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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린쯔잉 Aug 31. 2021

검은 고양이가 내 삶으로 찾아왔다

캣맘의 우연한 탄생

한 번도 고양이를 원했던 적이 없었다. 더구나 검은 고양이는 꿈에도 생각해보지 않았던 일이다.                


6년 전에 시작된 해외 주재원의 삶은 우리 가족 모두를 조금씩 갉아먹었다. 난생처음 다양한 국적의 외국인들과 함께 학교를 다니게 된 둘째는 언어 장벽과 함께 사춘기가 맞물려 초반에 부쩍 외로움을 탔었다.     

그해 나는 고3인 큰딸과 한국에 남아서 입시를 준비했고 주말이면 둘째가 있는 도시로 날아가서 엄마의 부재를 메워야 했다. 어느 한쪽에도 안착하지 못한 채 핑퐁처럼 두 도시를 오가던 시절이었다. 알레르기 비염이 심한 남편은 1년 넘도록 아이가 졸라대자 마침내 강아지를 데려와 주겠다고 약속했다. 내게는 돌봐야 할 대상이 또 늘어났구나 싶은 푸념 말고는 별다른 감흥도 기대도 없었다.                    


우리가 살았던 도시는 반려동물의 천국이었다. 저녁이나 주말이면 도심의 노천카페나 산책로마다 인간의 우월함을 넘어서는 고급 견종들이 행인들의 인기를 독차지했다. 위풍당당한 리트리버, 군살 하나 없는 날렵한 라인에 윤기가 촤르르 흐르는 세퍼드, 연예인처럼 단장하고 산책에 나선 푸들이나 인형 같은 포메라이언은 길 가던 사람들이 걸음을 멈추고 돌아볼 정도였다. 딸과 나는 주말 저녁이면 종종 펫샵에 들러 신기하고 아기자기한 강아지 용품들을 재미삼아 구경하곤 했다.          

어릴 적에 이미 다섯 마리의 강아지를 길러봤던 나는 말티즈 정도면 무난할 거라고 막연하게 예상했었다. 초등학교 시절 학교 도서관에서 빌려본 후로 밤이 되면 혼자 화장실도 못 갈 만큼 등골이 오싹했던 에드거 엘런 포의 소설 <검은 고양이>가 설마 내 삶에 찾아오리라는 걸 어찌 알았을까.      

내 머릿속의 검은 고양이란 죽은 아내의 시신과 함께 밤마다 담벼락 안에서 흐느껴 우는 불길한 이미지. 소름끼치는 공포. 그 자체였다.      


외국에 나간다고 할 때 주변의 반응은 부러움 일색이었다. 하지만 이국의 낯선 도시에 하루 아침에 불시착한 아줌마를 반겨주는 사람은 없었다. 주부 내공 9단도 언어의 장벽 앞에서는 소용이 없었다. 어딜 가도 자꾸만 움츠러들었다. 아침이면 남편과 아이는 회사와 학교로 향하고 온종일 사람과 대면할 기회가 거의 없었다. 골프 회동이나 비슷한 부류끼리 어울리는 먹자계 모임에 도통 관심이 없던 나는 마트에 다녀오거나 요리를 하거나 책을 보는 일 이외에는 콘도 내 짐에서 운동을 하거나 인터넷 세상에서 시간을 때웠다. 아무라도 좋으니 속 깊은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지만, 식당 종업원이나 마트 계산원들과 나누는 짧은 대화는 번번이 세 마디 이상을 넘지 않았다.      

그 시절 내 안에는 차갑고 딱딱한 콘크리트 빌딩에 갇힌 채 울음소리조차 내지 못하고 웅크리고 있던 작은 고양이 한 마리가 들어있었던 건지도 모른다.                    

타향살이의 외로움을 잊게 해줄 반려동물의 등장은 의외였다. 하얀 털이 북슬북슬한 순둥이 말티즈가 아니라 작은 새끼 고양이였다. 광고에서 흔히 보는 사랑스러운 고등어 태비나 노랑이 치즈였다면 좋았을까.  익히 상상하던 고양이가 아니라 까만 털실을 아무렇게나 뭉쳐놓은 듯 삐죽삐죽 제멋대로 뻗친 털로 뒤덮인 검은 고양이. 북극 오로라를 연상하게 하는 초록색 눈자위와 검은 눈동자의 대비는 보는 이를 움츠러들게 했다. 속내를 알 수 없는 검은 고양이는 케이지에서 나오자마자 집안을 어슬렁대기 시작했다. 대체 어디서부터 손을 대야 할지 전혀 감이 오지 않았다.      

검은 고양이는 소파며 식탁 의자 다리에 얼굴을 대고 비벼댔다. 고양이 특유의 영역 표시 행동이었으나 고양이의 습성에 관해 전혀 몰랐던 나는 기겁하며 외쳤다.     


"어디가 가려운 봐! 설마 피부병은 아니겠지?"     


고양이는 어느새 책상 아래로 기어들어가 등을 동그랗게 말고는 잠이 들었다.     

연일 30도를 웃도는 바깥 기온 탓에 매일 산책을 시켜야 하는 강아지보다는 실내에만 머무는 고양이가 키우기 편할 거라는 건 순전히 남편의 생각이었다. 처음에는 한 마디 의논도 없이 강아지 대신 고양이를 덜컥 데려온 남편에게 화가 났지만 점차 집안에서 우두커니 누군가 돌아오기만을 기다리는 내 신세가 저 고양이와 뭐가 다를까 싶어서 애처로운 마음이 들기 시작했다. 

타인의 손길을 그리워하지도 않고, 존재감을 드러내지도 않는 고양이. 결정적으로 텅빈 사무실 창고의 종이 박스에서 임시로 키우던 고양이라는 말에 나는 당장 돌려보내자는 생각이 쏙 들어가버렸다.      

         

그날 이후로 가족들이 모두 나간 집안 곳곳에서 나를 응시하는 검은 눈동자가 느껴졌다. 친구도 이웃도 만들 수 없는 타국에서 검은 고양이는 늘 나를 그림자처럼 따라다녔다. 세월은 무심히 흘렀고 해외근무 기간을 마친 남편은 귀국을 앞두게 되었다. 어느새 고3인 딸이 졸업할 때까지 나는 이곳에서 기러기맘이 되기로 결정했다. 타국 생활은 멀리서 보면 한 폭의 아름다운 그림 같지만 가까이 보면 여기저기 무수한 균열 투성인 퍼즐이었다. 언어가 잘 통하지 않아 억울한 일을 당하거나 여자라서 부당한 비용을 더 지불해야 하는 일이 생길 때마다 나는 어디에 하소연할 사람도 없이 끙끙 앓았다. 그때마다 나는 무의식적으로 무심히 졸고 있는 고양이를 오랫동안 쓰다듬었다. 살아있는 따스한 생명의 온기가 손끝에 전해질 때마다 무한한 위로를 받은 듯 다시 씩씩해지곤 했다.     

                   

5년 간의 해외 생활을 접고 귀국할 때 나는 많은 것을 미련없이 버려야 했지만 고양이만은 품에 안고 돌아왔다. 이제는 완벽한 가족이 된 고양이는 오늘도 제 할 일이 온통 그것뿐인 양 가장 가까운 나의 발치에서 세상 모르고 졸고 있다. 

그러나 가끔 먼 곳을 응시하는 듯한 고양이 눈빛 속에서 불안과 미혹으로 파닥이던 그 시절의 나를 떠올린다. 나의 외로움을 읽어주었던 유일한 존재, 힘겨웠던 한 시절을 성큼 건너올 수 있도록 자신의 체온을 나눠주었던 한 작은 생명이 내게 일으킨 무한한 기적을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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