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야가 몹시 궁금했다. 그중에서 고령 대가야를 탐방하고 싶었다. 오늘(2024.11.02, 토, 오전 비, 20도)은 경북 고령의 대가야를 탐방했다.
대가야 주산성과 주변 산성, 보루성 그리고 신라산성
대가야 주산성과 내성 및 외성
전회에 대가야 박물관내부를 설명드렸다. 금회는 대가야 왕릉 전시관을 둘러보고, 밖으로 나와 왕릉 고분군과 대가야 주산성으로 올라갔다.
대가야문화의 특징과 왕국 대가야
농정문화와 해양문화를 종합하였다. 독특한 순장문화, 첨단 철기문화, 우륵의 가야금은 음악과 예술의 상징이다. 토기는 부드럽고 안정된 곡선미, 장신구는 정밀한 세공기술과 화려함, 갑옷과 투구는 튼튼하고 실용적이다. 예술성과 실용성을 갖춘 뿌리 깊은 장인 정신의 결정체다.
대가야는 520년(AD 42~AD562년)의 역사를 가진 왕국이었다. 아쉽게도 삼국사기등 문헌에도 잠깐 언급될 정도로 역사에 대한 기록이 거의 남아 있지 않다. 다만, 계속된 발굴로 유물에 의해 그 존재를 증명할 뿐이다. 지정학적으로 신라와 백제의 틈바구니에서 소백산맥과 낙동강사이에 존재했던 왕국이었다.
특히 신라에 의해 낙동강을 이용한 해외 진출입 루터가 막혀 어려워 지자, 섬진강일대의 진안 장수 임실 함양 남원 등에 40여 개의 봉수대를 운영하여 중국등과 교류하던 강한 왕국이었다. 고구려 백제 신라보다, 엄격한 왕권이 존재하였다. 그 증거로 순장 유물이 가장 많았다.
관산성 전투(554년, 충북 옥천)에서 대가야와 백제 연합군이 신라에게 패배함으로써, 결국 562년 신라에 멸망하게 되었다. 학계와 정부는 좀 더 많은 연구 인력과 물자를 투자하여 공주의 공산성정도로 복구하여 대가야의 면모를 하루빨리 보여주었으면 좋겠다. 여건과 지형, 규모가 비슷하여 애정을 가지고 추천드린다. [공주 공산성 참조 :https://brunch.co.kr/@jylee2020/188 ]
글이 길어 몇 차례 나누어 글을 올린다. 금회에는 아래 굵은 글씨 구간을 설명한다.(대가야 왕릉 전시관~고령대가야 시장)
1977년에 지산동 44호분과 45호분의 발굴조사했다. 이후 2000년 9월 18일 대가야읍 지산리의 현 위치에 직경 37m,높이 16m 규모의 초대형 돔식 구조로 실제 대규모 순장무덤인 지산리 44호 고분군을 그대로 재현하였다.
고령 지산동 44호 분
지산동 44호 고분
1977년 경북대에서 발굴조사하였다. 봉분 지름 25*27m, 높이 6m 규모다. 가운데에 으뜸돌방, 그 남쪽과 서쪽에 2기의 딸림돌방, 주위에 32기의 순장덧널을 배치하고, 바깥 둘레돌을 설치한 여러 덧널무덤이다.
금과 금통으로 만든 화려한 생활용품, 많은 양의 무기와 말갖춤, 토기 등 껴묻거리가 출토되었다. 특히 오키나와 원산지인 야광조개국자는 대가야의 해상교역 활동했음을 증명한다.
지산동 44호 고분 순장
44호 고분 순장 내역
가운데에 3기의 큰 돌방이 있다. 그중 가장 큰 돌방은 무덤의 주인인 왕이 묻힌 으뜸돌방이다. 다른 2기는 왕의 내세 생활을 위해 껴묻거리를 넣은 딸린 돌방이다. 으뜸돌방에는 왕과 2명의 순장자가 있었고, 딸린 돌방에서도 각각 1명의 순장자가 확인되었다. 돌방 주변에는 32기의 순장덧널이 배치되어, 대략 40여 명이 순장되었다. 순장된 사람들은 10대에서 60대에 이르는 다양한 연령대의 남자와 여자로, 남편과 아내, 아버지와 딸, 형제자매가 함께 순장되기도 했다. 역할도 왕의 저승생활을 위한 시종과 시녀, 호위무사, 창고지기, 마부, 일반백성 등 다양하다.
대표적 토기는 원통모양 그릇받침이다. 토기의 윗부분은 둥근 밑항아리를 받칠 수 있는 모양이다. 몸통에는 뱀모양의 세로 장식띠를 붙였다. 아랫부분은 종처럼 불룩한 모양을 하고 , 전체를 삼각형 또는 사각형 구멍을 줄지어 뚫었다.
45호 고분
44호 바로 위에 60m 떨어져 있다. 11명 이상이 순장되어 있었다.
지산동 73호 분
지산동 73호 고분 순장
AD400년 전후 대가야 최초의 왕릉이다. 지름이 23m인 대형 봉토와 둘렛돌이 있는 구덩식 나무덧널무덤이다. 장신구 무기 말갖춤 토기 축소모형철기등 화려한 껴묻거리가 출토되었다. 10대 후반에서 30대 남녀 11명이 순장되었다.
순장 풍습
왕이나 신분이 높은 사람이 죽었을 때 그 삶을 위해 사람을 죽여서 함께 묻는 장례풍습을 말한다. 사후에도 살아있을 때의 삶이 계속된다는 계세사상이 반영된 것이다. 부여 고구려 신라 가야에서 순장 제도가 있었다. 부여에서는 순장자 수가 많을 때는 100명에 이르렀다고 한다. 신라에서는 지증왕(502년) 때 그동안 순장하던 것을 금지하였다.
순장 만드는 절차
1) 장소 선정과 무덤구덩이 파기
2) 돌방과 돌덧널 만들기
3) 돌방과 돌덧널에 시신과 껴묻거리 넣기
4) 뚜껑돌 덮기
5) 봉분 만들기
6) 제사 지내기
순장 판단기준
1) 주인공과 순장자 사이의 신분적 차이인 종속성이 있어야 한다.
2) 한 봉토 안에 2기 이상의 덧널이 있을 경우 동시에 만들어져야 한다.
3) 강제성이 보여야 한다.
대가야 기마무사(1)
대가야 기마무사(2)
대가야 기마무사
창을 힘껏 쥔 무사의 매서운 눈매에 기선을 제압당한다. 각종 말 장신구 용어가 생소하지만, 적어 본다. 재갈멈치, 고삐이음쇠, 고삐, 말방울, 안장앞가리개, 안장, 안장뒷가리개, 기꽂이, 말띠꾸미개, 말띠드리개, 발걸이 등이다.
대왕 글씨 새김 긴 목항아리
충남대박물관에 보관 중인 긴 목항아리의 뚜껑과 항아리 몸체 표면에 각각 대왕이라는 한자가 새겨져 있다. 대왕은 왕중왕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어, 대가야의 왕권이 상당한 수준이었음을 알 수 있다.
대가야의 옷차림
대가야의 옷차림
고대 사회는 옷차림으로 신분을 구별했다. 대가야 사람들은 기본적으로 저고리와 바지 또는 치마, 겉옷인 두루마기를 입었다. 왕과 왕비 등 신분이 높은 사람들은 용이나 봉황, 물결과 타래무늬로 수놓은 옷을 입었다. 신분이 낮은 사람들은 소박한 옷을 입었다. 대가야 옷차림은 일본에 전해져 많은 영향을 미쳤다.
대가야의 대외교류
대외관계
대가야는 국가 안정과 발전에 도움이 되는 나라들과 다원적인 대외관계를 맺고자 노력을 기울였다. 대체로 신라보다는 백제나 왜와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였다. 대가야가 중국과 일본으로 오가는 가장 쉬운 길은 낙동강이지만, 신라에 의해 막히면서 새로운 대외 교역로를 찾아 서쪽의 섬진강으로 진출하였다.
44호분의 금동그릇은 백제에서, 45호분의 세잎고리자루 큰 칼은 신라에서 들여온 것이다. 특히 야광조개국자는 일본 오키나와에서 들여온 것이다. 해상교역 활동의 증거다.
세계유산 가야고분군
고분군 번호별 위치도
지산동 고분군 발굴조사
지산동 왕릉 고분군
대가야왕릉전시관에서 나와 좌측 능선을 따라 올라가면 여러 왕릉을 볼 수 있다. 왕릉군 입구에 UNESCO 세계유산 가야고분군 표시석이 서 있다. 계속 올라가면 끝에 약간 높은 산이 나온다. 그 산 정상을 나무 계단을 따라 꼭 올라가 봐야 한다. 입구에 계단이 나오면, 계단을 타고 오르면 된다. 그 산이 주산성이다. 정상에 표시판이 있다. 내려올 때는 왕릉 고분군으로 다시 내려오지 말고, 충혼탑이 있는 방향으로 내려오면 대가야 박물관-대가야왕릉 전시관-왕릉 고분군-주산성일대 일주를 완성하는 것이 된다.
지산동 고분군
가야 고분군 / 지산동 고분군
지산동 고분군 개요
대가야읍을 둘러싸고 있는 주산에서 남쪽으로 뻗어 내린 능선 위에 위치한다. 고분군 북쪽에는 대가야시대의 산성인 주산성, 동쪽에는 추정 대가야 궁성지가 있다. 길이 2.4km, 너비 100~200m 범위에 700 여기의 봉분이 있다. AD400년~A562사이에 만들어졌다. 구덩식 돌방무덤이 주류다. 이승과 저승이 연결된다는 내세사상과 순장을 비롯한 장례문화, 우수한 토목기술을 확인할 수 있다. 이를 근거로 우리 고대사를 3국 시대가 아닌 4국 시대로 파악하는 인식의 배경이 되고 있다.
30호분
지산동 30호 고분
대가야 왕릉전시관 바로 앞에 있다. 5세기 전반에 만들어진 지름 15~18m 중형분이다. 바리 모양 그릇받침과 긴 목항아리 금동화살통장식 쇠화살촉 덩이쇠 말갖춤등이 출토되었다. 최소 5명의 순장자가 있었다. 순장덧널에서는 어린아이 머리뼈와 금동관이 나왔다. 으뜸덧널과 바닥 순장덧널에서 바위그림이 새겨진 덮개돌이 확인되었다.
32~35호 분
32~35호 분
1978년 발굴조사했다. 모두 좁고 긴 네모꼴의 구덩식 돌덧널 양식으로 으뜸덧널이 가운데 설치되어 있다. 32호와 34호는 으뜸덧널 이외에 1기의 돌덧널(딸린 덧널 혹은 순장덧널)이 배치되어 있고, 봉토분들 주변에 14기의 소형 구덩식 돌덧널무덤이 발견되었다. 32호분에서는 금도완, 갑옷, 투구등이 나왔고 봉황머리와 은으로 새긴 넝쿨무늬 장식된 긴 칼이 나왔다. 대가야의 대표적인 금동관이다. 34호 35호분 주변에서는 그릇받침, 굽다리접시, 항아리등 제사용 토기가 출토되었다.
44호분
44호분
5세기 후반 구덩식 돌덧널무덤으로 봉분 지름이 25~27m다. 고대 순장의 실체를 밝혀준다. 봉분 가장자리를 따라서 1~3단 둘레돌을 만들었다. 순장은 7명 이상으로 추측된다. 우리나라 최대 순장무덤이다. 금과 금동 생활용품, 토기류, 무기류, 말갖춤 등이 출토되었다.
야광조개국자는 오키나와에서 건너온 것이다. 청동그릇은 무령왕릉 것과 유사하며, 주변국과 활발히 교류하였다.
45호분
박목월 시비 (산이 날 에워싸고), 주산성 입구 산책로에 있다.
1호 고분에서 주산성으로 이동하는 도중에 시비가 하나 서 있다. 박목월 시인이 들찔레처럼, 쑥대밭처럼, 그믐달처럼, 바람처럼 살라고 한다.
박목월 시비 (산이 날 에워싸고)
산이 날 에워싸고
씨나 뿌리며 살아라 한다.
밭이나 갈며 살아라 한다.
어느 짧은 산자락에 집을 모아
아들 낳고 딸을 낳고
흙담 안팎에 호박 심고
들찔레처럼 살아라 한다.
쑥대밭처럼 살아라 한다.
산이 날 에워싸고
그믐달처럼 사위어지는 목숨
그믐달처럼 살아라 한다.
바람처럼 살아라 한다.
대가야 주산성 올라가는 산책 길과 주산성 정상 올라 가는 첫 계단
주산성 정상(1)
주산성 정상(2)
주산성 정상(3)
대가야 주산성
주산성은 내. 외성의 이중구조로 되어있다. 둘레 1,788m, 면적 104,494 m2(내성-둘레 368m, 면적 21,479 m2, 외성-둘레 1,420m, 면적 83,015m 2다.
대가야 주산성 성벽
암반을 깨서 성돌을 만든 석축산성이다. 2011년부터 발굴조사 중이며, 현재 2차까지 조사하였다.
대가야 주산성 발굴현장
저장 시설인 성 추정 남문지 부근에 배수시설과 보강시설을 갖추었다. 내성벽 추정범위에서 내성 구조와 성격 및 내성벽 존재 여부와 외성과 비교한 축조시기를 확인하였다. 내성 평탄지에서 대가야 말기에 축조된 저장시설인 목곽고가 확인되었다.
주산성 목곽고
주산성 목곽고(저장고)
주산의 9부 능선 평탄지에 위치하는 내성 내에 있다. 2015년 발굴 시 6세기 중엽 백제 축조기술 영향을 받아 조성된 대형 지하 저장시설을 발견했다. 5m*5m 높이 2m 정도다. 바닥에서 약 20cm 두께의 가공하여 목재를 격자상으로 짜 맞춘 것이다.
주산성 목곽고 위치
백제의 공주 공산성, 대전 계족산성, 이천 설성산성, 금산 백령산성, 대전 월평동 유적등 백제권역에서 출토된 목곽고의 영향을 받았다.
내. 외성 접합부
내. 외성 접합부
주산의 9부 능선에 외치하는 주산성의 내성 동편과 서편에서 확인되었다. 동편 접합부는 2015년 정밀조사했다. 결과는 외성이 무너졌거나 혹은 인위적으로 성벽일부를 제거한 상태에서 그 위에 내성을 축조했다. 내성은 최대높이 3.5m, 폭 5.5m 편축식 석축산성으로 확인되었다. 하부외성은 대부분 무너졌으며, 잔존 성벽의 높이는 0.2~1.0m이다. 연조리 능선가까이에서 내성과 외성의 간격이 좁아지면서 합쳐져 있다. 내성의 축조시기는 알 수 없다. 내성의 안쪽에는 길이 11m, 폭 1.2m 정도의 최하단석만 남은 석축열이 확인되었다.
내외성 접합부
과거 실사 시 촬영했던 사진으로 미루어 보면, 일부 구간은 현재의 산허리를 감아도는 보행도로에서 5~10m 하부에서 돌아가며 내. 외성 접합부 성곽이 축성된 것으로 짐작한다.
소도(추정)
소도(추정) 지역
충혼탑 쪽으로 내려오다 보니, 산신령과 관련되는 것 같은 세 군데 정도 소형 기도처(영생천, 주산신령탑 등)가 있었다. 분명 역사가 오래된 곳일 텐데, 대가야시대부터 내려온 소도같이 신성한 기운을 받는 곳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잠시 했다.
충혼탑
충혼탑
충혼탑을 보면 희생하신 분들께 감사함과 고마움을 느끼며 언제나 경건한 마음이 든다. 그분들의 깊은 뜻을 가슴에 새겨야 한다.
광복지사 영주 김상덕선생 사적비
광복지사 영주 김상덕선생 사적비
동경 유학 중 2.8 독립선언 11인 대표로 참가, 옥고를 치른 후 상해로 망명하셨다. 만주로 옮겨 김동삼 이청천 김좌진 장군과 전민족유일책진회를 결성 항일 운동을 하셨다. 1944년 임시정부 국무위원으로 재임 중 광복을 맞아 김구 주석 김규식 부주석과 함께 귀국하였다. 매국친일 청산에 주력하다가 6.25 사변 때 납북되었다.
또한 건너 맞은편에 일제로부터 독립을 위하여 투신하신 세분(장로 최영돈 선생, 백농 김재열 선생, 곽태진 지사)의 애국지사 현창비가 세워져 있다.
고령 지산리 당간지주
고령 지산리 당간지주
사찰의 법회나 의식 때 당(불화를 그린 기)을 걸었던 긴 장대를 당간이라고 하며, 당간을 지탱하기 위해 세운 2개의 돌기둥을 당간지주라고 한다. 통일신라 중기인 8세기 후반 것이다. 높이 3.14m이다.
고령대가야시장
고령대가야시장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당일은 휴장이었다. 5일장이며 4일과 9일이 개장날이다. 상가 중에 부엌데기(철의 고장 증거, 국내산 무쇠가마솥 전문점)에서 전시한 솥이 눈길을 끌었다. 장날 대장간에서 쇠를 다루는 대가야 후예 장인의 솜씨를 보고 싶었다.
고령 대가야 시장
무쇠 가마솥 전문점
대가야는 유명한 철의 생산국이라 뭔가 달라 보인다. 3대째 장인이 직접 만든다고 한다.
고령시외버스정류장 로터리
고령시외버스정류장
주산성 탐방에 공을 들인 관계로 당초 목표 출발시간보다 늦은 4시 20분에 해인사 가는 버스를 탔다. 해인사에서 납승과 팔만대장경 그리고 종탑의 타종소리를 듣고 싶었다. 고령에서 해인사 가는 길은 산속을 달리며 올라가는 험한 길이다. 해인사에 도착했을 때는 해가 벌써 넘어가 어둑어둑해졌다. 마침 해인사에 적을 두신 스님과 같이 버스에서 내렸다. 스님은 종종걸음으로 바쁜 걸음으로 먼저 올라가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