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제라는 단어에는 고구려 주몽의 아들로서 백제를 건국한 온조왕의 큰 꿈, 잃어버린 유물 같은 쓸쓸함, 의자왕의 비애가 혼재되어 있다. 정약용 선생은 삼한 가운데 백제가 가장 강하고 문화가 발달하였다고 했다.(여유당전서 제6집 지리집 제2권 강역고 변진별고)
몽촌토성 안내도
한성 백제박물관을 둘러보고 몽촌토성으로 올라갔다. 가을 운동회 등 각종 행사하기에 좋은 날씨다.(2024.09.28. 토. 맑음 28도) 올림픽공원 평화의 광장에서 한성 백제 문화제행사가 진행 중(2024.09.27~29)이었다. 또 성 밖 학교 운동장으로부터 스피커에서 씩씩한 단체 함성과 사회자의 추임새가 계속 들려왔다. 곳곳이 잔치분위기다.
몽촌토성 성내 / 몽촌토성 / 몽촌토성 안내도
백제의 수도 변천사를 잠깐 살펴본다.
한성 위례성 (BC 18~ AD 475, 1대 온조왕~21대 개로왕)
웅진성 AD 475~ AD 538 (22대 문주왕~ 25대 무령왕, 공주)
사비성 AD 538~AD 660 (26대 성왕 ~ 31대 의자왕, 부여)
탐방 순서는 다음과 같다. (굵은 글씨 금회 설명 구간)
한성백제박물관> 몽촌토성> 풍납토성> 잠실 석촌호수(인조 삼전도비)>석촌동 고분군
나홀로 나무에서 시계방향으로 내려오면 발굴조사현장이 있다. 현장 휀스에 한성 백제박물관에서 몽촌토성 파보기 끝판왕을 수없이 걸어 놓았다. 넝쿨식물들이 지키고 있다. 관람객을 위한 지극한 정성이 돋보인다. 그중에서 축약 요약 정답본이다.
몽촌토성 발굴 현장(1)
몽촌토성 발굴현장(2)
몽촌토성 발굴지역 및 출토 유물
몽촌토성(夢村土城)
몽촌토성은 올림픽공원 안에 있다. 토성 내의 마을이름인 '몽촌'에서 그 이름이 유래되었다. 남한산에서 뻗어 내린 낮은 구릉지 끝에 있다. 밖으로는 성내천이 동쪽과 북쪽을 휘감으며 흐른다. 천연의 해자역할을 한다.
성벽 둘레는 약 2.4km이며 면적은 약 216,000m2이다. 8,000~1만 명 정도의 인구를 수용할 수 있는 규모였다. 성벽 축조 방법은 나무틀 안에 흙을 붓고 다져 올리는 판축(版築)으로 했다. 동 서 남쪽에 성문자리가 남아 있다.
성벽조사 현황
삼국시대 도로와 마을 변화
북문지 일대 발굴조사에서 격자모양의 대형 포장도로와 물을 저장하는 목곽집수지, 건물지 등이 확인되었다. 궁 (宮) 자가 찍힌 곧은 입항아리, 얼굴모양을 세긴 토기 뚜껑등 유물들이 출토되었다. 주변국 중국과 일본과의 교류관계를 보여주는 유물들도 출토되었다. 중국 육조시대의 시유도기(施釉陶器)와 청자, 왜의 스에키(須惠器)다.
고구려가 한성 위례를 함락시킨 후 남긴 고구려 유구와 유물이 있다. 다시 백제 성왕이 위례성을 회복했을 때의 사비시대의 유물이 출토되었다. 그야말로 치열한 역사 현장이다. 삼국사기에 기록된 하남 위례의 북성은 풍납토성이고, 남성은 몽촌토성이다.
몽촌토성 발굴조사 현장
삼국시대 생활
몽촌토성 북문지 안쪽에 백제 및 고구려 사람들이 생활했던 흔적이 있다. 각각 시대가 다른 도로와 집수지, 건물지, 집터, 구덩이(수혈)등 생활유구들이 일정하게 구획된 공간에 분포한 증거이다.
삼국시대 벽주건물지와 기둥자리 (일본 스에키 토기 출토)
백제 대외 교류
중국청자, 일본(왜)의 스에키, 가야토기등 주변국들과 교류한 유물들이 출토되었다.
집수지 자리(4각형) / 삼국시대 목제 쟁기 출토 (집수지)
백제의 집수지 위의 통일신라의 도로
집수지를 감싸며 도는 회(回) 형 교차로에서 남북 도로와 북서향도로, 성안 순환도로가 뻗어 나갔다. 도로 폭은 10m이며, 자갈 점토 풍화암반토를 혼합하여 포장하였다. 각각 시대의 필요에 따라 개축하거나 보수 증축하여 사용하였다. 예를 들면 백제인들이 나무 곽으로 짠 집수지를 만들어 물을 저장하였다. 통일 신라 인들은 집수지를 폐기하고 그 위에 10m 도로를 만들었다. 역사의 타임캡슐이다.
삼국시대 집수지
물을 모아서 저장한 집수지의 크기는 14m*14m다. 벽면은 나무로 곽을 짜서 설치했다. 집수지안에서 말머리뼈등 동물 유체, 쟁기, 판재, 나무로 만든 머리빗, 뼈로 만든 도구, 조개껍질, 씨앗등 유물이 발견되었다.
백제 유물
왕궁에서 사용했음을 나타내는 궁(宮) 자 명 항아리, 사람얼굴이 새겨진 그릇 뚜껑 손잡이, 세발토기 합, 굴뚝장식, 그릇 받침등 많은 유물이 쏟아져 나왔다.
고구려 유물
두 귀 달린 항아리, 원통형 세발토기, 시루, 동이, 바리 등 고구려 토기들이 출토되었다. 475년 몽촌토성 함락 후 고구려가 점유했던 흔적이다.
몽촌토성 북문지일원 층위
유물의 연대 측정
발굴 시 토사를 수직으로 절단했을 때, 풍수 자연재해 등으로 토사가 덮인 흔적이 있다. 출토되는 유물에 근거해서 어느 시대의 흙인지 구분할 수 있다. 나무의 나이테처럼 연대별 흔적을 남기기 때문이다. 백제 궁자명 항아리가 발견되면 백제시대 문화층, 고구려 원통형 세발토기 및 두 귀 달린 항아리가 발견되면 고구려시대 문화층, 통일신라의 기와가 발견되면 통일신라 문화층, 이런 식이다. 생생한 역사를 보여준다.
백제집자리 전시관
백제집자리 전시관(휴관 중)
아쉽게도, 휴관 중이라 들어가 볼 수 없었다. 밖에 흰색 둥근 표시는 기둥이 세워져 있었던 자리다.
방어용 목책
토성 높이가 비교적 낮은 지대에는 방어용 목책을 추가로 설치했다. 공격하는 고구려군과 사력을 다해 방어하는 백제군의 전투 장면이 눈에 생생하게 그려졌다. 제초작업이 한창 진행 중이라, 풀냄새가 풋풋하다.
풍납토성 탐방 안내도
풍납토성(風納土城)
몽촌토성역에서 지하철을 타고 1 구간 거리의 강동구청역에서 내려 영파여고를 지나 토성으로 진입했다. 서두른 이유는 후속 석촌고분군 탐방이 남아 있기 때문이었다.
백제의 시조 온조왕이 도읍을 처음으로 정한 하남 위례의 북성(北城)이다. 몽촌토성은 하남 위례 남성(南城) 별성으로 위급시에 사용했던 보조성이었다. 양성을 운영했다. 풍납토성은 둘레가 3.8㎞에 달하는 평지성으로서 성벽의 저변은 43m가 넘고 높이 9m 이상으로 추정되는 거대한 토성이었다. 풍납 백제 문화공원과 풍납토성 경당지구와 풍납전통시장을 탐방했다.
풍납 백제 문화공원 안에 백제살림집이 있다. 풍납토성 경당지구는 백제 신전(神殿) 역할을 했다. 신전에 사용한 토기들을 보관해 둔 우물형 수장고와 중국제 도자기를 보관한 창고가 확인되었다.
풍납 백제 문화공원과 백제살림집에는 부뚜막이 있는 주거지와 도로 유적 및 무수한 기와 등도 출토되었다. 출토된 전돌에 새겨진 ‘直’, 토기에 새겨진 ‘大夫’와 ‘井’이라는 글자와 토제(土製) 벼루등이 출토되었다.
한강에 잇닿은 남북 방향의 장타원형을 형성하고 있다. 현재 2.1㎞ 정도의 성벽이 남아 있다. 1925년 대홍수 때 중요 유물이 발견되면서 그 존재가 알려졌다.
축성 방법
성은 축조 재료에 따라 목책(木柵), 토축성(土築城), 석축성(石築城)으로 나뉜다. 풍납토성은 부엽공법(敷葉工法)으로 만들었다. 생토 모래층 위에 형성된 점토층(粘土層)을 기저부로 삼아 전체적으로 정지작업을 한 후 그 위에 사다리꼴 모양의 중심 토루(土壘)를 쌓아 올리고 이를 기준으로 삼아 내 · 외면에서 비스듬하게 점질토(粘質土)와 사질토(沙質土)를 교대로 쌓아 올렸다.
최하층에는 점성이 강한 점토를 깔고 나뭇가지와 같은 식물을 10여 차례 이상 반복하여 깔았다. 성벽의 안전성과 토층 사이의 결합력을 높이기 위함이다. 풍납토성 축조에 사용된 부엽공법은 이후 토성 · 제방 축조에 사용되었다. 사비도읍기에 만들어진 나성도 동쪽 부분은 부엽공법에 의해 만들어졌다. 김제 벽골제의 제방도 발굴 결과, 부엽공법에 의해 만들어졌음이 확인되었다.
풍납 백제 문화 공원 안내도
풍납 백제 문화 공원
공원에서 마을 어린이들이 유쾌하게 뛰어다니며 놀고 있었다. 한편 산림집 근처에서 문화 해설사분이 탐방객 십여 명에게 열심히 설명하고 계셨다. 여성 탐방객 한 분이 고마움을 표시하며 사탕을 드리자, 연세가 있어 못 드신다고 했다. 열기가 느껴졌다.
백제 살림집
백제 살림집
백제 살림집은 2008년 풍납백제문화공원 조성 시 발굴된 2호 집자리 발굴 자료를 바탕으로 재현되었다. 전문가 고증을 통해 벽체와 지붕구조 등을 포함해 길이 10m, 폭 6m 규모로 조성했다.
백제 살림집 설명판
특히 2호 집자리 발굴결과에 충실해 백제 건축 특징을 보여준다. 출입구와 큰 방이 연결된 ‘呂’ 자 형태로 겨울철 난방에 유리하도록 땅을 1m가량 파내고 집을 지었다.
수혈주거지군
건축재료로 사용된 목재는 자귀(목재를 찍어 깎고 가공하는 연장)로 다듬고, 한강과 주변에 있는 갈대, 풀 등으로 초가지붕을 얹었다.
출토된 각종 와당
지상식 건물지
백제 살림집 재현을 위한 공사를 지하 2m 내에서만 진행하였다. 지하 3m에 있는 문화재를 보존하기 위한 조치였다. 이를 통해 향후 풍납동 지역 문화재 정비 방향에 중요한 기준이다. 풍납토성 내 주거단지 재개발이 쉽지 않겠다는 생각을 했다. 경주의 예로 보면 그렇다.
풍납토성 경당지구 44호 건물 복원모형 (한성 백제박물관에서 촬영)
풍납토성 경당지구
풍납토성 경당지구
백제 살림집을 돌아본 후 인근에 있는 경당지구로 들어왔다. 마을 어르신들이 그늘막밑에서 담소를 나누고 계셨다. 건너편에는 수선화를 심는 조경작업이 진행되고 있었다. 경당지구는 재건축아파트가 들어설 예정이었으나 그에 앞선 1999-2000년 발굴조사 결과 신전(神殿)으로 추정되는 대형 건물터를 비롯한 한성시대 백제 유적과 유물이 대량으로 쏟아졌다.
경당 우물터
국가 사적(제11호) 풍납토성에 추가 지정됐다. 한 변 11m 방형공간을 3m 깊이로 팠다. 자갈과 각재로 수평을 만들고 그 위에 판재를 4단에 걸쳐 쌓아 올렸다. 그 위에 점차 모를 줄여 최종적으로 원형의 평면을 띠고 있다. 바닥에서 5단에 걸쳐 200여 점의 토기를 매납하고 그 위에 돌을 채웠다.
경당 / 우물터
풍납 전통시장
풍납 전통시장
경당지구를 돌아보고 풍납동 전통시장을 방문했다. 단순한 쇼핑을 넘어서, 지역의 고유한 정서와 문화를 직접 경험할 수 있다.
풍납근린공원 / 풍납토성 (풍납시장에서 단절됨)
소박한 인심과 함께 어묵, 떡볶이, 순대, 빈대떡, 붕어빵 등의 음식은 찾는 사람들에게 시골장터 같은 고향의 정을 느낄 수 있다. 석촌 고분군으로 이동하기 전에 풍납시장 앞 4거리 앞 식당에서 간짜장을 먹었다. 맛있고 싸고 게다가 친절하다. (간짜장 6천 원, 황제 짜장) 잠실행 전철을 탔다.
맛집
글이 길어져, 다음 회에는 석촌호수(인조 삼전도비)와 석촌고분 방문 보고를 올리겠습니다. 이어서 웅진(공주)과 사비성(부여) 방문 결과에 대하여 글 올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