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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애바다 Nov 16. 2024

합천 해인사(海印寺) 탐방

해인사 성철 스님의 누더기 승복을 찾아서

해인사 가는 길
해인사
해인사 경내
해인사 지도

    해인사(海印寺)는 경남 합천군 가야면 치인리 가야산에 있다. 명승구역 면적은 20,952,454 m2(약 6백만 평)이다. 고려 재조대장경(팔만대장경)이 있다. 중심 전각은 대적광전(大寂光殿)이며, 대한불교 조계종 본사다.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이 2개나 있다. 세계기록은 팔만대장경이고, 세계문화유산은 장경판전이다. 신라의 진성여왕과 각관 위홍의 사랑, 해인사와 팔만대장경을 지킨 김영환 대령, 성철 스님의 이야기가 있다. 특히 성철 스님은 나에게 오래전부터 납승(衲僧·누더기로 기운 옷을 입은 스님)으로 각인되어 있었다.


   불교의 3가지 보물인 삼보(불보, 법보, 승보)는 부처님, 부처님의 법, 스님이다. 우리나라에는 삼보사찰이 있다. 불보사찰은 경남 양산의 통도사다. 부처님의 진신사리(진짜 부처님 몸에서 나온 사리)를 모시고 있다. 해인사는 법보사찰이다. 고려 제조대장경(팔만대장경)을 보관하고 있다. 승보사찰은 전남 순천의 송광사( https://brunch.co.kr/@jylee2020/127 )다. 예로부터 이름난 스님들이 많이 있었다.


   통일신라 최치원 선생이 지은 '신라 가야산 해인사 선안주원벽기'와 고려 태조 26년에 지어진 '가야산해인사고적'에 해인사의 창건이 기록되어 있었다.


   802년(통일신라 애장왕 3년)에 순응(順應)과 이정(利貞)이 애장왕의 도움으로 창건했다. 통일신라 진성여왕은 삼촌 위홍이 사망하자, 그를 혜성대왕(惠成大王)으로 추봉 했다. 해인사 이름을 혜성대왕원당으로 바꾸고 원당을 지어 추모했다. 여왕은 해인사 주위로 거처를 옮겨 생을 마감했다. 920년대 말에 고려 태조 왕건이 후백제군과 해인사 인근에서 전투를 하였다. 왕건이 당시 해인사 주지인 희랑대사에게 도움을 청했고, 도움을 주었다. 935년에 경순왕의 막내아들 김덕지(金德摯) 왕자가 법명을 범공(梵空)이라 하고 출가하였고, 해인사에서 입적하였다. 1393년(조선 태조 2년)에 해인사를 중창하였고, 고려대장경판이 해인사에 봉안되었다. (나무위키)

납승(성철 스님) / 누더기 옷

   고령 대가야 탐방 후, 늦은 오후에 해인사에 도착하여 둘러보았다. 해인사 방문 주목적이 누더기 옷을 보기 위함이었으나, 날이 저물어 성보 박물관은 문을 닫은 지 오래되었다.(폐관 오후 4시) 성철 스님의 사리탑을 뵙는 것으로 위안 삼았다. 다음을 기약해야 했다. 19살 방황하던 시절 해인사 박물관에서 납승(누더기 기운 옷을 입은 스님)의 옷에서 크게 감동을 받았다. 범종의 울림을 되새기며, 밤새 길을 걸어 직선 30km 거리의 시골집으로 돌아왔던 청춘시절의 아픈 기억이 있었다. 

(해인사 납승 : https://brunch.co.kr/@jylee2020/11)

해인사 입구 버스 정류장

해인사 입구 정류장

   고령에서 대가야 박물관, 지산리 고분군, 주산 내외산성을 둘러보고, 해인사 가는 버스를 타고 산속을 달리며 올라갔다. 차멀미를 하는 험한 길이다. 해인사에 도착했을 때는 해가 벌써 넘어가 어둑어둑해졌다. 마침 해인사에 적을 두신 스님과 같이 버스에서 내렸다. 납승이 입었던 승복의 안부를 여쭈어 보려고 했으나, 스님은 종종걸음 바쁜 걸음으로 먼저 올라가셨다.

해인사 입구 편의점

해인사 입구 편의점 시설     

    입구에 식당에서 식사를 할 수 있고, 특산물, 기념품, 음료수, 승복 등을 구매할 수 있다. 카페가 있었고, 가야산 녹차의 쓴맛이 기억에 남는다.  

해인사 성보박물관 / 희랑대사좌상

해인사 성보박물관

   성보 박물관은 2000년 완공하였다. 대표적인 소장 유물로는 고려시대 왕건의 복전이자 해인사중창주인 희랑대사를 조각한 건칠희랑대사좌상이 있다. 조선 성종대에 만들어진 홍치4년명 동종(보물), 부처님의 설법장면을 그림으로 표현한 영상회상도(보물)등 불교 유물을 소장하고 있다. 매년 특별전 및 기획전시를 개최하고 있다.  옛날에 박물관 같은 곳에서 납승이 입으시던, 누더기 옷을 본 강열한 기억이 있었다. 그런데 워낙 오래전 방문하여, 경내의 모든 건물들이 처음 보는 것처럼 새로워 보였고, 생소하고 낯설었다.    

허덕교 / 허덕교 상부 계곡 전경

허덕교

   계곡물소리와 단풍이 잘 어우러져 한 폭의 그림 같다. 옛날 계곡 근처에 지은 허덕사가 있었다는 설과 산아래에서 이곳까지 오면서  숨이 차 허덕댔다고 하여, 지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져 온다. 나의 경우는 두 번째, 해지기 전에 혹시나 하고 박물관에서 스님의 누더기 장삼을 볼 마음에서 허덕이며 올라왔다. 올라오는 길옆에 고사목들이 많이 보였다.

고사목
팔만대장경 수호공적비 / 김영환 장군 약력 / 고려 팔만대장경 수호 업적

팔만대장경 수호공적비

   김영환 장군(당시 대령) 이야기다. 해인사는 한국전쟁 때인 1951년 9월 인천상륙작전 이후 전세가 역전되면서 퇴각하지 못하고 남은 1천여 명의 북한군들이 해인사를 중심으로 게릴라 전을 전개했다. 이에 UN군 작전처에서 폭격기 4대로 해인사를 폭격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그러나, 당시 공군 편대장이었던 김영환 대령은 팔만대장경과 해인사를 지키기 위해, 명령을 따르지 않았다. 해인사에 숨어 있는 것을 알면서도 명령에 불복, 어떤 처벌도 감수하겠다고 하면서 거부하였다. 해인사에 폭탄을 투하하지 않았던 것이다. 전시에 명령 불복종은 사형이다.


   이로써 해인사는 기사회생, 폭격당할 위기를 넘겼다. 자랑스러운 불굴의 배달민족 한국인이다. 2002년 6월 해인사 삼선암 입구에 그를 기리는 공적비를 세웠다.

성철스님 사리탑

성철스님 사리탑

   성철 스님(1912년 2월 19일~1993년 11월 4일) 관련, '해인사 납승'이란 글을 브런치에 올린 적이 있었다. 대학 입학 관련, 19세 번민의 나이, 겨울에 해인사를 방문하였다. 지나고 보면, 아무것도 아닌 것을 그때는 왜 그렇게 중요하고 모든 것이란 생각을 했을까? 며칠 전, 전 국민이 새 가슴이 되며, 긴장하던 대입 시험이 끝났다. 


   '수험생 모든 분 수고하셨습니다. 수험생 모든 분에게 진심으로 마음의 평화를 빕니다.'


   그때 박물관으로 추정되는 건물 내에서, 누더기로 기운 승복이 전시된 현장을 보고 크게 감화를 받았다. 일생 삶의 기준이 되었다. 그때의 벅찬 감동, 해인사 납승(衲僧·누더기로 기운 옷을 입은 스님)이 나를 다시 이곳으로 이끌었다. 나에게 해인사의 첫 번째 매력은 누더기 옷을 입은 성철스님과 그분의 외동딸 '불필' 스님이시다.

성철 스님과 제자들 / 성철 스님과 불필스님(우측 끝)

   성철(性徹) 스님 호는 퇴옹(退翁)이고 속명(俗名)은 이영주(李英柱)이다. 근·현대 대한민국 불교사에 있어 선(禪)과 교(敎)를 아우르는 대표적인 큰스님이다. 1912년 경남 산청 출생이며, 1993년 11월 4일 합천 해인사 퇴설당에서 입적하였다. 11월 10일 영결식 및 다비식을 봉행하여 11월 12 일 100 여과에 이르는 사리를 수습하였다. 1998년 11월 해인사 운양대에 사리탑을 봉안하였다. 2001년 3월 경남 산청군 단성면 묵곡리 생가터에 기념관을 건립하고 겁외사를 창건하였다. 성철스님의 말씀 중, 조계종 종정으로 취임할 때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로다"의 유훈이 남아있다.(위키 백과)   

해인사 비림

해인사 비림

   해인사 사적비를 비롯하여 20여 개의 공덕비가 모셔져 있다. 뒤편은 해인사를 크게 일으켰던 스님들의 행적비와 사리를 모셔 놓은 부도가 있다.   

길상탑

길상탑

   길상탑(보물)은 통일 신라시대의 전형적인 양식이며, 탑 안에는 소탑과 함께 탑에 대한 기록인 탑지가 발견되었다. 최치원 선생이 쓴 것이다. “전란 속에서 많은 사람들이 절의 보물을 지키려다 희생되었고, 그분들의 영혼을 기리기 위해 탑을 세웠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합천 반야사지 원경왕사비

합천 반야사지 원경왕사비

   고려시대 고승 원경왕사(145~1114)를 기리고자 인종 3년(1125)에 세운비다. 거북받침돌 비몸 지붕돌을 갖추었고, 각 부분이 얇다. 대각국사 의천을 따라 송나라에 갔다가 귀국하여 1104년(숙종 1) 승통(僧統)이 되었다. 왕사가 된 뒤에 귀법사(歸法寺)에 머물다 입적하자 왕은 ‘원경’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합천 가야면 야천리 반야사 터에 있던 것을 1961년 해인사로 옮겼다.  

일주문

일주문

   옆에서 보았을 때 하나의 기둥처럼 겹쳐 보이도록 일렬로 서있다고 일주문이라고 부른다. 문을 통과하면서 속세의 욕심, 성내는 마음 등 번뇌를 내려놓아야 하는 사찰의 첫 번째 문이다.      

해인총림 / 봉황문(사천왕문)
봉황문(사천왕문)

봉황문(사천왕문)

   해인총림 현판이 걸려 있는 문이다. 불법을 수호하고 악을 물리치는 사천왕을 모시고 있다. 일주문에서 속세의 번뇌 망상을 내려놓지 못한 경우, 이곳에서 사천왕이 강제로 번뇌 망상을 제어해 준다.    

국사단
이진아시 왕 (정견모주의 첫째 아들, 고령 대가야 시조) / 정견모주 (출처 : 고령 대가야 박물관에서 촬영)
국사단 내부 (중앙 : 아들 대가야 이진아시왕과 금관가야 수로왕, 우측 : 정견모주)

국사단

   가야산의 수호신인 정견모주를 모시고 있는 전각이다. 국사단에서 정성을 다하여 기도하면 소원 하나는 들어준다. 이야기를 아는 사람은 해인사 방문 시 반드시 참배하는 곳이다. 국사단의 역사는 해인사보다 더 오래되었다고 한다. 대가야의 마지막 왕자 월광이, 통일 신라의 마의태자의 처지처럼, 이곳에서 생을 마감했다고 한다. 정견모주는 첫째인 고령 대가야의 시조인 이진아시왕과 둘째인 금관가야의 시조인 수로왕을 낳았다고 한다. 불교 사찰인 해인사 경내에 가야산 수호신을 모시고 있다는 것은 특이하다. 

(고령 대가야 박물관 참조 : https://brunch.co.kr/@jylee2020/200)

해탈문 (불이문)

해탈문(불이문)

   이 문을 통과하면 중생계를 벗어나 깨달음의 세계 즉 부처님의 세계로 들어감을 의미한다. 일주문에서 해탈문까지 계단수가 33개로 이루어져 있는데, 불교에서 세계의 중심인 수미산 정상의 33개의 하늘을 표현한 것이다.          

구광루

구광루

   구광루는 화엄경에서 부처님이 아홉 곳에서 설법할 때마다 백호에서 빛이 나와 세계를 비추셨다는데서 유래한다.     

해인도(화엄일승법계도)

해인도(화엄일승법계도)

   미로와 같이 54번 꺾어 도는 동안 그 내용을 마음에 체크해 가면서 따라가면 깨달음에 도달하는 원리이다. 결국은 출발점으로 되돌아오게 되는데 이는 본래의 모습이 곧 부처님의 세계임을 의미한다. 성철 스님의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다'가 생각난다.  세상의 이치는 돌고 돌다가 결국 되돌아온다.

범종각

범종각

   범종, 법고, 목어, 운판의 4가지 법구가 모셔져 있다. 고요한 산사에 울려 퍼지는 범종 소리는 웅대한 불법의 울림을 전하기 위해서이며, 지옥에서 고통받는 중생들을 바르게 이끌기 위하여 치게 된다. 북처럼 생긴 법고는 따위의 짐승을 구제하기 위해 두드리며, 물고기 모양의 나무에 채색을 이빈 목어는 물속에 사는 중생들의 고통을 구제하기 위해서 울린다. 구름모양의 운판은 하늘을 나는 중생들의 고통을 구제하기 위하여 울리는 것이다. 오후 6시 40분발 대구행 버스를 타기 위해 어두운 길을 휴대폰 플래시를 비추며 내려왔다. 저녁 예불의 시작을 알리는 법고 소리가 귀 뒤로 들려왔다. 타종식을 보게 되면 8시 막차를 타게 된다. 새벽 시간에 수서역에 도착하게 되면, 차나 전철이 끊긴다. 못내 아쉬웠다.

해인사 삼층석탑

해인사 삼층석탑

   해인사 창건 당시 세운 탑이다. 통일신라 석탑의 전형을 보여 준다. 1926년 6월 탑을 수리할 때 위층 기단에서 9점의 불상이 발견되었다. 수리 후 그대로 넣어 모시고 있다.      

해인사 석등

해인사 석등

   불교의식을 행할 때 불을 밝혀 두는 것이다. 부처님의 광명을 상징한다. 팔각으로 된 화사석에는 사면으로 창이 있고 나머지 사면은 사천왕상이 조작되어 있으며 바닥돌을 제외한 각 부분이 8각을 이루고 있는 전형적인 양식으로 해인사 삼층석탑과 함께 세운 것이다.     

대적광전

대적광전

   해인사의 중심이다. 비로자나부처님을 주불로 모신 법당이기 때문에 대적광전이라고 한다. 세계는 특별한 부처님의 세계가 아니라 우리 자신이 살고 있는 현실 세계를 의미한다. 이 세계 속에 있는 우리가 법신불인 비로자나불에게 경배하고 의지함으로써, 부처님의 지혜 속에서 현실계의 상황을 스스로의 눈에도 비치도록 하는 것이다. 주변의 모든 생명들에 대한 자비를 실천하는 것이 부처님 세계로 들어가는 길이다.     

응진전

응진전

   나한전이라고도 하며 16 나한을 봉안하고 있다. 나한은 아라한의 준말로, 일체의 번뇌를 끈고 깨달음을 얻어 중생의 공양을 마땅히 받을 만한 자격을 지닌 불교의 성자를 말한다.     

명부전  / 응진전
대적광전 / 장경판전(멀리 중앙) / 명부전

명부전

   지장전이라고도 하며 지옥 중생을 모두 제도하기 전에는 성불하지 않겠다는 큰 서원을 세운 지장보살이 모셔져 있다. 지장보살 좌우는 도명보살과 사후세계에서 죄의 경중을 가리는 열 명의심판관인 시왕이 봉안되어 있다.     

대비로전

대비로전

   쌍둥이 부처님으로 알려진 비로자나불(국보)이 모셔져 있으며, 신라시대 ‘각간 위홍’과 ‘진성여왕’의 사랑이 영원하기를 염원하며 비로자나불을 모셨다고 한다. 대비로전에 연등을 달고 사랑의 소원을 빌면 천년의 사랑을 이어 갈 수 있다.      

독성각

독성각

   독성은 스승 없이 홀로 수행하여 깨친 나반존자를 모시고 있다. 나반존자에게 공양을 올리고 기도하면 속히 영험을 얻는다 하여 사찰에서는 독성기도를 많이 올리고 있다.     

해인사 대장경판
해인사 대장경판 설명

해인사 대장경판

   고려 고종 23년(1236)부터 고종 38년(1251)까지 총 16년에 걸쳐 조성하였다. 초조대장경이 몽골의 침입으로 소실되자, 국난극복을 위해 다시 대장경을 조성하여 ‘재조대장경’, 부처님의 8만 4천 법문이 수록되어 있다 하여 팔만대장경이라고 한다. 현존하는 대장경 가운데 가장 완벽한 대장경이다. 경 율 논 삼장의 구성이 완벽하며, 새겨진 글자는 마치 한 사람이 새긴 것처럼 모두 동일하며 추사 김정희는 사람이 아니라 신선이 내려와 쓴 것 같다고 감탄했다. 총 81,350판으로 경판을 전부 쌓으면 3,200m로 백두산(2744m) 보다 높고, 나란히 놓으면 60km나 된다.      

해인사 장경판전 입구 / 고려대장경판 제작과 인쇄
해인사 장경판전(2)

해인사 장경판전

   장경판전 건물 내부는 온도 습도 조절 등의 기능을 자연적으로 해결할 수 있도록 설계하여 대장경판을 보관하는 건물로 가장 우수함을 인정받아 1995년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지정되었다. 장경판전의 법보전과 수다라장은 건물 앞면과 뒷면에 각각 크기가 다른 창살을 통해서 들어온 바람이 건물 내부 전체에 골고루 퍼지게 한 후 밖으로 빠져나가도록 설계했다. 장경판전 내부 바닥에는 황토, 강석회, 숯, 소금이 차례로 다져져 있어 대장경판을 보관할 수 있는 최적의 온도 습도를 유지할 수 있다.     

어수정

어수정

   해인사는 802년(통일신라 애장왕 3년)에 순응(順應)과 이정(利貞)의 기도로 애장왕의 왕후가 병이 낫자 그에 대한 보답으로 신라 왕실의 후원으로 이 애장왕의 도움으로 창건을 시작했다. 애장왕이 봉서사(현 원당암)에 머물며 해인사 공사 감독하면서 정사를 돌보았다고 한다. 애장왕이 마신 우물이란 뜻이다.

학사대 전나무(태풍 피해전의 전나무 모습) / 학사대 최치원 상

학사대 전나무

   신라말 문장가이자 학자였던 고운 최치원 선생이 만년에 가야산에 은거하면서 시서에 몰입하던 곳이다. 당시 거꾸로 꽂아둔  전나무 지팡이가 자라서 거대한 나무로 자랐다고 한다. 천연기념물로 지정 관리되어 오다가, 2019년 한반도를 강타한 태풍 링링으로 인해 안타깝게도 그 수명을 다하였다. 그 자리에 최치원 선생과 학 상이 세워져 있다.

해인사의 밤(1)
해인사의 밤(2)
해인사의 밤 / 사랑의 돌탑 (어떤 미남미녀 커플이 정성스럽게 돌 하나를 올려 놓았다. 그들의 소원이 이루어 지기를!)

   해인사를 급히 주마간산으로 돌아보았다. 처음 내렸던 정류장에서 직원 한분이 차를 운전하고 와서 승차표를 직접 발행해 주었다. 잔돈(현금, 만원 정도) 정도는 미리 소지하고 있어야 할 것 같다. 거스럼돈 동전까지 챙겨 주었다. 텃줏대감인 듯 한 백호를 닮은, 흰색 바탕에 검은 점이 있는 큰 고양이가 간이 정류장의 주인이다.


   해인사 입구 정류장에서 오후 6시 40분 버스를 탔다. 고령을 거쳐 대구서부정류장에 8시경 내렸다. 서부정류장역-동대구역-수서역으로 귀환했다. 서부정류장역-동대구역구간 전철은 약 20분 소요된다. 동대구역 구내식당에서 저녁 먹고, 역구내 이곳저곳을 잠시 둘러보았다. 수서역에 동대구역에서 서울 수서행 SRT 기차 편은 밤 12시~1시경까지 계속 있으니, 그렇게 서루르지 않아도 될 것 같다.  


해인사 주요 연중행사

1) 고려팔만대장경의 날 기념행사(정대불사)

국난극복의 염원이 모여 조성된 팔만대장경의 의의를 되새기며, 경판을 머리에 이고 동참하는 ‘정대불사’와 ‘경판이운행렬’이 진행된다. 해인사의 대표 문화행사이다. (양력 4월 넷째 주 금, 토요일)     


2) 부처님 오신 날(음력 4월 8일)     


3) 해인사 개산대재(양력 10월 16일)

개산이란 절의 산문을 여는 일, 즉 절의 창건을 의미한다. 매년 10월 16일에 해인사를 창건한 개산조 및 역대 조사스님들의 다례를 모시고 각종 문화행사를 한다.  

   

4) 보살계 수계법회(양력 10월 넷째 주 금, 토요일)

부처님 가르침에 따라 살기를 원하는 선남선녀에게 보살계를 베푸는 법회이다. 계율을 잘 지키고 잘못을 범하지 않는 것이 중요 계율이다. 즉, 깨끗하여 더러움이 없고 집착이 없는 마음을 내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참고 자료>

-. 해인사의 팸플릿(상기 상세 내용을 참고했음)

-. 나무 위키 등


   긴 글 읽어 주셔서 고맙습니다. 하루 일정의 짧았지만, 기억에 길이 남을 특별한 대가야와 해인사 여행이었습니다. 이상으로 고령 대가야와 합천 해인사 탐방을 마무리하겠습니다. 대단히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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