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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애바다 Oct 21. 2024

부여 백제문화단지  탐방

백제 사비성 부여시대(4), 나성과 부여 왕릉원

백제 문화단지 가이드 맵

   정약용 선생은 삼한 가운데 백제가 가장 강하고 문화가 발달하였다고 했다.(三韓之中 百濟最强最文, 강역고 疆域考) 백제문화의 특징은 검이불루 화이불치(儉而不陋 華而不侈, 검소하나 누추하지 않고, 화려하나 사치스럽지 않다)라고 삼국사기 백제본기에 적혀 있다고 한다. 한성 위례성, 웅진 공산성, 부여 부소산성을 둘러본 소감을 위 구절로 잘 압축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백제문화단지는 백제 680년 역사의 핵심 요약집이다.


   백제의 수도 변천사와 시기별 대표적 상징(물). 특성을 잠깐 살펴본다.

 (대표적 상징 왕/성곽/무덤/박물관. 부장물. 특징)


한성 위례성 BC 18~ AD 475 (1대 온조왕~21대 개로왕, 약 495년간, 총 680년의 73%, 2024.09.28. 방문)

근초고왕(칠지도)/풍납. 몽촌토성(서울)/석촌고분(적석총)/한성백제박물관(풍납토성 축성 장면, 실물형태)


웅진성      AD 475~ AD 538 (22대 문주왕~ 25대 무령왕 성왕 16년, 공주, 약 64년간, 2024.10.01. 방문)

무령왕(백제 금동 신발)/공산성(공주)/무령왕릉(벽돌분)/국립공주박물관(진묘수, 금제관식)


사비성      AD 538~AD 660 (26대 성왕 16년~ 31대 의자왕, 부여, 약 123년간, 2024.10.03. 방문)

성왕(사비천도)/부소산성. 나성(부여)/부여왕릉원(동하총-1호, 돌방무덤)/국립부여박물관(백제금동대향로)

                             

   부여(사비성) 탐방 설명 순서는 다음과 같다. (굵은 글씨 금회 설명 순서)    

부여 버스터미널> 신동엽 시인 생가 및 문학관> 부여성당> 부여성당 신축부지 유물 발굴> 부여군청> 궁남지(포룡정)/서동과 선화공주/계백오천결사대 충혼탑> 화지산유적> 국립부여박물관> 정림사지 오 층 석탑/ 정림사지박물관> 관북리유적> 삼충사> 부소산성 낙화암>>>

백제문화단지(2022.06.06 1박 2일 가족 여행) 및 나성, 부여왕릉원, 부여능산리사지


   부여 나성과 부여왕릉원 그리고 부여능산리사지는 아쉽게도 탐방을 못하였다. 낙화암 궁녀사 탐방 후, 저녁시간이라 캄캄해졌고, 귀경 예약 버스시간이 임박했기 때문이었다. 인터넷에서 정보를 취합하여, 백제 역사 탐방을 끝맺고자 한다. 언젠가는 방문하기를 간절히 원한다. 왜냐하면, 왕이 거처했던 궁전과 성곽과 무덤 탐방은 역사 뒤돌아 보기의 핵심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백제문화단지는 약 2년 전에 방문하여 벌써 기억이 가물가물하지만, 보관하고 있는 사진 파일에서 다시 기억을 끄집어내어 본다. 이하 많은 주요 자료는 관련 장소의 홈페이지와 팸플릿을 참조하였음을 미리 밝힌다. 낮에는 주로 리조트 수영장에서 손주 녀석 꼬맹이와 보내고, 야간에 탐방하여 사진이 흑백이다.  


   먼저 주변을 돌아보았다. 바로 옆에 롯데리조트 부여, 롯데아웃렛과 롯데스카이힐 부여 CC가 있다. 그밖에 한국전통문화대학교, 부여군충남국악단, 부여생활사박물관, 식당 등이 있다.  

리조트 부여(숙소)/ 백제 문화제 안내 / 한국전통문화대학교
 스카이힐 부여 골프장 / 부여군충남국악단/ 리조트 내 수영장
부여생활사박물관/백제궁수라간

백제문화단지(百濟文化團地)     

   백제의 왕궁 사비궁은 삼국시대 왕궁의 모습을 잘 보여준다. 백제의 왕실 사찰 능사는 부여읍 능산리 유적을 실물 크기로 복원했다. 중문인 대통문을 지나 마주하는 능사 오 층 석탑은 단지에서 가장 키가 큰 건축물이다. 백제문화단지는 1994년부터 20여 년에 걸쳐 330만 m 2에 대지에 조성했다.  

백제문화단지 조감도
백제문화단지

   문화역사단지 입구인 정양문(正陽門), 백제 왕궁인 사비궁과 대표적 사찰인 능사, 능사의 연못에 있는 수경정(水鏡亭), 계층별 주거문화를 보여주는 생활문화마을, 개국 초기 궁성인 하남 위례성, 직접 위례성으로 통하는 위례문(慰禮門), 백제 묘제를 보여주는 고분공원, 충남도민의 기증으로 조성된 백제숲, 문화단지 내를 한눈에 볼 수 있는 제향루(濟香樓), 백제의 역사와 문화를 한눈에 보는 백제역사문화관이 있다. (홈페이지 참조)   

백제문화단지 관람 안내도

건축물

위례성(慰禮城)

   한성 하남 위례 백제시기(B.C 18~A.D 475)의 도읍 모습을 보여준다. 고구려에서 남하한 온조왕이 한성에 자리 잡고 비류왕의 미추홀국을 통합하고 난 후 백제(百濟)의 수도로 정했다. 동문, 서문, 위례궁(慰禮宮)의 정전인 안태전(安泰殿), 좌평청(左平廳), 좌장청(左將廳), 침전(寢殿)등이 있다.     

사비궁

사비궁(泗沘宮)

   백제 역사문화의 절정을 이룬 사비 시기(538~660)의 왕궁을 보여준다. 중남문인 천정문(天政門), 정전인 천정전(天政殿), 동궁 정전인 문사전(文思殿), 동궁 외전인 연영전(延英殿), 동궁 남문인 현정문(顯政門), 동궁 북문인 숭지문(崇智門)이 있다.


   서궁 정전인 무덕전(武德殿), 서궁 외전인 인덕전(麟德殿), 서궁 남문인 선광문(宣光門), 서궁 북문인 통천문(通天門)이 있다. 사비궁(泗沘宮)은 삼국시대 왕궁 중 최초로 재현된 왕궁이다.      

정양문

정양문(正陽門)

   백제문화단지의 정문이다. 하루 중 모든 기운이 왕성한 때를 지칭하는 정양(正陽)에서 이름을 따왔다.       

천정문(天政門)

사비궁 중궁(中宮)의 정문이다.

천정전(天政殿), 정전

   사비궁의 정전으로 국가의 큰 정사를 하늘에 고하여 결정했다는 천정대에서 이름을 따왔다. 왕의 즉위 의례, 신년 행사 등 각종 국가 의식이 거행되고, 외국의 사신을 맞이하는 사비궁 내의 가장 중요한 건물이었다.  

백제 왕 어좌(천정전)

동궁전

   주로 문관과 관련된 집무공간이다.

현정문(顯政門)

   사비궁 동궁(東宮)의 정문이다. 예부터 임금이 궁성의 남문에 정령(政令)을 내걸고 시정목표를 알렸다.

백제 왕 복식 / 여왕 복식

문사전(文思殿), 정전

   동궁에서 가장 중심적인 건물로 왕이 평소 집무를 보는 공간이다. 주로 문관에 관한 집무공간이다. 문은 동쪽을 의미한다.

연영전(延英殿), 외전

   주로 문신들의 집무 공간이며 천하의 인재를 맞이한다는 의미다.

숭지문(崇智門)

   동궁의 후문이자 북문으로 지혜가 있는 사람을 숭상한다는 의미다.     


서궁전

   주로 무관업무와 관련된 공간이다.

선광문(宣光門)

   사비궁 서궁(西宮)의 정문이다. 역대의 임금들이 거듭해서 밝은 덕을 베푼다는 의미다.

무덕전(武德殿), 정전

   서궁에서 가장 중심적인 건물로 왕이 평소 집무를 보는 공간이다. 주로 무관에 관한 집무공간이다. 무(武)는 서쪽을 의미한다.

인덕전(麟德殿), 외전

   무신들의 집무 공간이다. 태평성대에 나타난다는 영물인 기린(麒麟)의 덕이란 의미다.          


능사

   능산리사지(陵山里寺地)는 백제 성왕의 명복을 빌기 위한 백제 왕실 사찰로 부여군 부여읍 능산리에서 발굴된 유구의 규모와 동일하다. 능사에는 중문인 대통문(大通門), 5층탑인 능사 5층목탑(陵寺五層木塔), 금당인 대웅전(大雄殿), 강당인 자효당(慈孝堂), 강당지 동익사인 숙세각(宿世閣), 강당지 서익사인 결업각(結業閣), 동부속채인 부용각(芙蓉閣), 서부속인 향로각(香爐閣), 소공방(小工房)이 있다. 중문-탑-금당-강당이 일직선으로 배치되어 있다. 백제시대의 대표적인 가람배치 형식이다.     


대통문(大通門)

   능사의 중문이다. 뜻이 크게 통한다는 의미다.     

능사 5층 목탑

능사(陵寺) 5층목탑

   국내에서 최초로 재현된 백제시대 목탑이다. 높이는 38m로 아파트 높이 13층 정도이다. 능산리 사지 목탑 심초석에서 발굴된 국보 288호 창왕명석조사리감(昌王銘石造舍利龕)에는 백제 위덕왕 14년 (서기 567년)에 사리를 봉안하고 탑을 세웠다고 한다.     


대웅전(大雄殿)

   능사의 금당으로 능사에서 불상을 모시던 공간이다. 예불공간으로 사용되었으며 백제 불상인 삼존불이 모셔져 있다. 불상 앞에는 금동대향로가 놓여 있다.      


자효당(慈孝堂)

   능사의 강당으로 대중에게 불법을 설법했던 공간이다. 위덕왕의 성왕에 대한 효심을 기리는 의미다.     


향로각(香爐閣)

   국보 제287호 백제금동대향로가 발굴된 건물이어서 향로각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고분공원

   고분궁원에는 횡혈식 석실분 1, 횡혈식 석실분 2, 횡혈식 석실분 3, 횡구식 석곽분, 횡혈식 석실분 4, 횡혈식 석실분 5, 횡혈식 석실분 6 등 모두 7기가 이전 복원 되었다.     

백제시대의 대표적 고분 형태를 보여주는 곳이다. 백제문화단지 화계조성부지에서 출토된 4기와 부여 은산면 가중리에서 출토된 3기 등 총 7기가 이전복원 되어 있다.     


석곽분

횡구식 석곽분

   백제시대 고분의 한 종류이다. 관은 돌을 이용해 장방형으로 둘러쌌으며 내부는 육각형 구조로 활석을 사용하였으며 바닥은 잡석을 깔았다.     

횡혈식 석실분 1

   석실의 구조가 완전한 형태이며 장방형 평면으로 연도부, 묘도, 배수구로 이루어져 있다. 내부는 육각형 구조이며 천정 덮개석은 대형판석 3매를 사용하였다. 묘실은 화강석 판석을 사용하였다.     

횡혈식 석실분 2

   평면형태는 장방형이며 연도부와 묘도, 배수구로 이루어져 있다. 내부는 육각형 구조이며 천정 덮개석은 판석 6매를 사용하였다. 잘 다듬은 판석을 사용하였다.     

횡혈식 석실분 3

   평면형태는 장방형이며 연도부와 묘도, 배수구로 이루어져 있다. 내부는 육각형 구조이며 천정 덮개석은 대형판석 3매를 사용했을 것으로 추정되나 발굴 당시에는 2매가 발굴되었다. 잘 다듬은 판석을 사용해 축조하였다.     


석실분

횡혈식 석실분 4

   평면형태는 장방형이며 내부는 육각형 구조로 덮개석은 대형판석 3매를 사용했을 것으로 추정되나 발굴 당시에는 2매가 발굴되었다. 잘 다듬은 화강암 판석을 사용해 축조하였다.     

횡혈식 석실분 5

   장방형이며 내부는 육각형 구조로 덮개석은 장방형 판석 4매를 덮었다. 바닥 및 벽은 잘 다듬은 화강암 판석을 사용해 축조하였다.   

횡혈식 석실분 6

   장방형이며 내부는 육각형 구조로 덮개석은 장방형 판석 4매를 덮었다. 벽은 잘 다듬은 판석을 사용했으며 바닥은 크기가 다른 판석을 박석하였다.     


생활문화마을

   백제 사비시대의 신분별 주거유형을 보여준다. 건물로는 군관주택 계백, 귀족인 사택지적의 집, 건축가 아비지의 집, 의박사 왕유능타, 오경박사 담양이의 집, 악사 미마지의 집, 금속기술자 다리의 집, 야철장인 탁소의 집, 외박사 마나문노의 집, 도공 신한고귀의 집, 공동우물, 주조기술자 인번의 집, 불상조각가 도리의 집, 직조장인 서소의 집, 도미설화 도미부인의 집이 있다.     


백제역사문화관

   역사박물관으로 백제역사와 문화의 전반에 대한 자료수집, 보존, 연구, 정보제공한다. 상설전시관, 기획전시관, 상영관등 다양한 전시실을 갖추었다.          

나성

나성

   백제의 수도 부여를 방어하기 위해 쌓은 성이다. 한반도에서 가장 먼저 축조된 외곽성이다. 부소산성에서 시작하여 수도의 북쪽과 동쪽을 보호하고 있다. 북나성과 동나성으로 이루어져 있다. 북나성은 북단의 부소산성에서 시작하여, 동으로 청산성의 외곽을 돌아 석목리에 이른다. 동나성은 석목리와 능산리, 염창리를 지난 다음 백마강에 닿게 된다.         

나성

   웅진에서 사비로 수도를 옮긴 538년경에 쌓았다. 부소산성에서 시작하여 도시의 북쪽과 동쪽을 보호하고 있다. 나성은 방어의 기능과 수도의 안과 밖을 구분하였다. 나성은 6.3km 길이의 동나성 구간이 세계유산으로 등재되었다.      

나성

   백제 사비시기 이전에 도성에서는 수도를 둘러싸는 성곽이 존재하지 않았다. 왕성과 주변의 자연환경을 이용한 방어체계가 전부였다. 즉, 성이 무너지면, 즉각 위험이 닥친다. 사비 시기에는 기존의 방어체계에 나성이라는 외곽성인 2차 방어막을 더 축조했다. 한남 하남 위례 시대의 풍납토성과 몽촌토성이 고구려 장수왕에게 함락된 뼈아픈 경험의 영향을 받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이 외에도 나성의 외곽에 수도를 방어하기 위한 또 다른 방어선이 구축되었는데 청마산성, 석성산성, 가림성, 증산성 등 최초 1차 방어선이다. 이 성들이 수도의 외곽 성들이 1차 방어선 역할을 하고, 나성이 2차, 마지막으로 부소산성이 최후 방어선 역할을 하였다.    

나성

   나성은 방어성의 역할뿐만 아니라 성안과 성밖을 구분하는 경계의 역할도 하였다. 나성을 중심으로 하여 도성 내부에는 무덤을 만들지 못하게 하였다. 성안의 구역은 산자의 공간을 , 성 밖에는 죽은 자의 공간인 것이다. 평민, 귀족뿐만 아니라 왕실의 무덤까지도 도성 안에는 만들지 못하도록 제한하였다. 이것을 ‘경외매장(京外埋葬)’이라고 한다. 왕실의 능묘군인 부여 왕릉원도 나성의 바깥에 있다.

나성 석축 (시공 책임자, 실명 책임제 )

   나성에 기본적으로 사용된 공법은 판축공법이다. 판축공법이란 흙을 한켜씩 쌓아 올리는 기법으로 중국과의 교류를 통해 백제에 전해졌다. 백제는 중국으로부터 받아들인 판축공법을 백제의 자연환경의 맞춰 적용하였고, 백제가 멸망한 후 백제의 유민들이 일본으로 건너가면서 백제의 축성기술이 일본에 전해졌다.     

부여 왕릉원

부여 왕릉원

   부여왕릉원은 해발 121m의 능산리산 남쪽 경사면 중턱에 있다. 동. 서와 중앙에 각각 무리를 이루어 모두 3군 16기로 분포되어 있다. 현재 사적으로 지정된 고분은 중앙의 전(傳) 왕릉군 7기다. 앞뒤 2줄로 3기씩 있고, 뒤쪽 제일 높은 곳에 1기가 있다. 겉모습은 모두 원형 봉토분이고 내부는 널길이 붙은 굴식돌방무덤(횡혈식석실분)으로 뚜껑돌 아래는 모두 지하에 만들어 백제후기 사비시대의 묘다. 왕 혹은 왕족 묘로 추정된다. 부여 능산리 나성 바로 밖에 인접하여 위치하고 있다.

부여 왕릉원(아치형 터널 있는 능이 동하총 1호임)

   1915년과 1917년 조사결과 세 가지 형식의 굴식돌방무덤(횡혈식석실분)을 확인했다. 굴식돌방무덤은 천장을 어떤 형태로 마무리했는지에 따라 아치형과 평천장 구조로 나눈다. 평천장 구조는 다시 단면의 형태에 따라 육각형과 사각형 구조로 나눈다. 부여 왕릉원에는 세 가지 형식의 고분이 모두 존재하고 있다.     

동하총 1호분 내부(출처 인터넷)

   1호분(동하총)은 평천장 구조에 사각형의 돌방무덤이다. 무덤방의 4개의 벽면과 천장에 커다란 판석을 하나씩만 사용하였으며 벽면에 두껍게 회를 발랐다. 회를 바른 벽면에는 사신도를 그려 넣었는데 동쪽에 청룡, 서쪽에 백호, 북쪽에 현무, 남쪽에 주작을 표현하였다. 천장에는 연꽃무늬와 구름을 표현한 그림이 있다. 도교와 불교를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2호분(중하총)은 아치형 구조의 돌방무덤이다. 1, 3~7호분이 커다란 판석을 사용하여 각 벽면과 천장을 구성한 평천장 구조와는 다르게 2호분은 잘 다듬어진 장대석을 사용하여 천장을 터널형으로 쌓았다. 3~7호분은 평천장 구조에 육각형의 돌방무덤이다.      

부여 왕릉원

   백제는 중국식 벽돌무덤의 구조를 수용 후 자신들의 전통적인 무덤양식에 적용하였다. 아치형의 천장에서 육각형, 사각형 천장으로 완성된 무덤구조는 백제 지배계층의 무덤으로 사용되었다. 이후 신라와 일본에까지 전했다. 부여 왕릉원은 일찍이 도굴되어 두개골 금동제 장신구 및 허리띠 등 약간의 유물만 수습되었다.      


부여 숭목전

   백제 시조 온조왕을 비롯 사비시대(538~660)의 성왕, 위덕왕, 혜왕, 법왕, 의자왕의 위패를 모셨다.     


부여능산리사지

   백제 위덕왕 14년(567년)에 성왕의 명복을 빌기 위하여 창건되었다. 660년 백제 멸망으로 폐허가 되었다. 발굴조사결과, 중문, 목탑, 금당, 강당이 남북 일직선상에 배치되었다. 동서남쪽이 회랑으로 돌려져 있는 전형적인 일탑일금당식의 가람배치다. 동서북쪽을 둘러싼 대배수로와 배수로를 건너는 목교와 석교가 확인되었다. 백제의 공예 수준을 말해주는 백제금동대향로(국보)와 절이 세워진 연대를 알 수 있는 부여 능산리사지 석조사리감(국보)이 출토되었다.

백제 금동대향로(좌측-정면, 국립부여박물관 직접 촬영) / 측면(우측)

백제 금동대향로(국보 제287호)

동양 최고의 금속공예품인 백제금동대향로다. 높이 61.8cm, 무게 11.85kg이다. 1993년 부여 능산리 사찰의 공방터에서 발견되었다. 뚜껑에는 봉황이 정상에 앉아 있다. 다섯 방향으로 쌓아 올린 봉우리에는 다섯 악사들과 17인의 인물상, 현실 세계 동식물, 상상의 동물등 42마리가 묘사되어 있다. 산 사이사이에서 향의 연기가 올라오게 만들었다. 향로 몸체는 연꽃 봉오리처럼 표현하고 3단으로 되어 있다. 받침은 용이 위로 날아오르는 모습을 나타냈다. 제작과정을 상세하게 그래픽으로 보여준다.

백제 금동대향로(능산리 고분군 주차장 건설현장, 물웅덩이 진흙 속에서 발견, 1993.12.12)

신선들이 산다는 신산을 표현한 박산향로의 전통을 잇는다. 고대의 전통적 세계관과 도가사상을 정교하게 드러냈다. 제작방법은 밑그림 그리기, 밀랍으로 원본 만들기, 거푸집 만들기, 청동을 녹여 거푸집 붓기, 금도금하기 순서다. 마지막으로 향을 피워 시험해 본다. 정약용 선생이 백제문화를 극찬하는 대표적 상징물이라고 생각한다.    

공방시설

백제 금동대향로 생산지 (관북리 공방시설 유적, 부소산성 남쪽, 부여동헌 밑, 개인 생각 추측)

   백제 왕실 사용했던 금속등 공예품 공방 자리다. 금, 은, 구리, 철 등을 사용했다. 특히 순금에 가까운 좋은 품질의 금과 은을 섞은 합금을 다루었던 곳이다. 백제금동향로를 여기서 만들었던 곳일 수도 있다는 생각에 더욱 유심히 살펴보았다. 백제금동향로를 만들었던 탄생지라고 주장하고, 우기고 싶다. 사비시대 최고 품질을 만들었던 곳임에 틀림없다.  (전회, 부여 부소산성 낙화암 탐방 글에서 인용)

부여 능산리사지 석조사리감(국립부여박물관 직접 촬영)

부여 능산리사지 석조사리감(국보)

   부여능산리사지 절터 중앙부 목탑지의 심초석위에서 나왔다. 화강암으로 만들었으며, 높이 74cm, 너비는 가로 세로 각각 50cm이다. 윗부분은 아치형이다. 백제 시기 사리를 보관하던 용기다. 출토 당시 사리는 이미 폐기된 상태였다. 사리감 양쪽에 각각 10자씩, 도합 명문 20자가 예서체로 세겨져 있다. 공양 연대가 567년(위덕왕 13년)이다.


<참고 자료>

-. 백제문화단지 팸플릿(백제문화단지 발행)

-. 나성 (백제세계유산센터 팸플릿)

-. 부여왕릉원(부여군 부여군시설관리공단 발행)

-. 여기가 부여다 팸플릿(부여군, 부여문화원 발행)

-. 대한민국 구석구석


   긴 글 읽어 주셔서 참 고맙습니다. 이상으로 부여 위례, 웅진, 사비시대 여행을 모두 끝 마치겠습니다. 대단히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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