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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린쯔잉 Sep 30. 2021

인간은 말이 아니다

<오징어 게임> 속 취약한 여성 연대와 비극적 결말이 남긴 여운

거리에 두 사람이 걸어간다. 둘 중의 한 명은 지난 주말, 오징어 볶음을 먹었거나 아니면  <오징어 게임>을 보았을 것이다. 다음 주가 되면 전세계 인류는 <오징어 게임>을 본 사람과 안 본 사람으로 나뉠지도 모른다. 

밑바닥 인생을 살아가던 사람들이 기사회생을 꿈꾸며 죽음의 게임에 참가한다는 설정이 어디선가 본 듯도 하지만 이 시리즈가 주는 메시지만큼 선명한 주제도 없는 것 같다.


사는 것은 고행이고 

타인은 지옥이며 

인간은 타자의 욕망을 욕망한다.


<오징어 게임>에서 이러한 메타포들은 낭자한 선혈로 재현된다.


(돈없이) 사는 건 고행이고

(반드시 이겨야 하는) 타인은 지옥이며

(경쟁 구도의) 인간은 타자의 욕망(상금)을 욕망한다.


국내는 물론이고 해외 거의 모든 매체들이 앞다투어 기사화할 만큼 <오징어 게임>은 최근 가장 많은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드라마임에 틀림없다. 작품에 대한 호불호와 비평이 이처럼 극명하게 엇갈렸던 적이 또 있었을까 싶을 만큼 인터넷은 연일 새로운 관련 기사로 넘친다. 


가장 큰 논쟁의 불씨는 '이 안에서는 바깥 사회와 달리 참가자 모두 공평하고 정당하게 게임'을 치른다는 극중 프론트맨의 주장이 과연 게임 과정에 관철되었는가 하는 논란이다. 드라마는 드라마일 뿐, 제작진이 대선에 나와 공약을 한 것도 아니므로 즐기면 그만이지만 이 역시 <오징어 게임>의 인기를 반영하는 증표이자 장외 관전자(시청자)들의 유희가 아닐까 싶다. 


예를 들어 혹자는 유리 다리 건너기 게임에서 전직 유리 기술자가 빛의 반사를 이용해서 강화 유리를 구별해내자 프론트맨이 조명을 차단하는 장면을 놓고 '참가자의 재능을 발휘할 일생의 기회를 박탈하는 처사이자 그들 스스로 말하는 공정한 게임의 룰을 저버린 행위'라는 주장을 편다. 그의 주장은 일견 맞고 일견 틀리다. 유리 다리 건너기는 합심이 강조되는 단체전이 아니었다. 게임의 공정성은 특정 참가자에게 유리한 어떤 조건도 묵인하지 않음으로써 유지된다. 토끼와 거북의 경기 자체가 넌센스인 것과 같은 이치이다. 따라서 경쟁 관계에 있는 다른 참가자와 똑같이 제로인 상태로 게임에 임해야 한다는 전제가 우선되어야 할 것이다. 조명을 차단하여 유리 기술자 또한 다른 참가자와 동일한 조건 하에서 유리 다리를 건너게 한 프론트 맨의 결정이야말로  <오징어 게임>의 잔혹하고 냉정한 원칙을 가장 잘 드러내는 장면이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나의 취향도 아니었던 이 드라마를 끝까지 보게 만들었던 이유는 우승자는 누가 될까? 혹은 프론트맨의 정체는 무엇일까? VIP들은 왜 이런 게임을 만들었을까? 하는 것보다는 새벽과 지영, 이 두 명의 여성 참가자가 남긴 긴 여운에 있었다.


게임이 진행될수록 참가자들은 눈치 싸움을 벌인다. 그러나 결론은 단순무식하다. 힘쎈 남자들끼리 무리를 지어 상대편을 빨리 탈락시키는 전략 뿐이다. 새벽과 지영은 게임이 발표되고 팀원을 구성하는 10분 동안 이들로부터 철저히 배제를 당한다. 완력을 사용하거나 덩치값을 하거나 하다못해 성적인 어필도 할 수 없는 미숙하고 어린 여성들은 바깥세상에서나 게임세상에서나 존재감을 갖지 못한다는 현실적인 벽에 부딪친다.


결국 구석에 홀로 앉은 지영에게 손을 내민 것은 천민 취급을 받던 탈북소녀 새벽 뿐이었다. 이들의 연대는 원초적인 취약성을 안고 비극적인 결말을 예고한다. 이들은 남성 위주의 경쟁 구도와 세력의 권력화에서 밀려나 사각지대 안에서 우연인 듯 필연인 듯 손을 잡는다.  새벽은 왜 나한테 함께 하자고 했냐고 묻는 지영에게 말한다.


"너밖에 없었어. 같이 해줄 사람이."


두 사람의 연대는 그래서 더욱 비극적이다. 자신에게 손을 내민 사람을 내 손으로 죽여야 한다는 설정은 비극 좋아하는 세익스피어도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다.


요즘 퀴어 소설 속 여여 커플을 굳이 대입하지 않아도 두 어린 여성의 연대는 결국 세상에서 이해받을 수 없는 자신의 존재를 알아주는 유일한 상대에게 바치는 순혈적 결합이지만 결과는 남성 중심 사회에서 행해지는 배척과 배제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다만 게임이 끝나고 지영이 죽기 직전, 끝끝내 입을 다물고만 있던 새벽이 비로소 자신의 이름을 알려주는 장면에서 남성 중심의 흑백서사에서 미세한 빛이라도 발견한 듯한 따스한 위안을 얻는다. 두 사람은 240번과 67번이 아닌, 지영과 새벽으로 서로의 독립적인 존재를 알아주었고 서로의 이름을 마지막으로 불러준다. 

상금의 숫자와 서로의 등번호가 아닌, 나 아닌 다른 존재에 대한 인식이야말로 어쩌면 인간이 말과 다른 점이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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