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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애바다 Oct 27. 2024

아차산  탐방

고구려 바보 온달과 평강공주를 찾아서

아차산 등산로(1)

     해외 근무 10년 이상 생사고락을 같이 했던 선배 및 동료들(4명)과 봄가을 매년 2회 정기 모임을 가지고 있다. 올해 봄은 부산 해운대에서 동료의 아들 결혼식 참석으로 대신했었다. 임진왜란시 왜군의 최초의 침공 경로(태종대, 부산진성, 동래산성)가 정말 궁금하여 결혼식 전 후 짬을 내어 급하게 돌아보고 글을 올렸었다.

   이번 가을 등산장소는 서울 광진구와 구리시에 걸쳐 있는 아차산(阿且山, 2024.10.12. 토, 맑음, 20도)으로 정했다.


   아차! 에 얽힌 전설은 들어서 이미 알고 있었다. 백제 고구려 신라 3국이 한강유역의 아차산을 둘러싸고 벌인 쟁투에 흥미가 있어 기대가 컸다. 주요 관심은 고구려 병사들이 근무했던 20여 개 보루에서 만주 벌판을 호령하던 성곽의 형태를 보고 싶었다. 백제 고구려 신라 병사들이 아차산성에서는 어떻게 생활했을까 궁금했다. 또 대성암 대웅전 뒤 바위 구멍에서 쌀이 쏟아져 나왔다는 전설을 확인하는 일이었다. 온달 장군과 평강공주가 마셨다는 온달샘, 온달 장군 얼굴을 닮았다는 큰 바위얼굴을 직접 보고 싶었다.

평강공주와 온달장군 (아차산 입구, 출처 나무 위키)

   고구려 정에 올라 한강을 바라보며 고구려 장군 온달의 기백을 직접 체험하고 싶었다. 고구려 영양왕 때, 온달 장군은 신라에게 빼앗긴 한강 이북의 옛 고구려 땅을 다시 찾아오겠다면서 출정했다. 그때 온달 장군은 아내 평강공주에게 만약 계립현(鷄立縣, 문경, 새재 인근)과 죽령(竹嶺, 경상도와 충청도 경계, 충북 단양군) 이서 지역을 되찾지 못한다면 다시 고구려로 돌아오지 않을 것이라고 맹세했다. 그러나 온달 장군은 아단성(阿旦城, 아차산) 아래에서 신라군과 싸우다가 화살에 맞아 전사(AD 590, 영양왕)했다.


   전사한 온달 장군의 시신을 담은 관이 움직이지 않자, 평강공주가 직접 찾아와  "죽고 사는 것은 하늘이 정한 일이니 그만 돌아가자"라고 하자 비로소 온달의 시신을 담은 관이 움직였다고 한다. 삼국사기 열전 편에 평강공주와 온달장군의 이야기가 전기 중에서는 제일 길다고 한다. 저자 김부식 선생이 의(義)를 중시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멀리 경남에서 06:00 출발하여 4시간 동안 고속버스를 타고 올라온 동료를 아차산역에서 11:00 경에 만났다. 선배의 차로 고구려 대장간 마을로 이동했다. 코스는 올라갈 때는 간간이 바위를 타야 하는 좀 험한 코스로 안내되었다.


   역시나 차내에서 그동안 밀린 이야깃거리가 쉴 새 없이 쏟아져 나왔다. 남자들도 넷이 모이면 승용차 지붕이 열리거나, 바퀴가 춤을 추는 수가 있다. 그러나 이제는 가끔씩 지인들의 안타까운 소식이 날아들기도 하여 불게 물든 저녁노을 처럼  쓸쓸해진다. 매달려 있는 단풍처럼 '그만 돌아가야'함을 아는 철이 들었다. 더욱 건강을 염려해야 할 나이임을 실감한다. 순응하는 수밖에 없다.


   아차산은 이야깃거리가 많다. 백제의 개로왕이 장수왕의 공격으로 아차산 근처에서 전사하였다는 설도 있다. 온달장군이 신라와의 전투에서 전사하였다는 곳이기도 하다. 한강유역을 둘러싸고 3국이 서로 뺏고 뺏기는 치열한 경합지역이었다. 서울과 구리시에 걸쳐 있는 아차산(해발 295.7m)을 40분 정도 오르면 한강과 한강다리 3개 이상을 한꺼번에 맨눈으로 볼 수 있다. 특히 한강 건너 백제의 첫 수도였던 하남 위례(풍납토성과 몽촌토성) 일대가 보인다. 요충지임에 틀림없다.


   잠실, 남산, 북한산과 도봉산까지 360도 파노라마로 볼 수 있다. 조선 시대에는 지금의 봉화산을 포함하여 망우리 공동묘지 지역과 용마봉 등의 광범위한 지역 모두 아차산으로 불렀다.


   고구려 장수왕의 공격으로 풍납토성과 몽촌토성이 함락되어, 결국 웅진으로 긴급 천도(문주왕)하였다.  한강 패권을 거머쥔 고구려는 아차산 일대에 20여 개의 보루를 설치하여 방어 기지를 탄탄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신라와 백제는 동맹을 맺어 고구려를 한강유역에서 축출하였다. 백제가 겨우 3 년간 차지하였었지만, 신라의 배신으로 동맹은 깨졌다. 결국 마지막으로 신라의 지배권하에 들어갔다.


  아차성(阿且城), 아단성(阿旦城), 장하성, 광장성 등으로 불리기도 하여 백제, 신라, 고구려가 한강을 중심으로 공방전을 장기간에 걸쳐 벌였던 것을 알 수 있다.


오늘 아차산 탐방은 다음 순서대로 하였다.

아차산역(5호선)>고구려 대장간 마을 출발> 아차산 큰 바위 얼굴(온달 바위)> 돌무덤(석굴 형, 고구려군 초소)> 개 얼굴 바위(충견 바위)> 경사진 통바위 오르기(점심)>등산로 진입> 아차산 3보루(아차산 정상)>아차산 4보루> 아차산 6보루> 아차산 2보루> 대성암> 고구려정> 아차산성> 해맞이 광장>온달샘(고구려 온달장군과 평강공주, 약수터)>생태놀이 학습장> 주차장> 고구려 대장간 마을 도착


아차산의 주인을 잠깐 큰 틀에서 추정하여 본다.  물론 중간중간에 끊임없이 주인이 바뀌었을 것이다.

백제 : 한성 위례성 BC 18~ AD 475 (1대 온조왕~21대 개로왕, 약 495년간)

고구려 : AD 475(장수왕)~ AD 551 (76년간)

백제 :   AD 551(성왕, 신라와 동맹 고구려 협공)~AD 554(성왕), 3년간

신라  :  AD 554(신라의 배신)~

구리 둘레길 (탐방 구간 : 고구려 대장간 마을~아차산 제4보루)
고구려 대장간 마을
구리 9경(고구려대장간 제3경)
고구려 대장간 마을 안내 / 주요 이벤트

고구려 대장간 마을

   고구려 대장간 마을은 아차산 제4보루에서 발견된 간이 대장간을 근거로 제작한 곳으로, 철기 문화를 바탕으로 한 웅장한 시설과 섬세한 소품들을 재현하였다. 전시관과 야외 체험장으로 구성되어 있고, 전시관은 아차산 보루 고구려 유적에 대해 이해할 수 있도록 패널과 토기, 철기 등의 유물을 전시하고 있다. 매년 특별전을 기획하여 고구려인들의 생활상을 주제별로 선보이고 있다.  야외 체험장은 지름 7M의 물레방아가 가동하는 대장간을 중심으로 고구려의 주택과 마을을 재현하여 독특한 분위기를 연출한다. 이곳은 태왕사신기(2007), 선덕여왕(2009)등 인기 드라마 촬영장소로 활용되었다. 와당 만들기, 삼족오 문양 그리기 등 상시체험마당과 경당에서 운영하는 기획체험행사등 고구려의 역사와 문화를 배우고 학습하는 공간으로 이용되고 있다.  (고구려 대장간 홈페이지)             

아차산 큰바위 얼굴 (온달 큰바위 얼굴)

아차산 큰 바위 얼굴

   아차산에는 기암괴석이 수 없이 많은데, 그중에 사람을 닮은 큰 바위얼굴이 있어 아차산의 새로운 명소로 꼽힌다. 커다란 눈과 코, 그리고 지긋이 다문 입 모양과 머리카락을 휘날리는 역동적이고 생동감이 넘친다.  

  

   고구려대장간 마을을 건립하고 태왕사신기촬영 무렵 발견한 사람형상 바위다. 태왕사신기에서 광개토태왕역으로 열연한 배용준을 고구려 대장간 마을 촬영 중에 발견되었다. 배용준과 닮은 것 같기도 하다. 나는 오늘 글의 주인공 온달 장군을 닮았다고 우기고 싶다. 실재 이 바위가 있는 곳은 풍수지리학적으로 기를 받는 곳이라고 한다.                 

석굴(고구려 병사 초소)

고구려 병사 근무 초소, 석굴, 돌무덤, 고인돌, 임시피난처, 단독 바위 주택?

   이름 혹은 용도와 만든 시기가 몹시 궁금했다. 고구려 병사들 초소로 적격이다.(고구려 병사 근무 초소) 어떤 효자가 돌아가신 부모님을 모신 돌무덤일까? 천둥번개 중부상으로 이동 불가하거나, 산중 고립 시 석굴 속에서 하룻밤 정도는 보낼 수 있을 것 같다.   

개코 바위 (충견 바위)

개 코 혹은 원숭이 코 혹은 돼지 코 바위?     

   어떤 석수장이가 혹은 고구려 군 병사들이 장난을 했을까? 수고스럽게도 두 눈과 코를 절묘하게 조각해 놓았다.  자세히 보면, 코 우측에 흐릿하지만 사람형상이 보인다. 충성스러운 개를 못 잊어 자신과 충견(개)을 조각한 석수장이 본인의 얼굴이 아닐까? 이런 경우, 먼저 이름 붙이는 사람이 임자다. 개코 바위 (충견 바위)다.        

암벽 타기 코스

통바위(암벽) 등산 코스

   곧이어 험준한 바위 타기가 시작되었다. 동네 뒷산 오르는 마음으로 올라가다가는 큰코다친다. 그래서 조금 전에 보았던 코가 그려진 개코 바위가 사전에 경고한 것일 것이다. 가파르다. 비나 눈이 오는 날은 반드시 피해야 할 코스다.      

한강과 다리

한강 다리 4

   멀리 한강과 한강 다리가 4개나 시원하게 보인다. 풍납토성 몽촌토성 방향도 조망할 수 있다. 즉, 고구려군 보루에서 백제군 혹은 신라군의 움직임을 한눈에 파악할 수 있는 위치다.    

아차산 일대 보루군

아차산일대 보루군

   아차산은 용마산과 망우산등 주변 산지와 연결되어 있고, 조선시대까지는 이 모두를 아차산이라고 불렀다. 아차산에는 능선을 따라 작은 봉우리마다 보루라고 하는 군사유적이 있다. 보루란, 적의 움직임을 살피기 위해 주로 산꼭대기에 만들어진 요새다. 점령지로서 일반인이 거주했던 산성과 달리 교통로 확보를 위해 주변 전망과 감시를 주로 하는 곳이었다. 여러 개가 조를 이루고 있다.    

 

   아차산의 보루들은 삼국시대 고구려가 만든 것으로, 475년 (장수왕 63년) 고구려가 한강 유역에 진출한 후 551년 신라와 백제 동맹군에 의해 물러날 때까지 사용되었다.  삼국시대 한강 유역은 백제와 신라에게는 중국과 교류할 수 있는 교통로로서 매우 중요하였다. 4세기 중반 이후부터 남진정책을 펼치던 고구려에게도 한강 남쪽 공략을 위해 반드시 확보해야만 하는 전략적 요충지였다.


   아차산에 산재한 약 20여 개의 보루들은 각각의 위치에 따른 저마다의 기능이 있다. 가장 북쪽의 수락산 보루에서는 남쪽의 아차산 일대가 잘 보이며, 임진강 유역으로부터 양주분지, 중랑천, 한강 유역에 이르는 교통로를 감시하기에 적당하다. 망우산 보루에서는 북쪽 의정부에 이르는 길목까지 볼 수 있고, 용마산 보루들은 중랑천 일대를 방어하기에 적당하며, 아차산 줄기의 보루들은 왕숙천변을 방어하기에 유리하다. 한강변의 낮은 구릉에도 지금은 사라졌지만, 구의동 보루와 자양동 보루가 있어 아차산 일대와 한강변 평지를 조망할 수 있다.  (인터넷 사전)        

아차산 제 3 보루(아차산 정상)/제 3보루 주요 시설물(석축, 건물지, 계단, 단야시설, 배수시설, 성벽, 저장시설,방형석단,외곽석축)
3보루 주요 시설물(석축과 방앗간, 방앗간 상세, 내려다본 방앗간, 석축, 계단, 보축과 출입부) / 아차산 제 3 보루 접근 통로(2)
아차산 일대 보루군 출토 유물

아차산 일대 보루군 출토 유물     

   구의동 보루(철솥 시루), 시루봉 보루(유개합), 홍련봉 1보루(연화문와당, 철모), 홍련봉 2보루(경자명 접시, 철제 집게), 아차산 3보루(장동호, 양이부호), 아차산 4보루(명문접시, 연통, 철주 복발, 쇠스랑), 용마산 2보루(대옹, 원통형4족기, 호자, 철제 찰갑)등이 출토되었다.  

    

아차산 3 보루(295.7m, 아차산의 정상)

   천신만고 끝에 암벽을 타고 올라 아차산 3보루가 있는 통행로로 올라왔다. 암벽 등반 후 점심을 먹었다. 주최 측 선배가 점심으로 모두를 위해 초대형 피자를 준비했다. 또 다른 선배는 따끈따끈한 커피를 보온통에 넣어 짊어지고 왔고, 초생란 계란까지 삶아 가지고 왔다. 각자 준비한 과일과 음료수를 나누어 먹었다. 귤 한 녀석이 데굴데굴 굴러 바위 아래로 내려가는 바람에 한동안 소동이 있었다.


   아차산은 주변의 용마봉(34m), 망우현(282m)을 함께 부르는 표현이었다.  요즘은 아차산, 용마산, 망우산으로 나누어 부른다. 아차산 3보루를 아차산 정상이라고 부른다. 아차산 3보루는 국가지정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아차산 일대 보루군 17개 중 한 개소이다. 일부 구역이 발굴조사되었을 뿐 대부분 조사되지 않았다. 지면 아래에는 삼국시대 군사들의 생활 시설인 여러 개의 건물지와 온돌, 배수로와 석축 성벽이 남아 있을 것이다. 발굴조사를 통하여 석축과 방앗간, 계단, 보축과 출입부를 확인했다.     

아차산 4보루(1)
아차산 4보루(2)
아차산 4보루(3)
아차산 4보루(4) / 유구배치도
아차산 4보루(5) 치/ 출토 유물


유구 배치도 / 문지
저수시설

아차산 4보루

   아차산 보루 중에 제일 넓고 소규모 성곽 정도로 규모가 크다. 고구려는 삼국시대의 전략적 요충지였던 한강유역에 20여 개의  보루를 만들어 남진 정책의 전초기지로 활용하였다. 아차산 일대의 보루는 475년 고구려(장수왕 63년)가 한강 유역에 진출한 후 551년 신라와 백제에 의해 물러날 때까지 사용되었다. 4보루도 토기형태와 목탄의 연대측정결과, 5세기 후반부터 6세기 중반 사이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4보루는 크게 성벽과 건물터로 구성되어 있다.


   둘레 240m의 성벽은 지형의 경사면을 이용하여 바깥, 면을 돌로 쌓음과 동시에 안쪽 경사면은 뒤채움돌과 흙으로 다져 메우는 식으로 만들었다. 외부 감시와 침입하는 적을 방어하기 유리한 곳에 치를 설치하였다. 독특한 구조의 남쪽 이 중 치는 출입구로 추정되며, 고구려 성 쌓기의 전형이다.


   성의 안쪽의 건물터는 병사들과 생활에 필요한 온돌과 배수로, 저수조 등이 배치되어 있다. 이곳에서 항아리, 명문접시, 시루등의 그릇과 투구, 철갑, 창, 토기, 화살촉등의 무기, 낫, 쇠스랑등의 농기구, 자갈, 등자 등이 발견되었다.   


   건물 벽체, 온돌, 배수로, 목주열, 저수조, 건물터는 문화재 보존을 위하여 복토하였다. 치는 성벽에 접근하는 적을 옆에서 공격할 수 있도록 성벽 일부를 돌출시켜 만들었다. 치와 치사이의 간격은 각 치의 양쪽 성벽이 사정거리 안에 들어올 수 있도록 했다. 치는 외적을 방어하는 성벽의 대표적 시설로서 삼국시대부터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 대부분의 성에서 확인되고 있으며, 이곳 4보루에는 5개가 설치되었다.     

      

   저수조, 배수로가 남아 있다. 성벽을 쌓으면서 내부에는 저수조를 만들고 성내의 물이 빠져나가도록 배수로를 설치했다. 건물지 내부에는 ㄱ자 모양의 온돌을 설치했다. 치는 고구려성에서 치와 치사이의 거리는 화살의 유효사거리 내에서 적을 공격할 수 있도록 80m 정도의 간격을 유지했다. 그러나, 고구려 보루에서는 치 사이의 간격이 매우 좁다.


   아차산 4보루에는 5개, 홍련봉 2보루에는 7개가 있을 정도로 치의 수가 많다. 이는 치가 방어의 기능과 함께 성벽이 무너지는 것을 방어하는 보강구조물의 기능을 하였다는  의미 한다.   

       

    출토유물은 시루, 장동호, 등자와 재갈, 투구등이다. 치는 5개였다. 목책, 건물지, 저수조, 성벽이 발견되었다. 저수조는 식수확보를 위하여 4보루에 2개소 설치되었다. 깊이 3.5m 수직, 바닥 벽면에는 입자가 고운 회색 뻘흙을 발라 방수층 만들었다. 지금은 되메우고 흙으로 돋우어 위치를 표시했다.                    

아차산에서 바라본 서울 / 아차산 6보루

아차산 6보루     

   아차산 3보루에서 남쪽으로 200m 떨어진 지점이다. 3보루에서 디딜방아의 흔적인 불씨를 발견한 발굴참여자 중 한 명이 발견했다. 발굴조사되지는 않았다. 등산로 한가운데 있었던 보에 흙이 파여 드러났다. 둘레는 80m이고 불씨는 흙을 덮어 보존하고 있다.       

지금은 그리움의 덧문을 닫을 시간 (류시화 시인)

지금은 그리움의 덧문을 닫을 시간

류시화  

   

세상을 잊기 위해 나는

산으로 가는데

물은 산아래

세상으로 내려간다


버릴 것이 있다는 듯

버리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 있다는 듯

나만 홀로 산으로 가는데     

채울 것이 있다는 듯

채워야 할 빈자리가 있다는 듯

물은 자꾸만

산아래 세상으로 흘러간다  

   

지금은 그리움의 덧문을 닫을 시간

눈을 감고

내 안에 앉아

빈자리에 그 반짝이는 물 출렁이는 걸

바라봐야 할 시간

아차산 2보루(2)
암벽 구간

아차산 2보루     

   아차산 능선에서 동쪽으로 뻗어 나온 작은 봉우리(276.2M)에 있다. 둘레길이 약 50M로 추정되는 작은 보루다. 한강 남쪽을 관찰하기 좋고, 동쪽은 암벽으로 형성되어 있어 방어에 유리하다. 아직 발굴조사되지 않았으나, 고구려 토기의 전형인 몸통 긴 항아리 조각들이 발견되었다.     


대성암     

대성암 종각/ 대성암 대웅전
대성암 쌀 바위

대성암 쌀 바위

   대성암 자리는 신라의 의상대사가 도를 닦던 곳이었다. 그때  많은 사람들이 가르침을 받으려 왔으며, 수도 자리 뒤의 바위에서 쌀이 나와 많은 사람들에게 공양할 수 있었다.  그런데 밥을 짓는 사람이 하늘에서 내려준 천공미를 좀 더 얻고자, 욕심을 내어 바위 구덩이를 더 넓히려고 하자, 쌀이 하나도 나오지 않고, 쌀뜨물과 타버린 쌀이 수삼일 동안 나오다가 멎었다. 그 뒤로는 다시는 쌀이 나오지 않았다.   

대웅전 벽화(소를 얻다/자기의 본성인 소를 찾다 /중생제도를 위하여 거리로 나간다)
삼성각
아차산 유래

아차산 유래

   옛날 삼청동에 점을 잘 치는 용한 점쟁이가 있어, 임금이 그 사람을 불러들였다. “네가 점을 잘 친다고 하니 한번 쳐봐라”하고는 통속에 쥐 한 마리를 감춰 놓고 “이안에 있는 쥐가 몇 마라 있느냐?”하고 물었다. 이에 점쟁이는 세 마리가 들었다고 대답했다. “나쁜 놈!” “한 마리가 들어 있는데 세 마리가 들어 있다고 하니 이놈을 죽여 버려라”하고 임금이 말했다. 병사들이 달려들어 그 점쟁이를 붙잡아 나갔다.


   그 후 임금이 이상해서 쥐를 잡아 배를 갈라보니 새끼가 두 마리 있었다. 그래서 임금은 병사를 형장 보내 그 점쟁이를 죽이지 않을 것을 명령했다.  급한 전령이 달려가면서 죽이지 않도록  손을 들어 신호를 보냈다. 사행집행인인 망나니가 손을 들어 표시하는 것을 빨리 죽이라는 것으로 오해를 하고, 목을 쳐버렸다. 그래서 “아차“라는 말이 나왔다고 한다.  

숲 속의 황혼

숲 속의 황혼

황금찬

     

하루가 저무는 숲 속에

발을 멈추고 섰다

소란한 계곡에서

새 한 마리가 날아와

내 머리에 앉았다

청자빛 부리로 내 머리카락을

물어 당긴다

새가 물었다 놓은 머리카락은

가을 구름으로 변해 가고 있다.    

고구려 정 건립 연혁

고구려 정 건립 연혁

   광진구 아차산은 고구려 백제 신라 고대 삼국시대의 치열한 각축장이었다. 1984년 콘크리트 건축구조물로 팔각정을 건립하였다. 노후화로 건물전체가 기울어져 2008년 1월 철거하고 남한 최대의 고구려 유적 유물이 산재한 이 터에 고구려 연구 역사학자들의 고증과 자문을 거쳐 2009년 2월에 착공, 같은 해 9월에 준공하였다. 명칭을 팔각정에서 고구려정으로 변경하였다.


   고구려정의 기둥은 기둥가운데 부분이 볼록한 고구려 전통양식의 배흘림식으로 하였다. 자재는 300년 이상의 금강송으로 하였고, 기와는 고구려 궁궐 안학궁터와 아차산 홍련봉보루에서 출토된 기와의 붉은 색상과 문양을, 단청 문양은 쌍영총과 강서중묘 등 고구려 고분벽화에서 표현된 문양을 참고하였다. 남한에서 최초로 고구려 당시의 건축양식을 재현했다.


   이 고구려정과 아차산성 및 송파구의 한성백제박물관, 강동구의 암사선사유적지와 연계하여 문화유산 보호와 관광상품화, 지역경제 활성화에 기여할 것이다. 고구려정 터에서 왕성한 기를 받을 수 있다.     

고구려 정
낙타고개와 아차산성


아차산성 / 망대지


망대지

-. 아차산성 망대지 일대 모습, 발굴조사 전 후, 복원정비 후 모습

-. 아차산성 망대지 일대 방대형 시설, 후망대지 일대 북서쪽 외성벽 및 보측성벽, 남동쪽 외성벽 및 보측성벽, 내성벽 발굴조사 후 모습


아차산성 망대지 일대 출토유물

    연꽃무늬 수막새, 북한산성 명 기와 조각, 청동기와 조각, 철제 말, 개원통보, 삼각침선무늬 토기조각, 궆다리접시, 궆접시, 줄무늬병, 뚜껑 달린 굵은 목 단지

아차산성(1)
아차산성(2) 출입 제한 안내

아차산성

   아쉽게도, 붕괴위험으로 내부 진입이 불가하다는 위험표지판이 걸려 있다. 삼국사기에 아차산성은 아단성 혹은 아차성으로 기록되어 있다. 또한 286년(책계왕 원년)에 수리하였다는 기록으로 보아 그 이전에 쌓았다고 한다. 396년에 고구려 광개토대왕이 이성을 빼앗았다. 475년 백제 개로왕이 이성아래서 죽었다는 기록이 있다. 1997년과 1999년에 성벽과 성내부에 대한 조사가 부분적으로 이루어졌다. 아차산성은 부정 육각형의 포곡식 산성으로 둘레는 1km가 조금 넘는다. 성벽은 7m가량이며, 안팎 잘 다듬은 돌로 쌓았다.


   성벽 바깥쪽 기저부는 별도의 보강성벽을 쌓은 후 흙으로 다져서 덮었다. 해발 203m의 북쪽 모서리 가장 높은 곳에는 장대가 설치되어 있고, 동 서 남쪽에는 문지가 남아 있다.  계단상 지형을 이루고 있는 성 내부에서 여러 기의 건물터와 연못, 우물, 배수지 등이 확인되었다. 처음 백제가 수도 간성 방어를 위하여 쌓았으나, 나중에 고구려와 신라가 이용하였다. 현재 남아 있는 성벽과 시설물들은 7세기 이후 신라가 축조한 것이다. 이성은 한강유역을 둘러싼 3국 각축을 보여 준다.

망대지 일대 주요 유물  

-. 연꽃무늬 수막새, 북한산성 명 기와 조각, 청동거울 조각, 철제 말, 개원통보, 삼각집선무늬 토기조각, 굽다리접시(단각고배), 굽접시(대부완), 줄무늬병, 뚜껑 달린 곧은 목 단지(유개직구호)     

-. 남벽 일대 주요 유물(2015~2018) : 상층 출토 유물, 하층 출토 유물     

-. 시굴조사 주요 유물(1999) : 연화문와당, 토우,   각병, 고배, 고배. 고배, 삼족정

해맞이 광장

고구려 온달장군과 평강공주

   고구려 평원왕(25대) 때 안학궁 주변에 살던 온달은 몹시 가난하고 앞을 보지 못하는 어머니를 봉양하며 살았지만, 늘 밝고 명랑하여 사람들이 바보 온달이라 불렀다. 평원왕은 어려서부터 자주 울던 자신의 딸 평강공주에게 다 크면 바보온달에게 시집보낸다고 으름장을 놓곤 했는데, 훗날 공주가 자라 다른 집안에 시집을 보내려고 하자 평강공주는 이를 거부하고 궁을 나와 온달을 찾아갔다.


   공주는 온달에게 말 고르는 법과 무술 등을 익히게 하였고 온달은 공주의 도움을 받아 고구려의 제천행사에서 큰 두각을 나타내어 왕의 눈에 띄게 되었고, 북주와의 전쟁에서 고구려군을 이끌고 큰 승리를 거두었다. 이후 온달은 신라군과의 전쟁에서 고구려군을 이끌고 큰 승리를 거두었다.  

   

   이후 온달은 신라군과의 전쟁도중 아차산에서 전사하였다. 온달의 시신을 담은 관이 움직이지 안자, 사람들은 땅을 되찾아 돌아오겠다는 평강공주와의 약속을 지키지 못한 것이라 여겨 평강공주를 모셔왔다. 평강공주는 온달의 관을 어루만지며 돌아가자고 말했고, 이내 관이 움직여 온달의 시신을 평양으로 옮길 수 있었다고 한다.

온달샘

온달 장군과 평강공주가 사랑을 나누며 마시던 샘물이다. 한번 마시면 3년은 수명이 더 연장된다.

둘레길 생태놀이 학습장
아차산 암벽 /주차장
고구려 대장간 마을 / 아차산 용마산 망우산 시루봉 일대 지도 / 쭈꾸미 전문 식당

   


   뒤풀이는 주꾸미 요리 전문 식당에서 식사를 했다. 식사 후 선배는 워커힐 경내를 일순하며 마지막까지 풀 서비스를 해주었다. 다음 내년 봄을 기약하며, 서로의 행운과 건강을 빌며 마무리했다.


<참조>

-. 각 구간의 설명판

-. 인터넷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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