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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린쯔잉 Oct 11. 2021

향유의 풍경

오후의 소묘  <고유한 순간들(가제)> 객원 에디터 참여 후기

오래 전 초보 번역가 시절의 실수를 떠올리면 이불킥을 하고 싶어질 때가 있다. 번역이라는 1차 창작물이 편집이라는 2차 창작을 통해서 어떻게 독자의 손에 이르게 되는지 그 프로세스를 전혀 알지 못했던 시절의 일이었다. 교정지에 앉힌 인쇄물을 받아들자 나는 열정에 사로잡혀 교정지를 온통 빨간펜으로 물들여놓았다.

그 후에 편집자로부터 한 통의 메일을 받았다.


선생님, 보내주신 수정 사항은 최대한 반영하겠으나 이미 디자인이 완료된 상황이라는 점을 양해바랍니다.


편집과 디자인이라는 개념에 관해 장착하게 되는 순간이었다. 에디터란 매우 섬세하고 정교한 시선으로 숲과 나무 어느 한 쪽도 놓쳐서는 안 되는 직업이라는 사실도 알게 됐다. 그로부터 먼 훗날의 일이지만 짧게나마 교정과 교열에 관한 강의를 들으면서 편집의 영역에 대해 또다른 시각을 갖게 되었다.


얼마 전 평소 애정해오던 오후의 소묘에서 객원 에디터를 뽑는다고 했을 때 가슴이 쿵쾅 거렸다. 실용서나 입문서를 교정본 일은 있었지만 그쪽은 사실 나의 관심 영역이 아니었다. 그동안 이론과 실전을 통해 배운 것들을 활용해보자. 이 잡듯이 오탈자를 찾아내리라. 오후의 소묘에 대한 팬심과 더불어 약간의 승부욕마저 작동되었다. 하지만 교정지가 도착하자마자 이러한 동기는 허공으로 사라져버렸다.

<사루비아 다방 티블렌더 노트> 라는 부제를 단  <고유한 순간들(가제)>을 읽어내려가는 동안 나는 그저 한 명의 순한 독자가 되어갔다.

오탈자를 잡아내려는 분투나 세밀한 공정에 대한 냉엄한 검토 대신 차가 지닌 품격어린 물성과 티 블랜더라는 직업의 매력, 기성 작가 수준의 함량 높은 원고를 읽는 재미에 푹 빠져버렸다. 출판사에서 보내주신 교정지가 사실상 거의 완벽한 편집을 마친 상태였기에 잡아낼 '옥의 티'가 거의 없었다는 이유도 한몫을 했다. 글을 읽는 내내 객원 에디터로서의 의무 대신에 최초 독자로서의 기쁨으로 충만해갔다.  

"나는 차를 마시고서야 비로소 식물을 알게 됐다." 라는 본문 내용처럼 나 역시 이 책을 읽고 나서야 비로소 "차"를 알게 된 것 같았다. 차란 커피를 마시지 못하는 사람을 위해 카페 메뉴판 구석에서 구색을 맞추고 있는 음료라는 기존의 관념을 완전히 바꾸게 되었다. 티 블랜더로서의 맹렬한 직업 의식과 함께 인간적인 체취를 뿜어내는 에피소드와 예술과 미학에 대한 저자의 시선은 온통 향미로 가득했다. 이를 테면 오감을 자극하는 이런 문장들 앞에서 나는 소름마저 돋았다.


차에선 풀향이 났다. 갓 구운 빵 냄새만큼이나 식욕을 돋우는 기름진 흙과 숙성된 고엽들, 신성한 숲에서 자생하는 각종 지의류와 버섯류, 심지어 아기의 배냇냄새도 났다.


각각의 챕터와 작업 노트 사이사이에 삽화처럼 들어간 사진들은 고요하면서도 소란하지 않은 풍경처럼 글과 하나가 되어 있었다. 시인 메리 올리버, 칼 크롤로브, 보르헤스, 슈젤탈, 가노 산세츠의 문장과 시구를 적절히 인용한 덕분에 인문학적 깊이마저 느껴졌다. 이렇게 마지막 디저트 접시를 싹싹 비우듯 원고를 읽고 난 후에 나는 모처럼 커피가 아닌 차를 마시고 싶어졌다. 오랫동안 사용하지 않던 찻잔 세트를 꺼내고 비록 티백이지만 붉은빛이 돌 때까지 기다렸다.

찻물이 우러나는 시간은 3분이었다. 하지만 그 시간을 음미해본 건 오늘이 처음인 것 같았다.

또 다시 본문의 문장이 떠올랐다.


 "향유의 풍경이 저렇게 한가롭다. 만사가 순조로운 풍경."

늘 산만하고 번잡하던 나도 그 향유의 시간들에 집중할 수 있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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