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린쯔잉 Oct 03. 2021

꽃잎이 지면 진짜 파티가 시작된다

댈러웨이 부인의 후예들

얼마 전 인터넷의 이 창 저 창을 마구 열다가 우연히 어떤 분의 사연을 읽었어요.


집을 나가야겠다. 곧 겨울이 올 테니 따뜻한 남쪽으로 가야겠다.

모아놓은 돈도 없고 가진 기술도 없지만 적어도 남쪽이라면 추위를 견딜 수 있을 것 같다.


그러면서 당신은 어디로 가야 숙식을 제공해주는지, 무엇을 해야 먹고 살 수 있을지를 햄버거 종류를 고르는 어린 아이처럼 물었죠.

마치 터미널 매표기 앞에 서서 행선지를 정하려는 사람처럼 당장이라도 떠날 기세였어요.

그 때 내 표정을 당신이 봤다면 어땠을까요.

지난 밤 비바람에 꺾인 나뭇가지에서 떨어진 어린 새를 발견했을 때의 표정과 크게 다르지 않았을 겁니다. 어미를 잃은 새끼 고양이가 허둥대며 위험한 찻길로 뛰어드는 순간을 목격했을 때도 나는 지금처럼 안타까운 마음을 숨기지 못했어요.

짤막한 글의 내용과 어투로 보아 당신은 권태보다 빠르게 체념에 접어든 40대 주부로 짐작되었어요. 이름조차 밝히지 않았지만 나는 당신을 로라라고 부르고 싶어졌어요. 단정하고 순수하지만 시대에 약간 뒤쳐진 느낌, 그렇다고 세상 물정을 전혀 모르는 숙맥은 아니지만. 내면의 스위치가 남들보다 조금 더 깊은 곳에 있어서 자기 안의 공간이 얼마나 크고 넓은지 혹은 얼마나 강하고 단단한지 한번도 확인하지 못한 채 살아가는 사람들은 늘 있지요. 그들도 살면서 한번은 자신을 찾고 싶은 간절한 순간이 온다고 해요. 버지니아 울프의 소설 <댈러웨이 부인> 주인공이 아마 그런 부류의 원형이 아닐까 해요. 책보다 먼저 접했던 영화  <디아워스>에는 버지니아 울프와 다른 시대를 살아가는 세 명의 여성이 등장하는데 로라는 그 중의 한 명이었어요. 다정한 남편과 사랑스러운 아들을 둔 1950년대 미국 중산층인 로라는 어느 날 집에서 무작정 뛰쳐나옵니다. 누구도 그녀 내면의 고통을 이해할 수 없기에 로라는 책에만 매달립니다.  


꽃은 자신이 직접 사겠다고 말했다. 


로라는 <댈러웨이 부인>의 첫문장을 소리내어 읽으며 등장해요. 그녀는 이 문장들을 읽고 또 읽고 심지어 집을 떠날 때도 그 책을 손에서 놓지 않습니다.

이 영화를 보는 내내 당신의 사연만큼이나 로라의 고통을 이해하기 힘들었어요. 왜냐하면 고통이란 반드시 밖으로 분출되어야 하고 흉칙하고 어두운 형상을 하고 있을 거라는 편견이 있으니까요. 하지만 로라의 고통은 화사한 프릴과 아름다운 플라워 패턴의 원피스와 정갈한 주방과 완벽한 행복의 물질적 조건 하에서 비명조차 낼 수 없도록 봉인되어 있었어요. 그녀에게 허락된 것은 행복에 겨운 미소를 짓고 우아하게 행동하고 남편의 자상함에 감사하는 일 뿐이었어요.

어쩌면 당신도 스스로 떠나는 것이 아니라, 떠밀려 나오는 것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 것은 그 사연을 읽고 한참 시간이 흐른 후였어요. 당신은 사연에 올라온 것처럼 가방을 꾸려 남쪽으로 갔을까요? 내 머릿속에는 그날 저녁 냉동실에서 꽁꽁 언 오겹살을 꺼내고 굽고 된장찌개를 끓이고 후식 과일까지 모두 내놓은 후에 시끄러운 티브이 소음에 익숙해진 듯 방에 들어가 책을 잡았을 당신의 모습이 그려졌어요.

부디, 당신이 읽고 있던 책이 <댈러웨이 부인>이 아니기를 바랍니다.

주부이건 캐리어가 있건 여성은 다른 모든 여성의 도플갱어로서 존재할 수밖에 없는 선형적인 굴레가 끝없이 되풀이되는 이유는 뭘까요. 당신이 사연을 올리기 전에 스스로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찾았다면 어땠을까 아쉬움이 남습니다. 여성이 자기 안의 질문에 스스로 확신을 갖는 날이 오기를 바래요. 그 질문이 무엇이 되었건 확신 하나만 있다면, 생의 파티는 그때 시작되어도 늦지 않을 테니까요. 




작가의 이전글 인간은 말이 아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