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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애바다 Oct 14. 2024

부여 궁남지와 화지산 유적지 탐방

백제 사비성 부여 시대(1), 신동엽 시인 생가 문학관, 부여성당 유물

부여 도보여행길

   오늘(2024.10.03. 목, 개천절, 비 22도)은 백제의 마지막 수도 부여를 여행했다. 사비성 시대는   약 123년간(AD 538~AD 660, 26대 성왕 ~ 31대 의자왕) 존속했다.

     

   부여(사비성) 탐방 순서는 다음과 같다. (굵은 글씨 금회 설명 순서)    

부여 버스터미널> 신동엽 시인 생가 및 문학관> 부여성당> 부여성당 신축부지 유물 발굴> 부여군청> 궁남지(포룡정)/서동과 선화공주/계백오천결사대 충혼탑> 화지산유적> 국립부여박물관> 정림사지 오 층 석탑/ 정림사지박물관> 관북리유적> 삼충사> 부소산 낙화암     

부여 10경

   부소산 낙화암은 제일 마지막으로 가보기로 했다.

낙화암과 백마강의 저녁

   저녁때, 여행자의 고독감과 낙화암에서 백마강으로 몸을 던지는 궁녀들의 절망감을 몸소 느껴 보겠다는 마음도 있었다.

궁녀사

  종일 비가 부슬부슬 내렸고, 달도 뜨지 않았다.

궁녀사 경내
궁녀사 앞 무궁화와 꽃무릇

   부소산 낙화암 탐방을 하고 궁녀사와 태자숲길을 돌아 나올 때는 캄캄한 밤이 되었다.  300m 반경에 인적이 없었다. 나와 궁녀와 태자의 절대 고독 시간이었다.

태자의 숲길

   궁녀사 문 밖의 빨간 꽃무릇과 그 주변에 낙화된 하얀 무궁화가 궁녀와 태자를 상징하는 것 같았다. 궁녀사 경내에는 불도 꺼져 있었고, 문도 굳게 닫혀 있었다.

부여 시외버스 터미널

부여 버스터미널

   부여시외버스터미널에서 하차했다. 가수들 얼굴과 일정이 큼직한 축제(제70회 백제 문화제, 2024.09.28.~10.06) 안내 플래카드에 걸려있었다.

제70회 백제 문화제 포스트 (부여 시외버스터미널 내 승차 대기장)

   2008년에 전면 리모델링하였고, 6개의 승차홈으로 구성되어 있다. 오늘도 전체 구간 두 발로 도보 탐사한다. 도보여행은 의외로 얻는 것이 많다. 신동엽 시인의 생가와 문학관과의 만남이 그렇다. 그 유명한 시인의 생가 안내 표지판을 보고 저절로 두발이 움직였다.      

신동엽 생가 및  문학관 안내 표지판

신동엽(申東曄) 시인(1930.08.18.~1969.04.07., 향년 38) 생가 및 문학관

   버스터미널에서 옆 부여성당 안 골목에 있다. 신동엽 길이다. 성당 담벼락을 둘러가며 시인의 시가 몇 편이나 도배되어 있다. 동시대에 활동한 김수영 시인(1921년 11월 27일 ~ 1968년 6월 16일)과 함께 1960년대 대표적 참여 시인이다. '껍데기는 가라'는 4.19 혁명정신을 기렸다. '누가 하늘을 보았다 하는가', '아니오', '원추리', '진달래 산천'등 많은 시를 발표했지만, 너무 젊은 나이에 타계했다.     

부여 성당과 신동엽 시인의 시(너는 모르리라)

껍데기는 가라


사월도 알맹이만 남고

껍데기는 가라.     

껍데기는 가라.


동학년(東學年) 곰나루의, 그 아우성만 살고

껍데기는 가라.      

그리하여, 다시

껍데기는 가라.


이곳에선, 두 가슴과 그곳까지 내논

아사달 아사녀가

중립의 초례청 앞에 서서

부끄럼 빛내며

맞절할지니     

껍데기는 가라.


한라에서 백두까지

향그러운 흙가슴만 남고

그, 모오든 쇠붙이는 가라.

(1967년 1월, 52인 시집)     

보리밭 (신동엽 시인)

무덤

   1969년 4월 경기도 파주군 금촌읍 월롱산 기슭에 안장되었다가, 1993년 11월 부여로 옮겨와 능산리 고분의 건너편 산에 모셔져 있다.     

산에 언덕에 (신동엽 시인)

시비

   1970년 부여 동남리 백제교 옆 백마강 기슭에 시비 “산에 언덕에”가 세워졌다.     

신동엽 시인 생가
본채 / 큰방 작은방
신동엽 시인 / 생가
부엌 / 작은방

생가 복원

   1985년 생가를 복원하였다. 생가 터에 목조 초가지붕집이 세워져 있다. 보다 먼저 온 두 여성 방문객이 상기된 표정으로 방안 책장과 사진과 유품을 둘러보고 있었다. 말을 걸어 볼 수 없을 정도로 진지하다.

신동엽 시인 문학관

신동엽 문학관

   생가 뒤편에 신동엽문학관을 2013년 개관하였다.     

부여 성당

부여 성당

   부여성당은 신동엽 시인 생가와 문학관의 친한 이웃이다. 신동엽 시인을 위하여 겉옷(담장)을 내어 주었다.   

부여 성당 별관 (신축 부지에서 유물이 쏟아져 나왔다)

부여성당 신축부지 유물 발굴  

   신축부지에서 토기 파편등이 출토되었다. 곳곳 땅밑 잠자고 있는 유물들이 있다. 부여 사비성 123년간의 백제 도읍지였으니 당연하다고 할 것이다.         

백제 대종

부여군청(扶餘郡廳)

   계백장군 동상을 지나면 군청 앞마당에 백제대종이 있다. 부여는 동쪽으로 논산시, 서쪽 보령시와 서천군, 북쪽 청양군과 공주시, 남쪽 전북 익산시, 군산시와 접한다.      

궁남지 안내도

궁남지(宮南池) 

   삼국사기에 무왕 35년(634) 궁궐 남쪽에 팠다고 기록되어 있다. 무왕의 모후가 거처로 삼던 이궁에 속한 연못이 있었다.

궁남지 / 서동공원(궁남지)

   현존하는 우리나라의 가장 오래된 인공 연못이다. 연못 안 섬 위에 포룡정 정자가 있다. 주변의 버드나무와 100만 송이 연꽃이 어우러져 있다. 수련, 열대수련, 수생식물이 자라고 있다. 매년 7월 부여서동연꽃 축제가 열린다.  

궁남지 포룡정(1)

   왕실의 별궁지로 추정되는 화지산에 유적 발굴작업이 한창이다. 삼국사기 백제본기에 무왕 35년(634년)에 궁성(宮城) 남쪽에 연못을 파고 물을 20여 리나 되는 긴 수로로 끌어들였으며, 물가 주변의 사방에는 버드나무를 심었다.

궁남지 포룡정(2)

   연못 가운데에는 섬을 만들어 방장선산(方丈仙山)을 본떴다고 되어 있다.

궁남지와 무릇(3)
궁남지와 포룡정(4)

   일본서기에는 궁남지의 조경(造景) 기술이 일본에 건너가 일본 조경의 시초가 되었다고 전하고 있다.     

서동요 비

서동과 선화공주

   교차로에 서동과 선화공주가 밝게 웃고 있는 조각상을 설치하여 놓았다. 궁남지는 백제 무왕(武王)의 출생 설화와 관련이 있다.

서동과 선화공주

   전설에 따르면, 백제시대 법왕(法王)의 시녀였던 여인이 못 가에서 홀로 살던 중 용신(龍神)과의 사이에서 아들을 낳았는데, 그 아이가 서동(薯童)으로 법왕의 뒤를 이은 무왕(武王)이다.     

서동과 선화공주

   신라 제26대 왕인 진평왕의 셋째 딸 선화공주는 절세미인이었다. 훗날 백제의 30대 왕이 되는 무왕(武王), 서동은 어린 시절 공주를 연모하여 선화공주가 실은 밤마다 남몰래 서동의 방으로 찾아가 만난다는 내용의 노래 〈서동요(薯童謠)〉를 신라에 퍼뜨렸다. 이 노래는 곧 진평왕의 귀에까지 들어가 공주는 행실이 정숙하지 못하다며 귀양을 가게 되었다. 이를 미리 알고 있던 서동이 선화공주를 백제로 데리고 와서 행복하게 살았다는 이야기다.     

백제 오천 결사대 출정식

계백오천결사대 충혼탑

   660년에 백제가 멸망할 때 황산벌에서 신라 5만 대군과 싸워 죽은 계백장군 휘하 백제 5천 결사대의 우국충절을 기리기 위하여 세워진 탑이다. 대백제전 행사 때 오천결사대 충혼제를 지내는 곳이다. 당일 비가 왔었는데, 방문 시 충혼제 행사가 종료된 것인지 행사용 시설물을 걷어 차량에 싣고 있었다. 5,000 결사대의 눈물 같은 비가 탑과 탑 설립비에 내렸다. 높이 8.8m의 오천결사대출정상이 있다.     

백제 5천 결사대  충혼탑

   계백장군과 오천 결사대의 역사 문화적 가치와 충절교육의 장으로 인, 의, 신, 충으로 대표되는 백제 정신을 상징한다. 계백장군은 백제 말기 신라와 당나라의 나당연합군이 백제를 공격하자 군사 5,000명을 이끌고 전쟁에 나가 황산벌에서 신라 김유신의 5만 군대와 맞서 네 번이나 승리했다. 그러나 18만 명의 나당연합군을 상대로 싸우기에는 백제 군사의 수가 너무나 부족했다. 백제의 마지막 보루였던 계백장군은 결국 전투에서 패했고, 678년을 이어온 백제는 멸망했다.     

부여 화지산 유적

화지산 유적

   부여 궁남지 동쪽에 위치한 화지산은 백제 사비시대의 이궁지(異宮址)로 전해지는 곳이다. 궁남지 방향의 산비탈 경사지에 넓은 면적의 표토가 드러나 황토색을 띠고 있었다. 발굴조사 결과 백제시대에 건립된 팔각 우물, 초석건물지와 기단시설물을 발굴했다.

부여 화지산 유적 발굴 조사
부여 화지산 유적지 발굴 중

   벼루연가(굴뚝에 비 눈이 들어보지 못하도록 막는 시설물), 녹유자기(표면에 녹색 노갈색 유약을 입힌 그릇) 연꽃무늬 수막새, 인각(도장이 찍힌 기와)이 출토되었다. 사비기에 해당하는 것으로는 합구식 옹관묘가 있었다.


<참조>

-. 여기가 부여다 (부여문화원) 팸플릿


   부여 사비성 탐방 첫 회 글 읽어 주셔서 대단히 감사합니다. 이어서 다음회는 국립부여박물관과 정림사지 오 층 석탑에 대하여 글 올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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