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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애바다 Oct 19. 2024

부여  부소산성  낙화암  탐방

백제 사비성 부여시대(3), 관북리유적, 삼흥사 

부여 관광 안내도

   정약용 선생은 삼한 가운데 백제가 가장 강하고 문화가 발달하였다고 했다.(三韓之中 百濟最强最文, 강역고 疆域考)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 백제역사 유적지구 8곳(1), 비가 왔다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 백제역사 유적지구 8곳 (2)

   오늘(2024.10.03. 목, 개천절, 비 22도)은 백제의 마지막 수도 부여 사비성을 여행했다.


   백제의 수도 변천사를 잠깐 살펴본다. (금회, 굵은 선 사비성 탐방)

한성 위례성 BC 18~ AD 475 (1대 온조왕~21대 개로왕, 약 495년간, 73%, 2024.09.28. 방문)

웅진성      AD 475~ AD 538 (22대 문주왕~ 25대 무령왕 성왕 16년, 공주, 약 64년간, 2024.10.01. 방문)

사비성      AD 538~AD 660 (26대 성왕 16년~ 31대 의자왕, 부여, 약 123년간, 2024.10.03. 방문)

                * 무령왕 (웅진시대) : 경제적 안정 회복, 한성고토 회복 노력, 사비지역은 웅진의 생산기지 

                * 성왕 (사비성 천도) : 사비지역 본격 개발 천도(부소산성축조 후), 백제중흥염원(중앙 지방 불교교단등 개혁정치), 551년(성왕 29, 신라와 함께 고구려를 협공하여 70여 년 만에 한성고토 회복), 554년(성왕 32, 신라 배신으로 한강유역 상실, 관산성 전투에서 신라 매복병에 시해)


   부여(사비성) 탐방 순서는 다음과 같다. (굵은 글씨 금회 설명 순서)    

부여 버스터미널> 신동엽 시인 생가 및 문학관> 부여성당> 부여성당 신축부지 유물 발굴> 부여군청> 궁남지(포룡정)/서동과 선화공주/계백오천결사대 충혼탑> 화지산유적> 국립부여박물관> 정림사지 오 층 석탑/ 정림사지박물관> 관북리유적> 삼충사> 부소산성 낙화암   


   먼저 백제 부여 사비성의 방어 체계를 살펴본다. 적의 침입 시 1차 방어선은 증산성(백마강 건너 사비성의 북쪽), 청마산성(동), 석성산성(동남), 가림성(남)등 네 산성에서 저지한다. 2차 방어선은 수도인 사비를 방어하는 외곽성인 산지와 평야가 있는 동쪽 나성과, 북 서 남쪽에 흐르는 백마강(금강)이 맡는다. 3차 마지막 방어는 도성 내 위치한 부소산성이 맡는다. 낙화암은 부소산(96.4m)의 북쪽, 백마강에 접해 있다.

부여 관북리 유적 발굴 현장 / 발굴 관련 자료
유적의 형성 과정 / 건물지 출토 유물
관북리 유적

부여 관북리 유적

   박물관과 정림사지를 둘러보고 서둘러 관북리 유적지를 찾아 발걸음을 옮겼다. 역시나 백제의 수도답게 곳곳에 유적 발굴 중이라는 안내 간판이 울타리에 붙어 있었다. 신라의 수도 경주와 똑같은 상황이었다. 품격이 있다. 마을 곳곳이 유적지다. 


부여 동헌

   부여 현감이 공무를 보던 조선시대의 관아 중심 건물이다. 사비도성 가상체험관과 부여 관북리 유적지 사이에 있다.

부여 동헌
부여 내동헌 (현감의 살림집, 지금은 도강영당의 강당)
도강영당 창건략사 / 도강영당기

도강영당

   도강영당은 만전 홍가신(1541~1615), 미수 허목(1595~1682), 번암 채제공(1720~1799)의 영정을 모신 사당이다. 사비도성 가상체험관과 부여 관북리 유적지 사이에 있다.

사비도성 가상체험관(낮과 밤)

사비도성 가상체험관

   2015년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된 백제역사 유적지구 중 부여 지역의 문화재를 접할 수 있는 역사 문화체험 전시장이다. VR(가상현실)과 AR(증강현실), 홀로그램 등 다채로운 최첨단 기술을 활용한 전시콘텐츠를 관람할 수 있다. 1층에서는 백제문양을 채색하는 코너와 사비도성 전체를 볼 수 있는 모션인식 코너가 있으며, 2층에서는 부여전체의 모습을 VR로 체험할 수 있는 공간과 정림사로 시간여행을 떠나는 체험을 즐길 수 있다.(홈페이지 참조)


관북리 유적

   부소산 남쪽에 위치한 백제 왕궁터였다. 30년 넘게 발굴 조사 결과, 대형 건물지를 비롯 백제 사비 왕궁의 주요 시설을 확인하였다. 유적에서 대형 건물지, 대형 목각 수조, 지하 저장 시설, 연못, 도로 유구 등 왕궁과 관련된 시설의 흔적이 발견되었다. 연못에서 연꽃무늬수막새와 토기 귀걸이 철창 목간과 당나라 동전인 개원통보가 발견되었다. 

대형 전각 건물지 / 복원도

관북리 대형 건물지

   동서 35m, 남북 18.5m의 규모로 기와를 올린 2층 구조의 건물지다. 왕궁의 중요한 건물로 추정된다.

연못 / 건물지

연못

   동서 10.6m 남북 6.2m 장방형이다. 1~1.2m 땅을 파내고 가공된 석재를 5~6단 쌓았다.

도로

도로

   너비 8.9m 남북도로와 너비 4m의 동서 소로가 확인되었다. 체계적으로 계획된 도시의 증거다.

와적기단 건물지

와적기단 건물지

   백제시대 공예품을 만들던 공방시설이 있던 건물 터다. 9.5m*2.6m 규모다. 건물 기초는 암키와를 쌓아 올린 와적기단형태다. 그 위에 건물을 지었다. 건물터 안쪽에서 백제토기, 중국청자 조각이 발견되었다.

공방시설

공방시설

   백제 왕실 사용했던 금속등 공예품 공방 자리다. 금, 은, 구리, 철 등을 사용했다. 특히 순금에 가까운 좋은 품질의 금과 은을 섞은 합금을 다루었던 곳이다. 백제금동향로를 여기서 만들었던 곳일 수도 있다는 생각에 더욱 유심히 살펴보았다. 백제금동향로를 만들었던 탄생지라고 주장하고, 우기고 싶다. 사비시대 최고 품질을 만들었던 곳임에 틀림없다.

철기제작소

철기제작소

   철기를 다루던 철기제작소다. 철기를 다루던 흔적으로 불에 탄 흙바닥과 숯, 재를 비롯하여 쇠를 담금질하는 원통형 기구와 연결하는 수로, 노 등이 남아 있다.

석곽 창고

석곽 창고

   돌로 만든 창고다. 직사각형 구덩이를 판 다음, 작은 돌을 쌓아서 만들었다. 규모는 5.2m*1.8m다.

부소산문(매표소)안에도 관북리 유적(건물지 / 석축 등)이 있다

부여 삼충사(扶餘 三忠祠)

   백제 마지막 충신이었던 성충(~656), 흥수, 계백(~660)을 기리기 위해 지은 사당이다. 성충은 백제 의자왕 때 좌평으로 잘못된 정치를 바로잡기 위해 애쓰다가 투옥되어 식음을 전폐하고 죽은 충신이다. 마지막으로 "육로로는 탄현을 넘지 못하게 하고, 수로로는 기벌포를 넘지 못하게"하라는 유언을 남겼다. 


   흥수는 좌평으로 재직 시 투옥되었다. 나당연합군이 공격해 오자 백강 혹은 기벌포와 탄현을 지키라고 의자왕에게 간곡하게 당부하였다. 계백 장군은 신라 김유신장군의 5만 군이 황산벌로 쳐들어오자 5천 결사대로 싸우다 황산벌에서 장렬히 전사하였다. 금년(2024.10.01. 부여청년회의소 주관)에 삼충사에서 세 분에 대한 제를 올렸다.

삼충사
성충(좌평) / 흥수(좌평) / 계백 장군 영정

부소산성

   백제 사비시대 왕궁의 배후산성이다. 평상시에는 왕궁의 후원 역할을 하다가, 위급시에는 왕국의 방어시설로 이용되었다. 백제시대 전체 산성 길이는 외곽선 기준 2,495m이다. 바닥의 넓이 5~6m, 높이는 3m 내외이다. 부소산의 산정을 중심으로 쌓은 테뫼식, 포곡식 복합 산성이다. 백제시대에는 사비성, 소부리성으로 불렸다. 538년(성왕 16) 사비 천도 이전에 계획에 따라 미리 축조되었다.    

부소산성내부 위치도
부소산문 (매표소)
위례성 / 웅진성 / 사비성 시대별 재임왕 표지석 (부소산문 매표소 우측)


부소산성내 유적지

   부소산문 매표소를 통과하여 관북리 유적지를 둘러보고 산성으로 올라갔다. 유적지를 발굴 후 다시 흙으로 덮어 버렸다. 보존 목적이다. 보통 지식으로는 가름하기 어렵다. 다만 설명판의 설명을 근거 삼아 당시 상황을 상상하여 본다. 남문지 건물과 출입계단, 석축으로 보완했던 토성 흔적, 물길을 관리하던 수구, 성벽, 음식물을 저장하던 저장공, 왕실 혹은 병사들의 주거지 등등 많은 유적지가 있다. 현재도 발굴 진행 중이다.

남문지
토성 / 부소산성 수구
성벽
부소산성 저장공
부소산성 수혈 주거지와 구 유구(1)
부소산성 수혈 주거지와 구 유구(2)

   성안에는 백제 때의 건물터와 영일루(迎日樓)ㆍ사비루(泗沘樓)ㆍ고란사(皐蘭寺)ㆍ낙화암(落花巖) 등이 남아 있다. (아래는 설명 순서)    

부소산문> 삼충사> 영일루> 군창지> 반월루> 사자루> 백화정> 낙화암> 고란사> 태자숲길> 궁녀사     

영일루

영일루

   계룡산의 연천봉에서 떠오르는 해를 맞이하던 부소산 동쪽 봉우리에 있는 2층 누각이다. 동쪽에 청마산성과 나성을 살펴볼 수 있어 군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곳이었다.        

군창지

 군창지

   군창지는 1915년 불에 탄 곡식이 발견되면서 백제 시대 군량미 등을 보관하던 창고 터로 알려졌다. 지금은 건물의 초석들만 남아 있다. ㅁ자 형태의 건물 기단부가 확인됐다.


반월루

   부소산 서남쪽 언덕 위에 자리 잡은 누각이다. 부여읍의 전경을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다. 원래 수루가 있었다. 그 자리에 1972년 반월루를 세웠다. 부소산성의 옛 이름인 반월성에서 따왔다. 부소산성에서 백마강을 내려 바라봤을 때, 흐르는 모습이 반월을 닮았다. 

반월루에서 본 백마강과 부여 시내 전경

사자루

   부소산에서 제일 높은 곳에 위치하며 주변의 풍광을 즐길 수 있는 이곳은 원래 달맞이하던 송월대가 있었다. 건립당시 터를 파다가 광배 뒷면에 글씨가 새겨진 금동석가여래입상(보물 제196호)이 발견되어 현재 부여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사자루
사자루 중수기

백화정

   백마강을 내려다볼 수 있는 낙화암 정상 바위 위에 육각 지붕으로 세워진 정자다. 백제 멸망 시 낙화암에서 꽃잎처럼 떨어져 죽음으로 절개를 지킨 백제 여인들을 추모하기 위해 1929년 부풍시사라는 시모임에서 건립했다.        

백화정 / 백화정기

낙화암

   낙화암은 부소산 북쪽 백마강을 향해 우뚝 서 있는 큰 바위다. 바위는 50m 높이의 절벽을 이루며 강물에 이르러 한 번 꺾인 단이 있다. 이 암벽에 송시열이 낙화암이라고 쓴 글씨가 새겨져 있다. 삼국유사에 백제 멸망 때 궁녀들이 남의 손에 죽지 않겠다며 백마강에 몸을 던졌다. 타사암(墮死巖)이라고 불렀다. ‘떨어질 타(墮)’에 ‘죽을 사(死)’자다. 후세에 궁녀를 꽃에 비유하여 낙화암으로 불렀다. 


   궁녀사에서 당군에 내몰려 이곳까지 온 궁녀님들의 처지를 생각하니, 괜스레 슬퍼졌다. 돌아갈 집도 없다. 해가 넘어갈 시간이다. 꽃게의 알, 아기들처럼 잠잘 시간이다. 벗어 놓은 버선과 신발이 상상된다.

낙화암(1)
낙화암(2)
낙화암(3) / 고란사 극락보전 벽에 그려진 그림(삼천궁녀가 백마강으로 뛰어 내리는 장면, 문화일보 참조)

고란사

   낙화암에서 조금 떨어진 아래 백마강가 절벽에 위치해 있다. 낙화암에서 떨어져 죽음으로 절개를 지킨 백제 궁녀들을 추모하기 위해 지었다. 고려시대에 건립되었다. 고란사 뒤 고란약수가 유명하다. 마시면 한 잔에 3년이 젊어진다.      

고란사 / 고란사 뒤 약수터(극락보전 측면에 궁녀님들의 당시 상황 그려져 있음)
범종각 / 극락보전

백마강과 유람선

   백마강은 백제에서 제일 큰 강이란 뜻이다. 규암면 호암리 천정대에서 세도면 반조원리까지 16km의 금강이다. 백제는 기슭을 따라 흐르는 백마강 뱃길을 통해 넓은 서해로 나아가 중국, 일본 등과 교류하였다.  

백마강 유람선 선착장 / 안내표지

태자골 숲길

   백제 태자들의 산책로로 추정된다.  낙화암 고란사를 둘러보고 올라 오니, 점점 어두워졌다. 그때 탐방로 주변에 전등이 일제히 켜졌다. 태자 숲길은 나무숲이 우거져 캄캄해졌다. 부소산성 숲길은 전쟁이 없는 평시에는 정원이었고, 왕자들의 휴식처로 활용되어, 태자골이라고 불렸다.

태자골 숲길 (멀리 궁녀사가 보인다) / 태자숲길
태자골 숲길

궁녀사

    부소산 낙화암과 궁녀사는 일부러 제일 마지막으로 가봤다. 저녁때, 여행자의 고독감과 낙화암에서 백마강으로 몸을 던지는 궁녀들의 절망감을 몸소 느껴 보기 위해서였다. 종일 비가 부슬부슬 내렸고, 달도 없었다.


   부소산 낙화암 탐방을 하고 올라와 언덕을 넘어갔다. 궁녀사와 태자숲길을 돌아 나올 때는 캄캄한 밤이 되었다. 인적이 끊겨 자꾸 뒤를, 주위를 돌아보게 되었다. 나와 궁녀와 태자의 절대 고독 시간이었다. 궁녀사 문 밖의 빨간 꽃무릇과 그 주변에 낙화된 하얀 무궁화가 궁녀와 태자였다. 궁녀사 경내에는 불이 꺼져 있었다. 그리고 문도 굳게 닫혀 있었다.


   다행스럽게도, 궁녀님 추모 행사(2024.10.04 금, 11:00, 부소산 궁녀사, 부여군 여성단체 연합회 주관)가 열렸다. 방문 일시가 맞았었더라면, 큰 절이라도 두 번 올려 드렸을 것이다. 

궁녀사
꽃무릇과 낙화된 무궁화



성왕상 / 부여 야경

<참고 자료>

-. 부소산성 팸플릿(부여군시설관리공단)

-. 삼충제 팸플릿 (부여군)

-. 관북리유적과 부소산성(백제세계유산센터)

-. 여기가 부여다 팸플릿(부여군, 부여문화원 발행)


   긴 글 읽어 주셔서 대단히 감사합니다. 이어서  다음회에는 백제문화 단지, 부여왕릉원, 부여 나성에 대하여 글 올리고 부여 사비시대 여행을 끝 마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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