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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린쯔잉 Dec 14. 2021

연애소설은 한번도 시작된 적이 없다.

부희령 작가의 <구름 해석 전문가>를 읽고

남자들에게도 험난하다는 네팔의 산간벽지를 향해 홀홀히 여행을 떠난 여자가 있다. 이경. 그녀의 배낭에는 소설가 선우로부터 떠안기다시피 받아든, 암호를 풀 수 없는 노트북이 담겨있다. "어떤 우연에든 매달리고 싶던" 이경은 빗줄기가 흩뿌리는 낯선 도시의 외딴 골목을 헤매다 마주친 상운과 진상, 두 청년을 만나 "예전에는 하고 싶어도 하지 않던 일들"에 선선히 자신을 맡긴다. 하지만 정전이 잦은 포카라보다 더 자주 변덕을 부리며 제멋대로 나타났다 사라지던, 구름에 갇힌 설산보다 더 실체를 알 수 없는 선우에 대한 미련으로부터 한 치도 벗어나지 못한다.

세 사람은 어찌어찌하여 러시아에서 온 기타리스트의 연주를 함께 듣거나 티벳 식당에서 식사를 하거나 보트를 타러 호수에 간다. 이처럼 "기댈 데 없이 허술한" 여행의 돌발적인 여정 틈틈이 이경은 선우에 대한 기억을 헤집는다.

말하자면 선우는, "나쁜 남자'였다. 혀에 감긴 취기를 무기로 한밤중에 전화를 걸어 "꽁치 통조림은 어떻게 먹어야 하죠?"라고 묻는 그는 차갑게 밀봉된 이경의 마음에 틈새를 만든다. 그러나 선우는 "그토록 들어오겠다면서 고집을 부리던 그 (현관)문을 스스로 열고" 이경에게서 떠나버린다. 이경은 그가 남긴 노트북의 암호를 풀기 위해 끙끙 거리다가 "은퇴한 쿠마리들이 모여사는 산장"에 함께 가자는 상운의 제안을 받아들인다. 토할 정도로 가파르게 이어지는 돌계단을 끝없이 오른 끝에 이경은 "더는 걸을 수 없는 한계에 이르렀다고 생각했을 때, 시야가 확 트이면서 숲이 끝"나는 극한의 체험을 하게 되고 대체 이렇게 험난한 돌계단을 올라올 사람이 누가 있을까 싶던 바로 그 산장에서 편히 쉬고 있는 다른 여행자들을 보며 놀란다.

"여신의 자리에서 살다가 평범한 사람으로 돌아온 쿠마리의 삶은 어떤 것일지",  "한 번 인생의 영광을 맛본 사람은 끊임없이 과거로 돌아가고자 애쓴다는데"라고 중얼거리는 이경은 어쩌면 그 순간에도 선우에 대한 미련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끊임없이 선우를 떠올렸는지도 모른다. 구름인듯 안개인듯 불확실했던 선우와의 짧은 연애 감정은 이경을 한껏 들었다 내려놓았으나 정작 실체도 없이 식어버린 이 감정을 무어라 해석해야 좋을지 누구에게든 묻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이경은 이러한 무의식을 스스로도 알지 못한 채 상운과 짜이를 마시며 또 다시 알듯말듯한 대화를 나눈다.


구름이 걷힐 때도 있어요? 설산이 완전히 드러나기도 해요?

그럼요.

나는 여기에 와서 구름이 걷힌 것을 본 적이 없어요.

구름은 산을 타고 가장 높은 곳까지 올라가요. 산을 완전히 보려면 구름 아래에 있어서도 안 되고, 구름 속에 있어서도 안 되고, 구름 위에 있어야 해요.

네? 여기서도 보인다면서요?

아, 그랬나? 내가 구름 전문가는 아니거든요.  


이곳에 몇 번 와본 적이 있다는 상운은 초행인 이경을 만나는 순간부터 다정함과 친절, 그 이상의 선의를 보이지만 역시 결정적인 순간에 쓰윽 얼버무리고 만다. 사람들은 도시 여기저기에 온통 환한 조명을 밝히고 모든 사물을 현미경처럼 샅샅이 꿰뚫고 있다고 자만하지만 정작 잘 안다고 믿었던 어떤 사물의 진상도 명백히 가려낼 수 없음을 오지에 와서야 맞닥트리게 되는 걸까.

인간과 인간 사이에 흐르는 감정과 호의, 선의, 친절, 다정함 혹은 연애감정마저도 구름에 가려진 설산처럼 온전히 제모습을 드러내지 못하는 것이 오롯이 현대인들만의 비극은 아닐 것이다.


상운은 이경과의 첫 만남에서 자신을 "어떤 일을 전문적으로 해본 적이 한 번도 없"는 사람이라고 소개한다. "그런데 전문가가 아닌 사람 중에서는 무슨 일이든 가장 전문가처럼 할 수 있는 사람"이라고도 말한다. 이경 또한 상운이 진상이 말한 것처럼 "사람들이 자기를 좋아하는 마음을 그냥 지나치지 못하는 사람"이건, 혹은 그냥 (연애)전문가가 아니면서도 (연애)전문가인 척 할 수 있는 "친절한 남자"이건 그 의미가 다르지 않다고 생각한다.

그날 밤 이경은 선잠에서 깨어 어두운 객실 밖으로 나가고 주위를 둘러보다가 "안개라고 여기던 희뿌연 덩어리들이 구름"임을 알게 된다. 그리고 "산을 보려면 구름 아래에 있어서도 안 되고, 구름 속에 있어서도 안 되고, 구름 위에 있어야 한다"던 상운의 말을 되새기며 웃는다.

이제 더 이상 선우의 일들이 궁금하지도 않고 전생처럼 멀게만 느껴진 이경은 "무슨 글을 쓰려고 했던 거냐"고 물었던 상운에 대한 대답인듯 자신을 나무라며 읊조린다. 선우가 쓴 선우의 이야기가 아니라 내가 쓴 나의 이야기를 읽고 싶었어야 했다고. 그의 삶이 아니라 나의 삶을 바라보아야 했다고.


이경은 만년설을 보지 못하고 포카라를 떠났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적어도 "그 나이될 때까지 제대로 쓸 수 없었으면 영원히 못쓰는 거"라는 선우의 주문에서 벗어나 갇혀있던 자신의 삶을 바라볼 수 있게 되었을 것이다. 이것은 어쩌면 셋이서 탔던 보트가 뒤집혀 물과 보트 사이에 이경이 갇혀 있던 순간, 보트 밖으로 빠져나가려면 물속으로 더 깊이 들어가야 한다는 것을 스스로 깨달았던 것과 같은 크기의 확신일 것이다.


부희령 작가의 안정적인 문체와 더불어 낯선 이국의 향취, 이야기 곳곳의 수많은 상징들로 인해 마치 암호를 해독하듯 모처럼 재미있게 읽었던 단편, 황해문화 2021년 겨울호를 통해 만나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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