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이 자발적 수발러라는 증거
딸바보 엄마의 고백
딸들이 어릴 때 저는 주변에서 좀 유난스러운 엄마였어요. 오죽하면 두 딸과 함께 있고 싶어서 평생 재택근무자를 자처하며 프리랜서라는 직업을 택했을까요. 아이들과 아침에 눈을 뜨고 잠드는 그 사이 사이, 시간이 허락하는 모든 것을 함께 하고 싶었답니다. 번역 마감이 코앞에 다가와도 바쁜 틈을 쪼개어 간식을 만들고 함께 영화를 보고 전시장에도 가고 연예인 덕질도 함께 따라다녔죠.
큰딸은 빵을 무척 좋아했어요. 덕분에 저는 딸의 중고교 시절 다양한 레시피의 빵과 샌드위치를 만들어서 친구들 몫까지 보냈어요. 당시 내성적인 편이었던 딸의 기를 세워주고 싶어서 일부러 양을 넉넉히 만들어 보낸 거죠. 지금도 딸의 옛 동창들은 그 시절 제가 만든 빵맛을 기억한다고 하더군요.
30명쯤 되는 딸의 학급에서 어쩌면 저는 31번의 번외 학생이었는지도 모릅니다. 한번은 학교 축제에 찾아갔을 때의 일이었어요. 곧 무대에 올라가야 하는 딸이 울렁증으로 부담스러워할 때 저는 이렇게 말해줬답니다.
"네가 실수해도 아무도 몰라. 엄마도 너만 보잖아. 다른 엄마들도 전부 자기 딸만 쳐다보니까 떨지 말고 마음대로 춰."
주변을 오글거리게 하던 이 모녀가 지금은 틈만 나면 독립을 외치는 갱년기 여인과 어엿한 직장 생활 1년차에 접어든 사회 초년생이 되었지만 저는 가끔 유모차를 밀고 가면서 아이에게 다정하게 속삭이거나 아장아장 걷는 아기 등 뒤에서 눈을 떼지 못하는 젊은 엄마들을 볼 때면 그 시절이 마치 까마득한 전생의 이야기인 양 아득하기만 해요.
영원히 멈춰있을 것만 같던 육아와 양육이라는 무한 루프 시절에서 벗어난 것이 때론 시원섭섭한 기분이 들어요. 그 시절 아이와의 친밀한 애착 관계에서 느꼈던 심리적 충일감을 떠올리면 가끔은 테이프를 되감고 싶어 지거든요.
물론 딸에 관한 일이라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고 아픈 것도 잊곤 하는 저를 사람들은 딸바보라고 했지만 제 생각은 조금 달랐어요. 금수저니 엄빠 찬스니 하는 말들이 흔하지만 우리 아이들은 금수저도 아니고 엄빠 찬스를 누릴 만큼 대단한 위치에 있거나 재력을 갖춘 부모를 둔 것도 아니었으니까요.
저의 신념은 단순했어요. 아이들이 성장하는 매 순간, 내가 해줄 수 있는 것을 아낌없이 해주자는 마음 뿐이었어요. 그런데 여기에도 관성의 법칙이란 게 작용하나 봅니다.
적당한 순간이 오면 손을 떼겠다는 결심은 어디로 가고 지금도 딸에 관한 일이라면 두팔 걷어부치고 나서려는 저를 봅니다. 지난 해, 딸의 첫 출근을 앞두고 저는 딸의 새구두를 몰래 신고 거실을 걸어다녔어요. 혹시라도 딱딱한 가죽에 닿은 발이 아플까봐 밤새 미리 신어서 가죽을 길들여놓으려던 거였죠. 코로나 감염을 우려하여 식당 가기를 꺼려하는 딸의 도시락과 간식을 싸주는 저는 지금도 예전처럼 딸의 회사 동기들 간식까지 싸고 싶은 충동을 꾹꾹 누릅니다.
딸의 학창시절, 저희 가족은 학교까지 차로 5분, 도보로 10분 거리에서 살았어요. 아침마다 집을 나서서 학교 정문에 들어서는 모습을 아파트 베란다에서 내려다보는 일은 하루 중 가장 행복하고 가슴 벅차오르는 시간이었죠. 그런데 말이죠. 한번은 반전이 일어났어요. 큰딸이 그러더군요.
"엄마는 친구 없어? 왜 나랑만 놀려고 해?"
그 말은 저의 머릿속에 총알처럼 와서 박혔고 종소리처럼 메아리 쳤어요. 친구, 친구가 없냐고? 지금껏 너희들이 내 친구였어, 갑자기 그건 왜 묻는 거지? 저는 큰 충격을 받았고 혼란스러웠어요.
"엄마가 맨날 학교 앞으로 데리러 오는 바람에 친구들하고 친목도모도 못했잖아요."
고등학교 3년 내내 딸은 학급 임원활동이나, 학원수업, 봉사활동, 사생대회 등등으로 시간을 분단위로 쪼개었기에 엄마의 뒷바라지가 없으면 그 모든 일정을 소화해낼 수가 없었어요. 매일같이 차로 등하교를 시키고 학원과 스터디, 미술학원을 오가다 집에 돌아오면 한밤중이었죠. 보충 수업이라도 있는 날이면 가로등 아래 비상등을 켜놓고 잠복근무 형사처럼 대기했습니다. 대학에 간 뒤에야 저는 딸로부터 분리될 수 있었지요.
다행인지 둘째는 첫딸과는 다른 성향을 가졌기에 훨씬 자유롭게 키웠지만 내심 제 손길을 거부하는 둘째를 보면서 아쉬운 마음이 들기도 했어요.
머지않아 두 딸은 엄마 품을 벗어나 훨훨 날아갈 테고 그런 날이 오면 나도 내 인생을 살겠다는 결심을 그 무렵에 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요, 사람은 정말 제 버릇을 버릴 수가 없나봅니다.
고즈넉한 오후였어요. 가족들은 각자 자기 방에서 제 할 일에 몰두하고 있었고 그즈음에는 저도 딸들을 향한 안테나를 거의 접었노라고 선언한 후였죠. 30분 쯤 지났는데 딸이 무엇을 하는지 슬슬 궁금해지는 겁니다.
그러다 갑자기 저를 부르는 둘째의 반가운 목소리가 들려왔어요.
"엄마 불렀니? 간식 줄까?"
"아니, 안 불렀는데."
"어? 분명 네 방에서 소리가 났는데?"
"엄마 부른 거 아닌데..그냥 방귀 뀐 거야."
뽀옹~ 소리를 엄마를 부르는 거라고 착각했던 걸까요?
자발적 수발러에서 탈퇴하려면 전 아직 멀었나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