. ‘ㄱ자형’ 석실분은 돔(Dome) 형식에 벽에 회칠을 했으며, 장방형 석실분은 순수 백제식 석실분 형식이라 할 수 있다. 전축분으로는 사신도가 그려진 송산리 제6호분과 무령왕릉이 있다. 무령왕릉은 터널형 전축분으로 연도가 달려 있다.
사비시대로 오게 되면 ‘ㄱ자형’ 석실은 없어지고 연도가 달린 상자형 석실이 주류를 이룬다. 왕실 무덤은 능산리에 조성되었는데 현재 7기가 남아 있다. 중하총(中下塚)은 석제로 터널형의 석실을 만들었는데 성왕의 무덤으로 추정되고 있다. 동하총(東下塚)은 네 벽 및 천장을 잘 물갈이한 편마암 판으로 축조했고, 석면(石面)에 사신과 연화문을 직접 그렸다.
영산강 하류인 나주시와 영암군 내에서는 대형 옹관묘의 군집이 있다. 이 옹관묘들은 초기철기시대 이래의 전통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서 동일 봉토 내에 여러 개를 합장(合葬) 한 것이 주류이다. 옹관의 형식에는 단 옹(單甕)과 합구식(合口式)이 있다. 이 가운데 나주 신촌리 제6호분은 금동관 · 금동식리(金銅飾履) · 철도(鐵刀) 등의 부장품이 나와 이 지방의 유력세력의 무덤으로 추정되고 있다. 이외에 이 지역의 특징적인 무덤양식으로는 전방후원분(前方後圓墳)이 있다. 이 무덤의 주인공에 대해서는 백제 귀족설, 왜계 백제관료설 등이 있다.
<참조>
-. 웅진 백제 역사관 팸플릿
-. 공주 무령왕릉과 왕릉원 팸플릿
긴 글 읽어 주셔서 대단히 감사합니다. 이어서 다음회에는 공주 박물관과 충청권역 수장고에 대하여 글 올리겠습니다. 이어서 백제 투어의 마지막 사비성(부여) 방문 결과에 대하여 글 올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