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린쯔잉 Nov 12. 2021

식물의 아이가 써내려간 향미의 문장들

티블렌더의 작업 노트를 훔쳐보다

누군가의 노트를 훔쳐보는 기분은 어떨까. 속마음이 고스란히 드러나 있는 문장을 볼 때면 그가 못 견디게 궁금해질 것이 분명하다. 더구나 차와 식물과 향미에 관한 이야기를 이토록 아름답고 매력적이고 감각적으로 써내려갈 수 있다면 대체 티블렌더라는 직업이 어떤 것인지 호기심이 증폭될 것이다.

갓 출간된, 사루비아 다방의 대표이자 티 블렌더인 저자 김인 님의 작업노트를 읽게 되었다. 대표답게 엄청난 영업 비밀이나 혹은 연금술사와 같은 기적의 티블렌딩 비율이 적혀 있을 줄 알았다면 실망할 준비를 해야 한다. 저자는 장인으로서의 위엄을 버리고 "차를 마시고서야 비로소 식물을 알게 됐다. 식물이야말로 내가 상속받은 가장 위대한 유산이라는 것도 알게 됐다. 나는 식물의 아이였다" 고 고백할 만큼 천진한 문장으로 시작한다. 사실 이 책은 첫 장부터 오감을 자극하는 향미로 가득하다. 10년 전 쯤인가? 나는 수백 년 된 수령의 삼나무가 즐비한 일본 사찰의 숲속을 산책한 적이 있었다. 비가 내린 직후라서 축축한 나무의 속살 냄새와 풋풋한 풀 향, 낮게 떠다니는 짙은 흙내음으로 사방이 가득했다. 이 책의 서문은 오래전 감각을 단숨에 불러와 코를 벌름거리게 만들었다.     


"차에선 풀 향이 났다. 그것은 당연했다. 그런데 꽃과 과일 향도 났다. 갓 구운 빵 냄새만큼이나 식욕을 돋우는 기름진 흙과 숙성된 고엽들, 신성한 숲에서 자생하는 각종 지의류와 버섯류, 심지어 아기의 배냇냄새도 났다." 

저자는 또 "차는 잊고 있던 기억을 되살려준다고, 의식의 표면 위로 떠오르지 않기를 바랐던 기억도 있지만, 차를 마시면 그런 기억마저도 견딜 만한 것이 됐다고" 썼다. 나는 문득 그동안 관심 밖이었던 차에 대해서 알고 싶어졌고, 안달이 날 만큼이나 차가 마시고 싶어졌다. 하긴 고상한 영국인들조차도 맑게 우려낸 찻잎의 향미에 반해서 오후의 티문화를 만들었고 차를 수입하느라 중국으로 흘러들어간 은을 빼내고자 동인도 회사를 만들어 마침내 아편전쟁까지 벌이지 않았던가. 


누군가의 글을 읽고 오랜 습관, 특히 무심결에 눈만 뜨면 입에 대던 커피일색의 취향을 바꾸는 계기가 되었다면 그 문장의 힘은 정말 대단한 것이다. 이런 아름답고 내밀한 글을 써내려가는 사람이 만들어내는 차는 대체 어떤 맛일까 어찌 궁금하지 않을 수 있을까. 


"향미는 이미지들의 결합이고 기억과 시간들의 콜라주였다. 쓰지만 달콤했고 쓸쓸한 것과 그렇지 않은 것들이 눈부시게 중첩됐다."


저자의 작업노트를 읽어내려가다보면 좋은 차는 결국 한 영혼이 가진 고유한 체취에 의해서 만들어진다는 깨달음을 얻게 된다. 평범한 인간의 사색과 장인으로서의 고뇌는 차라는 미학적 가치 안에서 눈부시게 빛나는 고유한 순간을 만들어냈다. 이 책의 제목이 왜 고유한 순간들인지, 왜 고유한 순간들이어야만 하는지 알 것 같았다.    


저자는 종교학자이자 철학가인 미르치아 엘리아데의 말을 인용하여 티블렌더라는 직업을 이렇게 정의했다. 

"무엇인가를 만든다는 것"은 그것을 "고안"해내고 저절로 "나타나게"하는 주문을 아는 것"이고 "쓸모 있는 물건을 만드는 사람이란 만드는 비밀을 아는 사람"이라 했다. 티블랜더에게 저절로 '나타나게'하는 주문은 무엇일까. 무엇을 알아야 비밀을 아는 사람이 될까. 처음에 나는 그것이 소재라고 생각했다. 소재를 무궁무진하게 알면, 굉장한 차를 만들 수 있을 것이라고, 그런데 가면 갈수록 그것이 전부가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가령, 만 가지 소재를 알더라도 그것을 특정한 향미로 '나타나게'할 수 없다면 만 가지 색을 구분하더라도 그림을 그리지 못하는 것과 같다.


이 문장이 어찌 티블렌더에게만 해당하는 말이겠는가. 향미를 조합하는 능력이란 최적의 식물을 찾아내는 일이 아니라 식물과 식물이 지닌 최적의 향미를 찾아 조율하는 일이라는 그의 문장에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어쩌면 각자가 치열하게 살아가는 모든 자리에서 이러한 주문이 필요하지 않을까. 

본문 인용문 가운데 시인 메리 올리버는 어느 여름날 아침을 회상하며 그날은 평범했지만 위대한 일이 행해지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고 했다. 그날 이후로 몇해동안 그 순간을 토대로 많은 결정을 내렸다고. 


위대한 일이 행해지는 순간은 의외로 평범할 수 있다. 누구나의 삶에 깃든 그 "고유한 순간들"을 이 책을 통해서 만나보기를 바란다. 



#오후의 소묘에서 출간된 <고유한 순간들>을 읽고 쓴 글입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