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녕 비화가야 교동 고분군, 창녕 박물관, 우포늪(2)
가야가 궁금하여 2024.11.02 경북 고령의 대가야를 탐방하고 글을 남겼다. (https://brunch.co.kr/@jylee2020/200 과 https://brunch.co.kr/@jylee2020/201) 이번에는 경남 창녕의 비화가야(非火伽倻) 차례다.
2025년 설 연휴 때 경남 양산 통도사, 울산 왜성, 울산 서생포 왜성을 탐방(2025.01.25. 토, 비)했다. 다음날(2025.01.26. 일, 흐림)은 교동 고분군과 ‘송현이 특별전시전’ 중인 창녕 박물관, 철새의 낙원 우포늪을 둘러보았다. 창녕 박물관내 기획전시실에서 '송현전'이 열리고 있다. (기간 : 2024.09.27~2025.06.01)
비화가야(非火伽倻) 경남 창녕은 삼국사기에 불사국(不斯國)으로, 비사벌(比斯伐)이라고 기재되어 있다. 창녕 진흥왕 순수비에는 비자벌(比子伐)로 표기되어 있다. 창녕 고분군에서도 순장 문화의 흔적이 있다. 대표적인 예가 송현동 고분의 '송현이'(16세, 송현동 15호분, 현재의 송현동 1 지구 10호분)이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신라는 왕이 죽으면 남녀 각 5인을 순장했는데, 502년 지증왕(智證王)이 이를 금지했다. 신라 진흥왕이 창녕 비화가야 지역을 복속하고 세운 창녕 진흥왕 척경비(561년)를 기준으로 보면, 송현이의 고분은 561년 이전에 축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가야 연맹 관련, 큰 역사적 사건은 아래와 같다.
-. 42년 대가야 탄생(고령)
-. 502년 신라 지증왕(智證王) 순장 금지
-. 532년 금관가야(김해)의 구해왕이 신라에 항복, 금관가야 멸망
-. 536년 신라가 대가야(고령)를 공격, 백제가 구원함
-. 554년 관산성 전투, 백제와 대가야 왜 연합군이 신라 진흥왕에게 패배
-. 554~561년 신라 진흥왕, 창녕 비화가야 멸망 합병
-. 561년 신라 진흥왕, 창녕 척경비 설치
-. 562년 신라 진흥왕의 이사부와 사다함이 대가야(고령)를 침공, 가야 전체 멸망
창녕 박물관(昌寧博物館)
창녕박물관은 1996년 3월 개관했다. 2001년에는 계성고분 이전복원관을 별도로 개관했다. 4,811㎡의 부지에 세워진 지하 1층, 지상 1층 규모의 박물관 건물에 2개의 전시실과 별관인 계성고분 이전복원관, 시청각실, 수장고 등을 갖추고 있다. 토기류 85점, 마구류 45점, 장신구류 50점을 포함한 가야시대 및 신라시대의 유물 총 240종 1,012점을 보유하고 있다.
계성고분 이전복원관에는 계성고분군의 대형고분 1기를 이전, 복원하여 내부 관람이 가능하다. 시청각실에서는 창녕군 관내의 문화유적을 한눈에 알 수 있는 시청각자료를 관람할 수 있다. 주요 소장유물로는 은제허리띠, 은제새날개모양입식, 은제목걸이, 금제팔찌, 금제세환이식 등이 있다. 경상남도 창녕군 창녕읍 창밀로 34에 있다.
일제의 문화재 파괴와 약탈
박물관 내부를 둘러보고 전시품들이 다소 기대에 못 미치는, 왠지 소박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인터넷을 검색하여 보니, 그 이유가 명확히 나와 있었다. 원인은 일제 강점기의 일본이었다.
일제강점기 일본인 학자들이 고대 가야 지역을 일본이 지배했다는 ‘임나일본부설’을 뒷받침하기 위한 근거를 맹렬히 찾고 있었다. 신라 고구려 백제 가야 등지의 고분이 주요 목표물이었다. 이들은 학술조사라는 명분을 내세워 고분 하나를 2, 3일 만에 조사하고 끝내버리는 ‘날림 발굴’을 했다. 증거가 없으면, 대부분 발굴조사 보고서도 없이 중요한 유물만 챙기고 흙으로 대충 덮어 버렸다. 그들이 필사적으로 찾았지만, 임나일본부설을 증명하는 유물을 끝내 찾지 못했다. 전라도 나주 반남고분 외에는 실물들이 나타나질 않았다. 창녕고분에서는 일본과 연관되는 건직호문(건입호문)이란 무늬가 새겨진 칼집 장식 정도에 지나지 않았다. 임나일본부설은 일본기에 몇 줄 나오는 것으로 실체가 없는 허구였던 것이다.
특히, 야쓰이 세이이츠라는 자는 비화가야의 옛 터전인 경남 창녕 교동고분군의 대형 무덤 9곳을 1918년 12월부터 1919년 1월까지 불과 두 달여 만에 유물들을 싹쓸이하듯 걷어간 뒤 보고서조차 내지 않았다. 야스이는 창녕이 임나일본부설의 근거인 일본서기에 기록된 7개국 중 하나인 ‘비자벌’ 임에 분명하다는 확신을 가졌기 때문이라고 한다. 경주 금관총 등 다수의 한반도 고적조사에 관여했던 우메하라 스에지는 “무지막지하게 빼내어 반출한 창녕 교동 고분 약 100기의 출토품은 ‘마차 20대, 기차 2량’에 이르렀다”라고 증언했다. 박물관 몇 개분 소장가능한 소중하고 귀중한 유물을 무단 반출한 것이다. 우리의 역사를 절단내고 훔친 것이다.
무작정 파해친 발굴 그다음은 도굴꾼들이 하이에나처럼 청소하듯이 이삭 줍기식으로 훔치고 귀중한 유물의 흔적을 지워버렸다. 이번에는 조선에 주재하던 일본인 수집가들이 도굴꾼들로부터 그 장물들을 넘겨받아 일본으로 빼돌렸다. 특히 전기사업 성공으로 당대 한반도 최고의 부자였던 오쿠라 다케노스케(小倉武之助, 1870~1964년)는 최대의 수집가였다. 대구에 근거지를 둔 까닭에 가야 고분과 경주고분등에서 출토된 수천 점의 문화재를 수집하였다. 그의 사업 범위가 조선 전국으로 확대됨에 따라 수집 범위도 확장되었다. 빼돌린 주요 문화제는 도쿄국립박물관등에 전시되어 있다.
2019년 2월 국회에 일본 도쿄국립 박물관 보관, 오쿠라컬렉션 반환 촉구 결의안이 제출되었다. 그러나 반환에 어려움이 있었다고 한다. 유네스코와 국제사법위원회(UNIDOIT) 주도로 체결된 '도난 또는 불법 반출된 문화재에 관한 협약'에 한국과 일본이 1995년에 동시 가입했으나, 1900년대 활동한 오쿠라의 활동에 소급적용할 수 없었다고 한다. 정부 학계 지자체등의 적극적인 개입이 절실한 실정이다.
외국 간의 유사사례로, 가능하다면 진품을 한국 창녕으로 가져오고, 모조품을 제작하여 일본에 주는 것도 생각해 볼 수도 있겠다.
도쿄국립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오구라 컬렉션에는 ‘전 창녕 출토품’으로 기재된 ‘금동투조관모’, ‘금동조익형관식’, ‘단룡문환두대도’, ‘금제태환이식’ 등 7건 8점의 유물이 포함되어 있다. 모두 한국의 국보급이다. 1965년 한일협정 체결로 1432점의 문화재가 돌아올 때 오쿠라컬렉션은 포함되지 않았다.
유네스코 세계유산
창녕 지석묘(고인돌)
창녕 산성
창녕군에는 화왕산성, 목마산성등 16개의 산성이 있다. 역사적 지리적으로 중요한 곳이기 때문이다.
화왕산성(756.6m)
화왕산성은 꼭 한번 올라가 보고 싶었던 산성이다. 억새가 장관이라고 한다. 언젠가 등산할 기회가 있었으면 좋겠다. 박물관내에 화왕산성 코너가 있어 아쉬운 마음에 옮겨 기록해 본다.
봄에는 진달래, 여름에는 녹음과 계곡, 가을에는 은빛 억새물결, 그리고 겨울에는 설경이 아름다운 산이다. 화왕산 정상에는 3개의 연못과 이에 대한 전설이 전해지며, 정상부 둘레에는 창녕 화왕산성(사적)이 있다. 화왕산성 안쪽은 광활한 대평원(약 18.5㏊)의 억새초원이 장관을 이룬다.
화왕산성은 화왕산 정상에 축조되어 있는 성(城에)으로, 성곽의 둘레가 약 2.7㎞에 달하는 석성으로 자연 지형을 최대한 활용하면서 성벽을 쌓아 올렸고, 처음 쌓은 연대는 확실하지 않으나 가야시대(5~6세기)로 추정하고 있다.
화왕산성에 대한 가장 오래된 기록은 ‘태종실록’에서 찾을 수 있는데, 태종 10년 2월에 화왕산성을 비롯하여 경상도와 전라도의 주요 산성을 고쳐지었다고 하며, ‘동국여지승람’에는 성종 때에 그 기능을 상실하여 폐성된 것으로 전한다. 그러나 임진왜란 때 창녕뿐만 아니라 영산, 현풍을 아우르는 군사적 요충지로 인식되어 곽재우 장군이 의병 활동의 본거지로 활용하면서 크게 고쳐지었으며, 임진왜란 이후에도 한두 차례 중수해 지금까지도 비교적 잘 보존되어 있다.
홍의장군 곽재우는 화왕산성을 의병의 거점으로 하여 왜군이 진주를 통해 운봉으로 진출하려는 길을 차단하였고, 왜군의 경상남도 침입을 막을 수 있었던 것이 화왕산성의 지세에 힘입은 바가 컸다고 한다. 화왕산성 안쪽에는 큰 나무가 없는 평지로 약 18.5㏊의 억새평원이 사계절 장관을 이루며, 창녕조 씨 득성비와 용지(연못 명) 3기가 경상남도 기념물 제246호로 지정되어 있다.(창녕군청)
목마산성(사적)
삼국시대 지어진 포곡식 산성이다. 성의 앞면이 계곡을 향하여 수비를 위한 성이다. 신라 진흥왕의 창녕 지역 복속 진출 시에도 존재하였다고 한다. 임진왜란(1592년)과도 관계가 깊다. 이름으로 보아 후대에 말을 기르기 위한 목마장으로 사용되었을 것이라고 추정한다.
화왕산의 북쪽 봉우리부터 서쪽으로 뻗은 지맥의 끝부분에 하나의 계곡을 포용하여 창녕박물관 뒤쪽까지 축조한 산성으로 포곡식(包谷式) 산성 형식의 대표적인 예이다.
목마산성의 축성연대는 문헌에 기록이 남아있지 않아 불명확하나, ‘창녕 교동과 송현동 고분군’으로 연결되어 있고 위쪽으로는 화왕산성이 위치하는 것으로 보아 화왕산성을 방비하기 위한 외성의 역할을 한 것으로 추정하며, 따라서 화왕산성과 같은 시기의 것으로 추정한다. 목마산성 역시 화왕산성과 같은 석성이며, 사람머리 크기의 산(山) 돌을 주로 사용하였고 부분적으로 자연암반을 그대로 이용한 곳도 있다. (창녕군청)
창녕 상무좌사 유품
창녕일대의 보부상들의 유품들을 전시하였다.
계성 고분 이전 복원관
비화가야 초기에는 계성 지역이 중심세력이었다. 5세기 중엽에 비화가야의 권력 중심축이 계성 지역에서 창녕 교동지역으로 옮겨 갔다고 한다. 그 후 5세기 후엽 비화가야는 신라에 흡수되었다. 신라 진흥왕 척경비(진흥왕 22년, 561년 세움)가 증명한다. 그즈음 비화가야 고유의 토기양식이 소멸되기 시작했다고 한다.
고분군중 계성지구 2-1호분(지름 15m)을 창녕박물관 바로 옆으로 이전 복원하였다.
1500년 된 가야소녀 '송현이'
송현이가 있었던 송현동 1 고분에 꼭 한번 가보고 싶었지만, 주어진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아 아쉬운 마음으로 기록해 본다. 다음을 기약해 본다. 박물관내에 송현전이 열리고 있다.
2007년 12월 송현동 15호분(현재 송현동 1 지구 10호분) 발굴현장에서 1500여 년 전 '송현이'를 비롯해 총 4구(남 2명, 여 2명, 머리 동쪽하고 남자-여자-남자-여자 순)의 순장자 유골이 발견되었다.
15호분과 16호분은 표형분(두 개의 봉분이 표주박처럼 서로 이어 붙어 있는 쌍분)으로 16호분을 먼저 만들고 15호분을 나중에 이어 붙여 놓았다. 5세기말에서 6세기 초에 만들어진 무덤으로 봉분둘레가 64.7m, 지름은 22.4m인 앞 트기식 돌방무덤이었다. 15호분 3구의 인골은 도굴 피해로 심하게 훼손되었으나, 나머지 1구의 시신은 특별한 비교적 온전했다.
국립가야문화재연구소 중심의 여러 연구 기관이 1년간 연구 끝에 완벽하게 복원해 냈다. '송현이'의 탄생은 고고학을 비롯한 유전학, 법의학, 물리학, 인문학, 의학, 자연과학분야 최고 전문연구자들의 융합연구와 최첨단 과학기술이 합쳐진 결과물이다.
발견된 인골의 넓적다리 뼈를 통해 키를 대략 추정한 결과, 성장판조차 닫히지 않은 16세 가야소녀였다. 발굴된 뼈대를 디지털화하고 복제 뼈를 만들어 조립한 다음 인체 통계학 자료를 바탕으로 근육과 피부를 복원하는 과정을 거쳐 최종 키 153.5㎝, 허리 21.5인치인 가녀린 몸매의 소녀를 복원해 '송현이'라 명명했다.
생전에 빈혈을 의심할 수 있는 흔적과 무릎 연골의 손상이 발견되어 낮은 신분이었을 것으로 추정되었다. 순장 당시 왼쪽 귀에 금동귀걸이를 달고 묻혀, 그의 죽음을 예우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외상은 없으므로 사망원인은 질식이나 약물투입으로 추정된다.
신라의 경우 비인간적인 순장제도가 502년(지증왕 3년) 종식되었다. “전에는 국왕이 죽으면 남녀 각 5명씩 순장했는데, 이를 폐지했다(前國王薨 則殉以男女各五人 至是禁焉)는 기록이 삼국사기신라본기에 기록되어 있다. 즉, 신라에 복속되기 전의 비화가야(非火伽倻) 시대에 순장된 것으로 추정한다.
다.
<참고 자료>
-. 위키 백과
-. 창녕 박물관 팸플릿
-. 송현전 팸플릿
-. 창녕 지도 (창녕군청 발행)
-. 창녕군청 홈페이지
-. 세계일보(2023.04.10, 2019.11.28)
-. 한겨레 (2019.10.19)
-. 창녕의 문화유산 : https://uci.k-heritage.tv/data/ori/2205001/001/O/2205001-001-O00038.pdf
글이 길어져 진흥왕 척경비와 우포늪 편을 마지막 회로 올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