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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애바다 Oct 08. 2024

공주 공산성 탐방

백제 웅진 공주 시대 (1)

공주 10경
공산성 주변도

   정약용 선생은 삼한 가운데 백제가 가장 강하고 문화가 발달하였다고 했다.(여유당전서 지리집 제2권 강역고 변진별고)   

 

   오늘(2024.10.01, 국군의 날 화, 비, 25도)은 백제의 두 번째 도읍지 웅진(공주)을 탐방하는 날이다. 공주(웅진성) 탐방 순서는 다음과 같다. (굵은 글씨, 금회 설명 순서)   전봉준 선생의 동학혁명의 격전장 우금치 고개를 탐방하려고 했으나, 무령왕릉과 박물관을 나왔을 때는 해가 넘어가고 있었다. 아쉽지만 다음 기회에 가 보기로 했다.


공산성> 황새 순교 성지> 웅진 백제 역사관> 공주 무령왕릉과 왕릉원> 국립공주 박물관> 충청권역 수장고   


   백제의 수도 변천사를 잠깐 살펴본다. (금회, 굵은 선 웅진성 탐방)

한성 위례성 BC 18~ AD 475 (1대 온조왕~21대 개로왕, 약 495년간, 73%, 2024.09.28. 방문, 토, 맑음, 28도)

웅진성      AD 475~ AD 538 (22대 문주왕~ 25대 무령왕, 공주, 64년간, 2024.10.01. 방문, , 비, 25)

사비성      AD 538~AD 660 (26대 성왕 ~ 31대 의자왕, 부여, 약 123년간, 2024.10.03. 방문, 목, 비, 22도)


   475년 고구려 장수왕에게 한성 하남 위례성(풍납토성 몽촌토성)을 뺏기고 개로왕마저 몽촌토성밖에서 사로 잡혀 죽음을 당하고 남으로 남으로 쫓겨 피눈물을 흘리며 웅진에 도읍을 정하였다. 몽촌토성에서 공산성(공주)으로 긴급 피난 수도를 옮겼다. 직선거리 120km다. 탐방하는 당일 공주에는 부슬부슬 비가 내렸다. 개로왕 전사로 갑자기 왕권을 이어받은 공산성 위의 아들 문주왕의 심정을 헤아려 보았다.


   그러나 지금의 공주는 무령왕릉과 박물관, 금강 그리고 공산성이 있는 아름다운 멋진 매력이 넘치는 활력 있는 관광 도시다.

공산성(급경사 구간)과 금강

   한성 하남 위례성(풍납토성 몽촌토성)의 규모에 비하면 위례성은 신혼 살림집 같은 느낌을 받았다. 무령왕을 비롯한 왕릉군도 걸어서 한 시간 내로 갈 수 있는 지근거리에 있다. 공산성은 방어에 초점을 둔 비상시국의 도성으로서는 최적의 조건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북으로는 금강이 방어해 준다. 특히 금강과 접해 있는 공산성 북쪽 일부 산성 구간에는 급경사지다. 관광객에게 경고하는 '추락주의' 위험표시판이 도처에 깔려 있다.


한성 함락과 개로왕 전사 그리고 웅진 천도

당시의 상황을 잠깐 살펴본다.

427년 고구려가 국내성에서 평양으로 수도를 천도, 남진정책 개시

433년 백제와 신라가 나제 동맹체결

472년 백제 개로왕이 중국 북위에 군원을 요청했지만 거부당함. 이로 인해 고구려 장수왕 분노 폭발

475년 고구려 장수왕의 침입으로 위례성(풍납토성 몽촌토성)에서 백제 개로왕 전사. 웅진(공주)으로 천도, 백제 문주왕 즉위 (文周王, 재위 475~477)

고구려는 한강 유역을 차지한 뒤에도 계속 남쪽으로 밀고 내려갔다. 서쪽으로는 천안과 청주, 중부 지역에서는 소백산맥을 거쳐 영주, 예천까지 진격했다. 백제와 신라는 각각 금강 이남과 소백산 이남까지 밀려났다.    

477년 백제 병관좌평(兵官佐平) 해구(解仇)가 자객을 보내 사냥 중인 문주왕을 암살. 문주왕의 열세 살 난 아들 삼근왕(三斤王, 재위 477~479) 즉위

478년  옛 왕비족인 진 씨(眞氏) 세력에 의해 해구 사망    

웅진 천도


     공주버스터미널에서 바로 공산성으로 올라갔다. 금서루 앞의 삼거리에 무령왕 동상이 서 있다. 잘 생기셨다. 공산성 서문 금서루 앞에는 무령왕의 동상이 세워져 있는 연문광장이 있다.        

세계유산 백제역사 유적지구 / 무령왕 동상
공주왕도심 코스 / 서문에서 본 공주 시가지

    

공산성

탐방 코스

금서루> 왕궁지> 연지> 쌍수정> 진남루> 영동루> 임진각>광복루> 명국삼장비> 영은사>만하루와 연지 >공북루>금서루

공산성 내부 안내도

   문주왕 원년(475년) 한성에서 웅진으로 도읍을 옮겼다. 문주왕, 삼근왕, 동성왕, 무령왕 성왕 16년(538년) 부여로 옮길 때까지 64년간 백제왕성이었다. 백제시대는 웅진성, 고려시대는 공주산성, 조선시대는 인조 이후 쌍수산성으로 불렸다. 백제시대 토성이었다가, 조선 인조 선조 이후 석성으로  개축했다. 현재 동쪽 735m를 제외하고는 모두 석성이다.   

금서루 앞 광장 / 금서루 누각

   성의 길이는 총 2,660m (토성 735m, 석성 1,925m)다. 동서남북 네 문(영동루, 금서루, 진남루, 공북루)이 있다. 조선시대에도 감영을 비롯 중군영등 중요 시설이 있었다. 2011년 백제 옻칠가죽갑옷, 마갑, 화살촉, 철제무기류 등이 출토되었다. 갑옷에 글씨가 있어 645년에 제작되었다고 판단한다.   

영동루

영동루

   동쪽문이다. 1980년 발굴조사 때 원래의 문을 지탱하는 돌이 발견되었다. 복원했다. 본래는 현판이 없었으나 2009년 공주시에서 이름을 공모하여 선정된 것을 현판으로 만들어 달았다.     

금서루

금서루

   4곳의 성문중 서쪽문으로 정문이다. 갈지자(之) 도로로 관광객과 차량이 올라간다.     

진남루

진남루

   남문이다. 토성이었던 공산성을 조선시대 석성으로 재축했다. 삼남의 관문이었다.     

공북루

공북루

   북문이다. 강변에 위치하고 있어 금강을 건너 왕래하는 남북통로의 관문이다. 입장료를 내면 금강 다리를 두 발로 걸어서 건널 수 있다. 좌우측에 약 백 척의 작은 모형배를 띄워 풍경이 아름답고 운치가 있다. 시민들이 백제시대 옷(왕, 왕비 등)을 입고 산책을 하고 있어, 잠시 백제시대로 온 느낌이 든다.     

왕궁지(추정, 1)
왕궁지(추정, 2)

추정 왕궁지

   한성에서 웅진으로 수도를 옮긴 초기의 왕궁터로 추정된다. 10칸, 20칸의 건물터와 돌로 쌓은 둥근 연못터 및 목곽 저장시설등 유적을 확인하였다.

공산성 백제 연못 (1, 왕궁 추정지 내)

   백제 연꽃무늬 수막새등 은 유물이 출토되었다.  연지는 돌로 쌓은 둥근 연못 터다.     

쌍수정

쌍수정

   조선 인조가 이괄의 난(1624, 인조 2)을 피해 일시 파천 5박 6일간 머물렀다. 두 거루의 나무(쌍수)에 기대어 한양을 걱정하던 인조가 난의 평정 소식을 듣고 기뻐하며 이 쌍수에 통훈대부라는 벼슬을 내렸다. 그 자리에 정자를 세웠다. 인조 이후 공산성을 쌍수산성이라고 불렀다.    

쌍수정 사적비

쌍수정 사적비

   이괄의 난(1624, 인조 2) 5박 6일간의 내용을 새긴 비문이다. 비문은 인조 때 영의정 신흠이, 글씨는 숙종 때 영의정 남구만이 썼다. 인조는 참으로 어려운 일을 많이 당한 군주다. 12년 후(1636년) 병자호란 때 청의 2만 군대 침입으로 남한산성에서 내려와 삼전도 굴욕을 겪었다.     

인절미 유래 (쌍수정 앞)

인절미

   찹쌀을 시루에 익힌 다음 그것을 절구에 찧어 조그맣고 네모나게 잘라 콩고물을 묻혀 먹는 떡이다. 인조가 이괄의 난 때 공주로 피난을 왔다. 우성면 목천리 인근에 살던 임 씨가 콩고물에 묻힌 떡을 바쳤다. 시장하던 참에 연거푸 떡을 몇 개 먹더니 떡 이름이 무엇인지 물었다. 신하들이 대답을 못했다. 어느 댁에서 만들었냐고 묻자 “임 씨 댁에서 만들어 바쳤습니다.”라고 하자 인조가 생각에 잠기더니, “임 씨라... 임 씨라... 그것 참 맛이 절미로다”라고 하였다. “임절미”가 된 것이다. 세월이 흘러 발음 편하게 “인절미”로 되었고, “공주떡“이 되었다.          

임류각

임류각

   왕궁의 동쪽에 건축한 건물이며, 연회 장소로 사용했다. 발굴조사된 추정임류각지를 근거로 1993년 복원했다.     

광복루

광복루

   원래 공북루 옆에 있던 누각을 현 위치로 옮기고 김구선생이 방문한 기념으로 8.15 광복을 기린다는 의미에서 광복루라고 개칭했다. 공주는 김구 선생과 인연이 깊다. 을미사변 혐의자를 살해한 혐의로 사형선고를 받고 인천감호소에서 사형 집행을 대기하고 있었다. 그러나, 고종이 며칠 전 개통된 전화기로 사행집행 금지 명을 하달했다. 형무소에서 탈출하여 공주 마곡사에서 은거 수행하셨다.      

명국삼장비

명국삼장비

   명나라 3 장수에 대한 사은 송덕비다. 정유재란 때 왜적을 막고 선정을 베풀어 주민을 평안하게 하였던 명장군 이공, 임제, 남방위에 대한 기록이다.    

만하루와 연지 (금강에 배를 띄웠다)

만하루와 연지

   연지는 공산성안에 있는 연못의 하나다. 단의 형태로 석축을 정연하게 쌓았다. 동서양측에 넓은 통로를 두었고, 깊이는 약 9m다. 연못과 금강사이에 만하루 정자를 세웠다.     

영은사

영은사

   1458년(세조 4) 지은 사찰로 임진왜란 때 승병의 합숙소였다. 1616년(광해군 8)에 승장을 두어 전국 사찰을 관리하도록 하였다.     

공산정

공산정

   공산성 서북쪽 정자다. 2009년 시민 공모를 통하여 이름을 정했다.     


   공산성 돌아본 후 금서루를 통해 공산성 회전교차로 갈지 (之) 자 출입로를 내려왔다. 교차로 중앙에 무령왕 동상을 지나 백제무령왕릉 방향으로 도보 탐방에 나섰다. 약 30m 걸어가면 왕복 2차선을 가로질러 거대한 두 개의 아치형 문과 마주치게 된다. 백제무령왕연문이다. 무덤 내부 천장과 벽을 쌓은 벽돌과 같은 형태로 연문을 만들었다. 왕릉 내부의 벽돌 색깔이다. 왕릉교 난간에 보행자용 간이 터널을 설치해 놓았다.

왕릉교 난간과 제민천

   왕의 행차를 직접 보는 것 같은 분위기다. 다리 아래는 제민천이고, 왕릉교를 건너면 바로 황새바위 순교성지다. 지리학적으로 금강의 본류와 제민천의 지류가 만나는 모래사장으로 공개처형지로서의 최적지였다. 지금까지 자료조사를 통하여 발굴된 순교자는 총 337명으로 이는 한국 최대의 기록으로 여겨진다.


   다음 회는 황새바위 순교성지와 무령왕릉과 국립공주박물관 방문 기록을 올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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