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령 대가야 강역도(5~6세기 전반) 대가야읍(옛 고령읍, 행정구역 명 변경) 지도 가야가 몹시 궁금했다. 그중에서 고령 대가야를 탐방하고 싶었다.
작년 말에 신라 경주를 방문했었다. 그리고 올해 10월에 백제 위례(풍납토성, 몽촌토성) 웅진(공주) 사비(부여)를 탐방했었다. 시월 말경에 고구려의 흔적이 조금 남아 있는 아차산을 올랐었다. 어떤 이는 한국 고대사 구분을 3국 시대가 아니라, 가야를 추가하여 4국 시대이라고 부르는 것이 마땅하다고 한다. 과연 그럴까?
오늘(2024.11.02, 토, 오전 비, 20도)은 경북 고령의 대가야를 탐방했다. 서울에서 경북 고령까지 가는 고속버스 노선은 남서울터미널에만 있다. 토요일 첫차(07:50 출발) 좌석은 이미 매진되어, 일요일 첫차로 예약을 해두었다. 그러나, 금요일 이른 아침에 누군가가 포기한 1석을 발견, 매의 동작으로 찰나에 거머쥐었다.
대가야 건국 신화 옛날 고령 개진면에 이모댁이 있어 초등학교 여름방학 때 한 번 며칠 놀다 왔었다. 중학교 때는 고령 우곡에서 배를 타고 낙동강을 건너 통학하였던 몇몇 친구들이 있었다. 그중에 머리를 양 갈래로 땋은 예쁜 여학생이 하나 있었다. 여름 장마 때는 낙동강물이 불어 장기 결석이 공식적으로 허락된 친구들이 부러웠다. 그때는 강을 건널 수 있는 다리도 없었고, 관심을 가질 만큼 여유도 없었다. 역사지도를 보니, 낙동강 건너 고령이 대가야 지역이었고, 내가 살던 곳이 신라 지역이었다. 좀 억지스러운 주장을 하자면, 그 친구들은 매일 배를 타고 대가야에서 신라로 통학했던 귀한 유학생들이었다.
고령 대가야 탐방 후 소감은 여건과 지형, 규모가 공주의 공산성과 매우 유사하였다. 애정을 가지고 추천드린다. 학계와 정부는 좀 더 많은 연구 인력과 물자를 투자하여 공주의 공산성 정도로 4대 문, 내 외성 성곽 복구 등 유적지를 발굴 복구하여 대가야의 면모를 하루빨리 보여주었으면 좋겠다. [공주 공산성 참조 : https://brunch.co.kr/@jylee2020/188 ]
고령 지산동 고분군 가야 고분군(Gaya Tumuli)이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2023.09.24.)되었다. 가야고분군은 1~6세기에 걸쳐 한반도 남부에 존재했던 가야를 대표하는 7개 고분군이다. 모두 구릉지대에 있다. 즉, 지산동 고분군(경북 고령군 대가야읍), 대성동 고분군(경남 김해시), 말이산 고분군(경남 함안군 가야읍), 옥전 고분군(경남 합천면 상책면), 송악동 고분군(경남 고성군 고성읍), 유곡리와 두락리 고분군(전북 남원시 인월면과 아영면), 교동과 송현동 고분군(경남 창녕군 창녕읍)을 통 털어 그렇게 부른다.
대가야 산성 방어망 가야는 고대국 삼한의 하나였던 변한에서 출발했다. 여러 가지 설이 있지만, 가야는 여섯 가야(대가야, 금관가야, 아라가야, 소가야, 성산가야, 고령가야)의 연맹체이다. 전기에는 김해의 김관가야(532년, 신라 진흥왕에 병합), 후기에는 고령의 대가야(562년, 멸망)가 주도권을 쥐고 있었다. 대가야 박물관을 방문할 때 깜짝 놀랄 일을 발견했다. 대가야 왕릉군중에서 고분 44호가 제일 큰데, 그 속에서 순장자 44명분의 무덤 구덩이를 발견했다고 한다. 놀라운 것은 4명분의 구덩이에서 인골 흔적을 발견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즉, 순장자가 도망갔거나, 순장자 선정에 실패했다는 것이다. 아무리 최하층 신분의 인간일지라도 자기 목숨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을까? 정말 충격적이었다.
어떻게 이런 무자비한 일이 발생할 수 있었는지. 순장자의 자기 의사 유무 기준으로 살펴보고 싶었다. 스스로 자기 의지로 무덤에 들어간 자발적 순장자가 있을 수 있을까? 비자발적 순장자 중에서 이미 사망한자, 적의 포로, 극형에 처해질 중 범죄자? 어쨌거나, 있을 수 없는 반인륜적인 사건이다. 하기야, 오늘날에도 전쟁을 일으키는 혹은 획책하는 못된 인간들이 존재하고 있다.
천주교에서 자신이 지은 죄를 본인이 모르는 어떤 무덤에 가서 사자를 위하여 기도해 주면, 대사면을 받는다고 한다. 즉, 속세의 모든 죄를 면하여 준다는 것이 있다. 물론 민형사상 범죄행위는 제외다. 그 왕릉군에 묻힌 모든 사자들을 위하여 기도드리고 있다.
무덤 주인을 저승까지 따르는 사람을 같이 묻는 순장 제도를 고구려, 백제, 신라보다 가야에서 더 많이 시행했기 때문에, 가야인들은 내세를 매우 중요하게 생각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가야 출생 신화로는 신증동국여지승에서 최치원 선생이 썼다는 ‘석이정전’을 인용한 기록에 나온다고 한다. 천신인 이비가지와 가야산신인 정견모주 사이에서 반파국(고령 대가야의 또 다른 옛 이름)의 초대 국왕인 이진아시 왕(뇌질주일)과 금관국의 수로왕(뇌질청예) 형제를 얻었다고 한다. 이진아시 왕이 형이다. 즉, 대가야는 금관가야보다 형님국가라는 자부심을 가지고 있다. 참고로, 지금도 해인사 경내 국사단 전각에서 가야산 수호신인 정견모주를 모시고 있다.
고령 대가야 탐방 후, 늦은 오후에 해인사에 도착하여 둘러보았다. 아쉽게도 성보박물관과 팔만대장경은 폐관 시간이라 들어가 볼 수 없었다. 성보박물관과 팔만대장경 관람은 다음을 기약해야 했다. 20대 초반 방황하던 시절 해인사 박물관에서 납승(누더기로 기운 옷을 입은 스님)의 옷에서 깨달음을 얻고, 밤새 길을 걸어 집으로 돌아왔던 가슴 아픈 기억이 있었다. 해인사 가는 목적이 누승을 보기 위함이었으나, 날이 저물어 성보 박물관은 문을 닫은 지 오래되었다.(폐관 오후 4시)
성철 스님의 사리탑을 뵙는 것으로 위안을 삼았다. 해인사를 급히 주마간산으로 돌아보고, 해인사 입구 정류장에서 오후 6시 40분 버스를 타고 고령을 거쳐 대구서부정류장에 8시경 내렸다. 서부정류장역-동대구역-수서역으로 귀환했다.
주산성(직진 방향) 고령 대가야 고분군과 연결되어 있는 대가야 주산성을 찾아보는 관계로 시간을 많이 소모하였다. 도읍을 지키는 산성이 빠진 도읍지 탐방은 팥 없는 찐빵과 같아 필사적으로 찾아보았다. 고분군 제일 위 1호 고분 쪽으로 올라갔다. 그곳까지 주변에 주산성 안내 표지판과 관광객을 만나 보지 못했다. 감을 잡을 수가 없었다. 포기하고 되돌아가려는 순간, 어떤 산신령 같은 고령 현지의 어르신을 만났다. 주산성 위치를 여쭈어 보니, 손으로 가리키며, 바로 저기라고 하셨다. 마지막 젖 먹던 힘까지 다해서, 나무 계단을 걸어 올라가서 마침내 주산성의 정상(310.4m, 미숭산)에 올라 산성의 내성을 확인했다.
이진아시 왕 상 / 정견모주 상 (대가야 박물관 내 촬영) 가야 관련, 큰 역사적 사건은 아래와 같다.
-. 42년 대가야 탄생
-. 532년 금관가야의 구해왕이 신라에 항복, 금관가야 멸망
-. 536년 신라가 대가야를 공격, 백제가 구원함
-. 562년 신라 이사부와 사다함이 대가야를 침공, 가야 전체 멸망
탐방 경로는 다음과 같다. 비교적 자세하게 설명하고 사진을 첨부하고 싶은 이유는 고령 대가야에 대한 관련 자료를 찾기가 쉽지 않았다. 다음에 어떤 대가야 방문 예비자에게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었으면 한다.
글이 길어져 아래 굵은 글씨 구간만 금회에 설명한다.(서울 남부터미널~특별전시관)
서울 남부터미널> 고령시외버스정류장> 대가야 역사공원> 대가야정> 고령향교> 연조공원> 대가야문화누리원> 대가야역사 테마관광지> 고령 지산동 고분군 표시석> 대가야시대의 움집과 창고> 대가야 박물관> 특별전시관> 대가야 왕릉전시관(44호 고분)>왕릉 고분군> 박목월 시비 (산이 날 에워싸고)>대가야 주산성> 목곽(저장 시설)>고령 지산리 당간지주> 고령대가야시장(5일장- 4일, 9일 장날)> 고령시외버스정류장> 해인사
삼국사기(三國史記) 지리지에는, "고령군은 본디 대가야국으로 존속 기간이 시조 이진아시왕(伊珍阿豉王, 42년 건국)부터 도설지왕(道說智王)까지 16세(世) 520년인데, 신라진흥왕(眞興王)이 562년(진흥왕 23) 이사부(異斯夫)에게 명해 사다함(斯多含)과 함께 멸망시키고 그 땅을 대가야군(大加耶郡)으로 삼았다"라고 기록되어 있다고 한다.
남부터미널
서울권에서 경북 고령 대가야 가는 교통편은 대중교통이용하는 경우, 고속버스와 철도편 2가지다. 고속버스 편은 남부터미널에서 고령가는 직행 편이 있다. (본인 경우 ‘Timoney GO’에서 예약 이용했다. 약 4시간 소요)
대구서부정류장->고령시외정류장(해인사) 행 시간표 다른 하나는 SRT를 이용하여 수서역-동대구역(1시간 30분 소요), 동대구역-대구서부정류장역(20분 소요) 전철, 대구서부정류장-고령시외정류장(약 40분 소요, 대기시간 제외. 버스 편이 자주 없음) 버스로 이동하는 방법이 있다. 참고로 해인사 가는 편(대구서부정류장-고령시외정류장-해인사)은 약 1시간 20분(40분+40분) 소요된다.
고령시외버스 정류장 (오전 비) 고령시외버스정류장
창구에서 직접 탑승표를 발행한다. 건물밖에 관광안내 지도판이 있다.
대가야 둘레길 가야문화의 특징
농정문화와 해양문화를 종합하였다. 독특한 순장문화, 첨단 철기문화, 우륵의 가야금은 음악과 예술의 상징이다. 토기는 부드럽고 안정된 곡선미, 장신구는 정밀한 세공기술과 화려함, 갑옷과 투구는 튼튼하고 실용적이다. 예술성과 실용성을 갖춘 뿌리 깊은 장인 정신의 결정체다.
대가야 왕궁 범위(붉은 선안에 향교 연조공원 체육관이 보임, 출처 : 국가유산채널) 대가야 왕궁
대가야 궁성 유적 발굴 결과, 왕궁 범위가 대략 밝혀졌다고 한다. 정말 반가운 일이다. 이를 근거로 좀 더 구체적이고 체계적인 대가야 왕궁과 주산 내외성의 재건 재구축 사업이 조속히 이루어졌으면 좋겠다. 공주 공산성이 좋은 모델이라고 생각한다. (대가야 왕궁의 범위 : https://www.youtube.com/watch?v=0G-0y9AnPcE , 출처 국가유산채널)
대가야 역사공원 대가야 역사공원
대가야~조선시대의 생활유적이 있던 곳이다. 대가야 시대의 습지와 수리시설, 대규모 수로, 나무말목등이 조사되었다. 조선시대 건물터와 연못이 확인되었다. 대가야 왕도의 중심부였다.
대가야정
조선 전기(1493년, 성종 24)에 고령 객사를 건립하여, 대궐을 상징하는 전패(국왕 초상을 대신하던 나무로 만든 패)를 모셔두고 망궐례(임금의 상징인 전자를 새긴 패를 객사에 봉안하고 예를 올림)를 올리는 곳이었다. 지방에 파견된 사신이 머물던 숙박기관을 겸했다.
고령향교
대가야시대에 궁성이 있던 곳이다. 통일신라에서 고려시대에는 물산사라는 사찰, 조선시대에 향교가 건립되었다.
연조공원
공원 내의 향교 앞에 대가야성지 표시석이 있다. 대가야(AD42년~AD562)의 중심지였다. 일대가 대가야 궁성지임을 알 수 있다.
대가야역사테마관광지
대가야의 도읍지였고, 우리나라 최초의 토기와 철기, 가야금 문화를 찬란하게 꽃 피웠던 대가야의 역사를 테마로 하여 조성되는 관광지이다.
우륵지 고대문화를 첨단 시설로 보고 느끼고, 체험할 수 있도록 4D영상관, 유물 및 신비한 나라 대가야 체험관, 대가야 탐방 숲길 등의 볼거리가 많이 있다. 입구에 우륵지를 보고 관광안내소에서 대가야 관련 거의 모든 팸플릿을 충분히 수집하고 바로 길 건너 대가야 박물관으로 이동했다. 대형주차장이 있다.
가야 고분군 고령 지산동 고분군
2023년 9월 17일 사우디아라비아 리야드에서 개최된 제45차 세계유산위원회(World Heritage Committee)에서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되었다.
고령 지산동 고분군(Jisan-dong Tumuli)
김해 대성동 고분군(Daeseong-dong Tumuli)
함안 말이산 고분군(Marisan Tumuli)
합천 옥전 고분군(Okjeon Tumuli)
고성 송학동 고분군(Songhak-dong Tumuli)
남원 유곡리와 두락리 고분군(Yugok-ri and Durak-ri Tumuli)
창녕 교동과 송현동 고분군(Gyo-dong and Songhyeon-dong Tumuli)
대가야시대의 움집과 창고
대가야 움집 대가야 움집 내부 움집은 발굴조사에서 확인된 유적을 참고하여 만들었다. 집 앞쪽은 직선이고, 뒤쪽은 둥근 형태다. 땅바닥은 아래로 10cm를 파 들어간 형태다. 바닥에는 불을 지핀 화덕자리가 있고, 벽을 따라 연기가 양쪽으로 나가도록 한 난방시설인 구들을 놓았다.
다락 창고 내부 다락 창고는 곡식이나 숯 등 습기를 피해야 할 물건들을 보관한 창고다.
대가야 박물관 대가야 박물관
지산동고분군 및 고령군 관내에서 출토된 대가야시대 유물을 종합적으로 전시하고 있다. 2005년 4월 2일 개관한 박물관이다.
특별전시관
국립경주박물관과 국보순회전을 가지고 있었다. 신라 어린 6세 왕자의 무덤인 금령총에서 나온 출토품을 전시한다.
금령총 출토 금관, 금허리띠, 금방울 (아기용)
대가야 신라의 금관 귀걸이 비교 기록으로 보는 순장 (지산동 44호 분 만드는 과정) 순장자 무기류 대가야 사람들의 삶 삼국사기 대가야 멸망기록
562년 (진흥왕 23년) 9월 가야가 반란을 일으켰다. 진흥왕이 이사부에게 명을 내려 대가야를 침공하도록 했다. 사다함이 오천 기병을 이끌고 전단문에 다다르자 일시에 모두 항복하였다. 왕이 사다함에게 상으로 포로 200명을 주었으나, 세 번 사양하였다. 왕이 억지로 주자, 모두 풀어 양인이 되게 하고, 토지는 군사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김종직(점필재) 소장 유물 / 고령 보부상 유품
대가야왕과 신라왕녀 사이의 이혼소동
529년 대가야왕이 신라왕녀를 맞아들여 드디어 아이를 가졌으나, 신라왕녀가 데리고 온 종자 100인이 몰래 신라의 의복을 입어 쫓겨나 혼인이 깨어졌다. 신라가 돌아가는 길에 대가야 3 성과 북쪽 국경 5성을 함락시켰다.
백제와 대가야 만남
대가야 종말을 암시하다. 554년 대가야는 백제와 함께 신라의 관산성(충북 옥천)을 공격하다가 크게 패배하였다. 대가야는 신라의 침략을 저지하기 위하여 백제. 왜와 연합을 추진하였다. 일본서기에 541년과 544년 두 차례 대책회의를 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백제 가야 왜 연합군이 관산성에서 패배하면서 연합은 실패했다.
철의 나라 대가야 멸망
제16대 도설지왕 때 신라 진흥왕의 공격으로 562년 멸망하였다.
원통모양 그릇받침 토기
대표작 토기는 원통모양 그릇받침이다. 토기의 윗부분은 둥근 밑항아리를 받칠 수 있는 모양이다. 몸통에는 뱀모양의 세로 장식띠를 붙였다. 아랫부분은 종처럼 불룩한 모양을 하고 , 전체를 삼각형 또는 사각형 구멍을 줄지어 뚫어 조형미가 뛰어나다.
갑옷과 투구 갑옷과 투구
철판을 얇게 만들로 그것을 연결하여 붙이는 기술이 당시 최첨단 하이테크였다.
제철로 모형 제철로 모형
대가야 철기술을 테스트한 실재 모형이다. 2005년 제철로를 만들었고 고령군 쌍림면 철생산지에서 철광석을 채취하여 참나무숯을 넣고 불을 붙여 12시간 이상 풀무질로 바람을 불어넣어 철광석을 만들었다. 부산물로 유리와 찌꺼기가 흘러나왔다. 2006년 6월 3일 KBS방송국에서 제작한 '역사스페셜'에 방송되었다.
<참고 자료>
-. 관련처의 팸플릿
글이 길어져 대가야 왕릉 전시관, 가야 고분군, 대가야 주성, 해인사 편은 다음회에 글 올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