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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린쯔잉 Sep 06. 2021

흔들리는 버스 안에서

소년의 응답

외곽 간선 버스를 탈 때마다 느끼는 건 버스 기사들이 오래 버티지 못하고 자주 교체된다는 사실이다. 어느 정류장 앞 도로가 심하게 기울어졌는지, 어디쯤에 도로 파임이 있는지, 어디쯤에 울퉁불퉁한 둔턱이 튀어올라왔는지를 익힐 만하면 기사가 바뀌는 듯했다. 한적한 낮시간 대 버스를 이용하다보니 신임 기사와 전임 기사가 운전석 앞뒤에 나란히 앉아서 노선을 익히는 장면을 종종 본 적이 있다.


그날은 퇴근 시간 직전의 혼잡함이 시작되려는 늦은 오후였다. 먼지 낀 버스 창으로 서쪽의 황혼이 몰려드는 시각, 나는 시내에서 집으로 향하는 버스에 올랐다. 비포장도로가 아닌 곳에서도 버스는 심하게 흔들렸다. 집으로 돌아가는 버스 안에선 어김없이 눈꺼풀이 내려앉았지만 머릿속에선 또 기사가 바뀌었나보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기사의 운전은 거칠었다.

버스 문이 열리고 닫힐 때마다 마스크를 쓴 표정없는 사람들이 내리고 타기를 반복할 즈음이었다. 두 명의 중학생이 버스에 올랐다. 한 소년은 작은 체구에 어울리지 않게 무거운 가방을 메고 있었고 옆에 선 친구는 덩치가 제법 컸으나 코밑이 거뭇거뭇한 것이 막 사춘기에 접어든 듯 보였다. 졸음에 겨운 눈꺼풀을 서너 번 감았다 뜬 사이에 어느새 두어 정거장을 바람처럼 지나갔고 버스 안에는 중학생 소년과 어른 대여섯 명만이 남아있었다. 기사는 뒤늦게 하차 벨을 누르는 승객들에게 핀잔을 주면서 정류장을 몇 미터 지나친 후에야 버스 문을 열어주었다.  

경험상 대기하는 사람들로 미어터지는 인기식당의  홀서빙 이모에게 밉보였을 때와 의사 앞에서 쓸데없는 질문을 했을 때, 미장원에 연예인 사진을 들고 갔을 때 인간적인 수모를 겪곤 했지만 버스나 택시를 이용하다보니 기사의 기분이 저기압일 경우 그야말로 폭주 기관차 속의 볼모가 되기 십상이었다.


다음 정거장은 소년이 내릴 차례였다. 하차 벨을 누른 소년은 갑자기 무언가를 잃어버린 듯이 호주머니를 뒤지며 허둥대기 시작했다. 하차벨을 눌러놓고도 꾸물대면서 내리지 않는 소년을 향해 사람들의 시선이 집중되자 기사는 금방이라도 버스 문을 닫고 달릴 기세였다. 찰나의 순간에도 당황한 소년은 교통카드를 찾기 위해 호주머니에 손을 넣어보다가 다시 가방의 주머니란 주머니는 모두 열어보느라 식은땀을 흘리고 있었다.

버스 문은 여전히 열려있었고 정차 중이었지만 소년은 이미 평정심을 잃은 듯 보였다. 바로 뒤에서 소년을 지켜보던 내게 불안해하는 소년의 눈빛과 심장 박동이 고스란히 전해왔다. 나는 팽팽한 침묵을 견디지 못하고 조용히 아이를 향해 말했다.


괜찮아. 급할 거 없으니까 천천히 찾아도 돼.

 

마침 소년의 뒷 호주머니에서 교통카드가 나왔다. 무사히 하차한 소년은 버스 문이 닫히기 직전 나를 향해 외쳤다.


감사합니다~


부끄럽고 쑥스러운 마음에 소년의 음성은 매 음절이 떨리고 있었지만 분명한 발음으로 또박또박 감사의 인사를 전했다. 소년의 응답은 생면부지의 아이에게 괜찮아 라고 말하기 위해서 내가 꺼내야했던 용기보다 조금 더 크고 값지게 느껴졌다. 걸인을 향해 천원 짜리 지폐 한 장을 꺼내는 것보다 더 귀찮고 어려운 것이 마음을 꺼내는 일이다. 하지만 누군가의 마음을 받았을 때 마음으로 응답하는 일은 어른들도 쉽지 않다.

그날 소년의 응답이 준 여운이 마음 속에서 오랜 진동으로 남았던 건 단지 흔들리는 버스 안이어서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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