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녕 만옥정 공원(진흥왕 척경비,객사, 퇴천 3층석탑, 척화비)과 석빙고
설 연휴 때 경남 양산 통도사, 울산 왜성, 울산 서생포 왜성을 탐방(2025.01.25. 토, 비)했다. 다음날(2025.01.26. 일, 흐림)은 경남 창녕의 교동 고분군과 ‘송현이 특별전시전’ 중인 창녕 박물관, 철새의 낙원 우포늪을 둘러보았다. 창녕 박물관내 기획전시실에서 '송현전'이 열리고 있다. (기간 : 2024.09.27~2025.06.01)
우포늪으로 이동하기 전에 꼭 둘러보아야 할 곳이 있었다. 창녕 신라 진흥왕 척경비와 석빙고였다. 창녕 교동 고분군과 창녕박물관을 둘러보고 15분 정도 걸어서 아랫마을로 내려왔다. 진흥왕 척경비는 창녕 만옥정 공원 안에 있다. 공원에서 5분 걸음 거리의 석빙고를 둘러보았다.
창녕 만옥정 공원
봄철의 벚꽃이 장관이라고 한다. 조선시대에는 명창(名唱) 대회와 그네뛰기 대회가 열린 곳이다. 특히, 신라 진흥왕 척경비는 561년 진흥왕이 새 점령지인 창녕을 찾은 것과 당시 수행한 인물들을 기록한 비석이다. 면적 1만㎡의 도시공원으로 공원 내에는 창녕 신라 진흥왕 척경비(국보 제33호), 창녕척화비, 창녕객사, 퇴천 3층석탑, UN전적비, 창녕현감비군, 지석묘(고인돌)가 있다. 야외공연장도 있다.
창녕 신라 진흥왕 척경비 (昌寧 新羅 眞興王 拓境碑), 국보 제33호
화왕산 기슭에 소풍 갔던 초등학생에게 발견되어 알려졌다. 1914년 2월 7일 학계에 보고되었다. 그 후 1924년 지금의 만옥정으로 옮겨 보존하고 있다.
가야 연맹 관련, 큰 역사적 사건은 아래와 같다.
-. 42년 대가야 탄생(고령)
-. 532년 금관가야(김해)의 구해왕이 신라에 항복, 금관가야 멸망
-. 536년 신라가 대가야를 공격, 백제가 구원함
-. 554년 관산성 전투, 백제와 대가야 왜 연합군이 신라 진흥왕에게 패배
-. 554~561년 신라 진흥왕, 창녕 비화가야 멸망 합병
-. 561년 신라 진흥왕, 창녕 척경비 설치
-. 562년 신라 진흥왕의 이사부와 사다함이 대가야(고령)를 침공, 가야 전체 멸망
비문의 내용은 순수의 연시(신라 24대 진흥왕 22년 신사년 2월 1일, 561년), 사적, 수가인물(수행원)의 3 부분으로 되어있다. 이 창녕 지방을 점령하여 영토를 확장한 사실, 왕의 통치이념 및 포부를 간단히 밝히고, 그 뒤 대부분은 진흥왕의 순수(巡狩)를 옆에서 보좌하며 수행한 신하들의 명단을 직관, 직위, 소속 순서대로 나열하였다.
한 면을 간 다음 바깥 면 비석의 형상에 따라 음각의 줄을 돌렸는데 오른쪽 상부는 암석이 사면을 이루고 있는 관계로 일행(一行)씩 낮추어 계단식(높이 3m~1.15m)으로 되어 있다. 비문은 27행으로 한 행의 자수(字數)는 일정하지 않아 끝 행은 3자뿐인 것도 있다. 한 행의 글자 수는 일정하지 않으며, 전체 643자 가운데 400자 정도가 판독된 상태다. 윗부분은 심하게 닳아 있어 판독이 어렵지만 아랫부분은 비교적 선명하게 남아 있다. 서체는 해서체이며 글자간격은 4㎝이다.
북한산, 황초령, 마운령에 있는 순수비처럼 순수관경(巡狩管境)이란 말이 없어, 왕이 새 점령지를 다스리는 내용과 이에 관련된 사람들을 열거했으므로 따로 척경비(拓境碑)라 일컫는다.
창녕 객사(昌寧客舍)
창녕읍에 있던 객사다. 다른 곳에서 온 벼슬아치나 외국 사신을 대접하여 묵게 하던 숙소이자 임금을 상징하는 위패를 모시던 곳이다. 조선후기에 건축된 것으로 보이며, 일제 강점기 1924년에 술정리로 이전하였다가 1988년 다시 옮겨왔다. 정면 3칸, 옆면 3칸의 단층 맞배지붕 건물이다. 14개의 기둥으로 바치고 서까래 이음 부분을 비롯하여 건물 전체에 쇠못을 전혀 사용하지 않았다.
퇴천리 삼층 석탑(兎川三層石塔)
도유형문화재 제10호이며 이층 기단 위에 3층의 탑신을 세운 신라 일반형의 석탑이다. 상륜부(相輪部)는 없어지고 상층기단(上層基壇)과 갑석(甲石) 일부가 부서져 없어졌다. 상층기단(上層基壇) 면석(面石)에는 양 우주(隅柱)와 탱주(撑柱)가 새겨져 있고, 탑신 각면(各面)에는 양 우주(隅柱)만 새겨졌을 뿐 다른 조각은 없다. 옥개받침은 4단으로 되어 있다.
창녕 척화비 (昌寧斥和碑)
도문화재자료 제218호로 창녕읍 교하리에 있는 것을 광복 후 만옥정에 옮겨 왔다. 높이 1.23㎝, 폭 46㎝, 두께 20㎝ 화강암제로서「洋夷侵犯非戰則和主和賣國」이라고 새겨져 있다. 척화비는 구한말 대원군이 서양열강들이 조선 내에 세력을 뻗치고자 하므로 곳곳에 척화비를 세워 백성들이 이를 경계하고자 하였다.
창녕지구 전승비(UN 전적비)
한국전쟁 중 북한군은 1950년 8월 7일 함양과 거창 그리고 이어서 창녕 현풍을 점령하였다. 대구 포위 계획으로 낙동강의 남지읍 박진나루, 오향나루 부곡리를 공격하여 왔으나, 미군 제24사단과 제2사단이 저지하였다. 결국 낙동강 방어선을 사수하고 UN군의 인천상륙 작전의 발판이 되었다.
창녕 석빙고
석빙고는 추운 겨울에 얼음을 채취하여 더운 여름까지 보관하여 사용한 얼음 창고이다. 창녕현 관아에서 만들었다. 조선 영조 18년(1742) 현감 신서 등이 축조하였다. 길이 13.05m, 폭 4.65m, 높이 4.75m의 규모다.
창녕 석빙고는 봉토가 거의 완전하다. 외부의 모양은 마치 거대한 고분처럼 보이고 뒤에 흐르는 개천과 직각이 되게 남북으로 구축했다. 빙실의 입구는 남쪽에 설치했는데, 좌우에 장대석을 옆으로 건너지르며 쌓아 올려서 무지개 형태의 천정을 쌓았다. 바람이 잘 통하도록 돌을 맞추어 지붕을 얹고 외부로 통하는 환기공이 두 군데 있다.
벽은 잡석으로 쌓았으나 평평한 방벽이 되게 표면을 치석 했다. 구조 양식은 석빙고의 전형적인 양식을 보여주는 경주, 안동의 석빙고와 동일하다.
<참고 자료>
-. 위키 백과
-. 창녕 군청 팸플릿(창녕 9경 오세요)
-. 창녕 지도 (창녕군청 발행)
-. 창녕군청 홈페이지 : https://www.cng.go.kr/portal/_common/intro/intro.jsp
글이 길어져 우포늪 편을 마지막 회로 올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