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제"에는 백제 시조 온조왕의 대망, 유물 같은 외로움, 의자왕의 슬픔이 묻어 있다. 정약용 선생은 삼한 가운데 백제가 가장 강하고 문화가 발달하였다고 했다.(여유당전서 지리집)
몽촌토성과 풍납토성을 둘러보고 천호역 승차, 잠실역에서 하차, 롯데월드타워 쪽에서 도로를 건너 롯데월드 앞을 지나갔다. 근처에 나의 젊음과 정열을 불태운 직장이 있었다. 감회가 새로웠다. 그때는 이렇게 한가롭게 여행을 다닐 시간이 있을 줄은 정말 몰랐다. 최근 친구 동료들의 부음 소식이 여기저기 들려온다. 모두 몸도 마음도 건강했으면 좋겠다.
여행을 하면서 다시 한번 등잔 밑이 어둡다는 속담이 진실임을 깨닫는다. 조선 인조의 삼전도비 위치를 어렴풋이 석촌호수 어디엔가 있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그러나 회사 건물 지근거리의 석촌호수 서호입구에 있었다는 사실을 정확히 모르고 있었으니, 부끄러웠다.
백제의 수도 변천사를 잠깐 살펴본다. (굵은 선이 금회의 주제 범위)
한성 위례성 BC 18~ AD 475 (1대 온조왕~21대 개로왕)
웅진성 AD 475~ AD 538 (22대 문주왕~ 25대 무령왕, 공주)
사비성 AD 538~AD 660 (26대 성왕 ~ 31대 의자왕, 부여)
탐방 순서는 다음과 같다. (굵은 글씨 금회 설명 구간)
한성백제박물관> 몽촌토성> 풍납토성>잠실 석촌호수(인조 삼전도비)>석촌동 고분군
백제의 웅진 천도
한성 함락과 개로왕 전사 그리고 웅진 천도
한성 하남 위례성의 3회 차, 마지막 회다. 잠깐 웅진으로 천도하게 된 배경을 살펴본다. 427년 고구려의 국내성에서 평양으로 천도가 도미노 현상을 불러왔다. 고구려 장수왕의 남진정책에 백제는 신라와 나제 동맹으로 대항했다. 472년 백제 개로왕이 중국 북위에 고구려에 대항할 군사 지원을 요청했다. 거부당했다. 이유는 백제가 고구려와 북위사이를 이간질한다고 의심했기 때문이었다. 이것이 결정적으로 고구려 장수왕의 남진정책을 더욱 부추겼다.
475년 고구려 장수왕이 군사 3만으로 백제 풍납토성을 7일 만에 함락시켰다. 백제 개로왕을 몽촌토성문 밖에서 사로잡아 죽인 뒤 남녀 8,000명을 사로잡아 돌아갔다.(삼국사기) 나제동맹의 협약에 따라 개로왕의 아들 여도(餘都, 훗날 문주왕)가 신라 구원병 1만 명을 지원받아 한성 위례로 달려갔으나 이미 늦었다.
개로왕 아들 여도가 문주왕(文周王, 재위 475~477)이 되고, 피눈물을 흘리며 수도를 웅진으로 옮겼다. 고구려는 한강 유역을 차지한 뒤에도 계속 남진했다. 서쪽으로는 천안과 청주, 중부 지역 소백산맥을 거쳐 영주, 예천까지 진격했다. 백제와 신라는 각각 금강 이남과 소백산 이남까지 밀려났다.
장수왕은 곡창 지대인 한강과 대동강 유역을 확보하고 황해의 해상권을 장악했다. 충북 충주의 중원고구려비에 고구려 국왕을 대왕(大王)이나 조왕(祖王)으로 부르고, 신라 왕과 신료들에게 의복을 하사했다. 고구려가 중국과 대등함을 과시했다. 고구려 전성시대다.
백제는 웅진에서 왕권이 약해지면서 왕비족 병관좌평(兵官佐平) 해구(解仇)가 권력을 휘둘렀다. 477년 해구가 자객을 보내 사냥 중인 문주왕을 암살했다. 문주왕의 열세 살 난 아들 삼근왕(三斤王, 재위 477~479)이 즉위했다. 해구는 478년에 옛 왕비족인 진 씨(眞氏) 세력에 의해 죽임 당할 때까지 국정을 장악하였다. 백제의 웅진시대 초기는 극도의 혼란기 풍전등화시기였다.
한반도 패권은 누가 한강 유역을 차지하느냐에 국가 존망이 걸렸다. 4세기 중엽에는 백제, 5세기 후반에는 고구려, 6세기에는 결국 신라로 넘어가면서 통일 신라의 기반을 닦았다. (참조 : 한국사를 움직인 100대 사건)
삼전도비(1)
인조 삼전도비
남한산성을 몇 차례 오르고, 글을 브런치에 올렸었지만, 삼전도비는 처음으로 봤다. 롯데호텔 월드에서 송파대로 따라 3분 정도 걸어가면 석촌 호수 서호 바로 입구에 있다. 인조가 병자호란 때 남한산성 수성에 실패하고, 서문(우익문, "남한산성" : https://brunch.co.kr/@@8pxb/165 , https://brunch.co.kr/@@8pxb/106 참조)에서 내려와 삼전도에서 청 태종에게 삼궤구고두례(三跪九叩頭禮, 상세 방법은 글 끝 참조)로 항복하였다. 청은 이런 역사적 사실을 비석을 세워 남길 것을 강요했다. 이것이 삼전도 비다. 높이 395㎝, 너비 140㎝, 이수와 귀부를 갖춘 비이다. 공식 비명은 ‘대청황제공덕비‘다.
삼전도비(2) / 크기가 작다고 거부되어 버려진 받침돌
청은 비문 초안을 조선이 직접 작성하도록 했다. 이실직고 자기반성하라는 의미다. 대신들은 모두 비문 초안 작성하기를 극구 회피했다. 지목된 대신중에, 심지어 팔이 마비되었다는 상소를 올리기도 했다. 비의 표면 왼쪽에는 몽골문으로, 오른쪽에는 만주문으로, 그리고 뒷면에는 한문으로 새겼다. 비석을 세운 후 청의 사신들은 올 때마다 비석 존재 혹은 훼손여부를 확인하고 탁본을 떠서 기념품으로 가져가서 청 태종에게 보고했다. 우리 민족의 치욕적인 역사기록이다. 비각안에 또 다른 비어있는 받침돌이 하나 있는데, 크기가 작다고 청이 거부하여 버려진 것이다.
삼전도비(3)
조선에서도 청일전쟁 후 청의 힘이 약해지자, 땅속에 묻어 잊어버리거나 두 동강내어 폐기처리하기를 원했다. 몇 번이나 땅 속에 묻혔던 비석이 한강 장마에 우연히 드러났다. 이곳저곳으로 옮겨 다녔다. 보존 존치여부에 대하여 시민사회 학계 등을 망라하여 치열한 논쟁이 벌어졌다. 결국 이 자리에 다시 세워 보존하게 된 것이다. 그 논리적 근거는 “치욕의 역사를 잊지 말자 “이다.
일제 강점기 우리의 독립 운동가들을 고문하고 학살했던 동대문 형무소를 현재 보존 개방하였다. 더 나아가 사행 집행 현장, 형집행 밧줄, 발판 그리고 시신 운반 길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유대인 학살 아우슈비츠 수용소 보존이유도 동일하다고 생각한다. 삼전도비를 보고 결코 부끄러워하거나 의기소침하지 말자. 힘을 기르고 다시는 지지 않으면 된다. 살아있는 생생한 교육 현장이다.
석촌호수(1)
석촌호수
자이로 드롭 놀이 기구가 수직 낙하하자, 일제히 "꺄아~"하는 까무러치는 괴성이 들려왔다. 참 좋은 시절, 부럽다는 생각이 저절로 들었다. 나도 모르게 미소 짓는 아빠가 된다. 호수변 산책길에서 연인들의 데이트 모습, 여러 나라의 다양한 외국인들을 본다. 카페 광장에서 휴식하는 가족들, 카페 앞 공간에서 버스킹 거리공연을 즐기는 관객, 모두에게 즐거운 석촌호수의 저녁시간이다.
석촌호수 카페 광장
석촌호수 북쪽 잠실벌은 서호의 남쪽에 나루터가 있던 한강이었다. 세월이 지남에 따라 토사가 쌓여 인공섬이 생기면서 광진교 밑에서부터 잠실야구장까지 지금의 석촌호수를 지나는 송파강과 신천강을 이루는 샛강이 생기게 되었다. 1969년 한강본류의 하상 정비 개발에 착수하면서 이 강을 매립하였으나 일부는 호수로 남겨놓았고, 1980년대 초 호수를 정비하여 공원화하였다. 송파나루공원은 송파대로가 개통되면서, 호수가 동호 서호로 나누어졌다. 호수 공원으로 조성되었다.
석촌호수 버스킹
조깅 코스 및 산책로가 설치되어 있어 시민들의 휴식 공간으로 널리 이용되고 있다. 서호에는 서울놀이마당 및 롯데월드의 매직아일랜드가 있다. 근처에는 유명 테마파크 롯데월드부터 분위기 있는 카페와 맛 집들이 즐비해 있다. 매년 봄에는 벚꽃 명소이기도 하다.
마침 아뜰리에 카페 앞에서 가을왔숑 주제로, 국악 별라밴드 팀이 버스킹 공연 중이었다. 속초 설악항의 선율하나팀 공연 관람 후, 어디에서나 버스킹 공연하면 잔돈이라도 꼭 챙기기로 했다. 주저하거나 부끄러워하지 않기로 했다. 우리 모두의 삶의 질을 높여 준다. 날이 어둑어둑 저물어 급히 석촌 고분군으로 이동했다.
석촌동 고분 정문
석촌동 고분군
오늘의 마지막 탐방코스인 고분군에 날이 저물어 도착했다. 사진을 찍으려고 이리저리 각도를 찾아보았지만, 만족한 사진을 찍지 못했다.
석촌동 고분군 위치도
4호 고분
고구려의 영향을 장군총 형태의 기단식 돌무지무덤이 군집하여 있다. 1·2·3·4호분과 A호 돌무지무덤이 있는데, 구조적으로 순수하게 돌로만 쌓은 경우와 외부는 돌로 쌓았으나 내부는 점토로 다져 쌓기 한 경우로 나뉜다.
2호 고분
2호 고분
가락동고분군과 함께 한성 위례 백제의 중심고분군이다. 일제강점기에 약 90기에 달하는 무덤들이 존재했었다. 그러나 많은 사정으로 훼손되고 사라져 현재 남아 있는 것은 손꼽아볼 정도다. 심지어 봉분 위에 집을 짓고 살고 있는 사진도 본 적이 있다.
2호 고분
석촌동 고분군은 백제 한성의 왕실과 귀족들의 무덤이다. 한성 위례시대 초대 온조왕(BC 18)~21대 개로왕(AD 475)까지 약 493년 (백제 역사의 73%) 간 한성 위례의 주인공이었다. 남한산, 대모산 일대의 돌과 한강 주변의 흙으로 쌓은 돌무지무덤과 돌 덮은 흙무지무덤 수백 기가 있었다.
3호 고분
그중 3호분은 한 변 50m의 피라미드형 고분으로서 백제 전성기를 이룬 근초고왕릉으로 추정된다고 한다. 풍납토성 경당지구와 석촌동 고분군과의 직선거리로 4km 내외다. 풍납토성 경당과 방이동 고분군과는 불과 3km 거리다.
3호 고분 4호 고분 (좌에서 우로)
석촌동 2호 고분 발굴 현장
석촌동 고분군에서는 금귀걸이, 은반지, 유리구슬 목걸이, 중국 청자와 검은 닭모양항아리(흑유계수호) 등 고급 장신구를 비롯한 많은 유물이 발굴되었다. 죽은 이의 몸을 치장하거나 장례 때 쓴 제사 물품, 무덤에 넣어 준 껴묻거리들이다.
88 올림픽 공원 배치도
88 올림픽 공원
몽촌토성을 포함하여 대지 면적은 총 1,447,122㎡이다. 올림픽 공원 내에 있던 몽촌토성이 사라질 뻔했다. 이곳이 조선시대에는 경기도 광주군 중대면(中垈面) 이리(二里)라는 행정구역이었다. 1970년대에는 잠실도를 매립할 때 몽촌토성을 헐어 준설토로 사용하려고 했다. 동네 주민들한테는 능선(陵線)이라고 불리는 언덕이었다. 이 당시의 몽촌토성은 백제의 위례성이라는 게 밝혀지지 않아서 여기가 백제의 위례성일지도 모른다는 학설이 나오면서 보존할 수 있게 되었다.
몽촌토성에서 내려다본 88 올림픽 경기장
1981년 9월 30일에 1988 서울 올림픽 개최가 확정됨에 따라 강동구 이동 전체가 올림픽공원 부지에 포함되었다. 공사는 1984년 4월 24일부터 시작되었으며, 사업비는 총 1,823억 원이 들었다. 공사 도중 현장에서 백제 때 초기의 토성인 몽촌토성이 발굴되면서 한때 공사가 중단되어 늦춰졌다가 몽촌토성을 보존하는 차원에서 토성과 공원을 한 자리에 존치하기로 결정됨에 따라 공사가 재개되어 1986년 5월 28일에 준공되었다.
1988 서울 올림픽에 사용했던 경기장을 갖춘 대규모 경기장 단지였다. 이후 시민들의 휴식을 위한 공원으로 사용하고 있다. 백제의 첫 번째 수도인 하남 위례의 남성은, 이곳저곳 훼손되어 만신창이가 되었지만, 결국 몽촌토성으로 일부라도 살아남았다.
* 삼궤구고두례(三跪九叩頭禮)
중국 청나라 시대에 황제를 대면할 때 취하는 인사법이다. 삼궤구고두례를 행하는 방식은 “궤”(跪)의 명령을 듣고 무릎을 꿇는다. “일고두”(一叩頭), “재고두”(再叩頭), “삼고두”(三叩頭)의 호령에 따라 양손을 땅에 댄 다음에 이마가 땅에 닿을 듯 머리를 조아리는 행동을 3차례 하고, “기”(起)의 호령에 따라 일어선다. 이와 같은 행동을 3회 반복한다. (위키백과)
<참조>
-. 한국사를 움직인 100대 사건
-. 위키 백과
이상으로 한성 하남 위례 관련, 글을 마치겠습니다. 역사적인 긴 이야기를 브런치에 올리는 것은 좀 미안하고 망설여집니다. 사적지를 방문하고 긴 기행문을 올리는 점 미리 양해 부탁드립니다. 이어서 웅진(공주)과 사비성(부여) 방문 결과에 대하여 글 올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