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시촌과 h와 나
대학생 시절, 나는 용돈을 타서 썼다. 넉넉한 용돈이 아니었기 때문에 일명 버카충, 버스카드를 충전하고, 핸드폰 요금을 내고, 나름 소소한 금액으로 적금도 해야 했고, 점심 저녁 밥을 사먹고, 데이트도 하고, 갖고 싶은 물건을 사고, 친구들을 만나는 일도 하려면 정말이지 벅찼다. 분명 어제 버카충을 만원이나 했는데 오늘 또 버카충 버카충... 하루 만원이 우습게 나가서 쭈그러들던 시절이었다. 그런 20대의 시절, 나는 h를 만났다. 그때 우리는 주로 신림동의 고시촌에서 데이트를 했다. 하원의 본가는 대전에 있었고 서울대학교 학생이었기 때문에 학교에서 가까운 고시촌에서 20대를 보냈다. 내 생각에, 고시촌은... 대학생들이 데이트하기에 딱인! 안성맞춤인 곳이었다. (이 글을 읽고 있는 분들 중 고시촌에서 추억이 있으신 분이 계신다면 좋겠다. 왜냐, 공감할 식당들이 많을테니!)
일단, 고시촌 메인 스트리트에 있는 식당 중 '다부찌'를 빼놓고 이야기할 순 없을 것이다. 다부찌는 전면이 유리창으로 되어 있는 가게 였는데, 창에는 세계여행을 하기 위해 장사를 하고 있다는 사장님의 스토리와 여자친구가 바껴도 모른 척 하겠다는 문구들이 적혀있었다. 사장님은 머리를 땋아 내린 여 사장님으로 손님 한 명 한 명 잘 기억하고 계시는 능력자였다. 나와 h는 부대찌개를 좋아했고, 심지어 5,000원에 라면까지 주셨고 찌개도 아주 튼실했다. 또한, 엄지손가락만한 해쉬포테이토를 무한리필로 주셨다. 나는 찌개보다 감자가 더 좋았을 정도. 세계여행을 하기 위해 당시 다부찌를 운영하고 계신다던 사장님! 잘 지내고 계신가요.
기억에 남는 식당 하나 더! 그 시기는 한 겨울의 말일이었다. 말일에는 용돈이 다 떨어진다. 용돈은 떨어졌지만 h는 만나고 싶고. h에게 말했다. "오빠! 오늘 밥은 내가 쏜다, 오천원어치!!!" 지금도 h가 킬킬대며 얘기하는 오천원 에피소드이다. 나는 오천원으로 김치볶음밥과 김치찌개를 시켰다. 오천원으로 무려 둘이서 든든하게 식사를 해결할 수 있는 곳이었다. 지금은 이름이 기억나지 않는 백반집인데 만복슈퍼 근처에 있는 곳이었다. 이곳에 가서 메뉴를 시키면 5가지의 반찬과 계란 후라이를 꼭 주셨다. 나는 계란 후라이를 주신다는 점이 특히 좋았다. 집에서 김치찌개든 김치볶음밥을 먹을 때면 후라이를 톡 터뜨려서 함께 비벼 먹었기 때문이다.
밥을 먹고 나면 간식으로 h가 내게 핫케이크를 만들어주었다. 그는 새로운 것을 시도하기를 좋아했는데 이를 테면 핫케이크 안에 녹차라떼 가루를 넣어 녹차핫케이크를 만들어주기도 했고 (녹차맛은 나지 않고 초록색일 뿐이었다), 또 가끔은 핫쵸코 가루를 넣어 쵸코 핫케이크를 만들어주기도 했다(쵸코맛은 나지 않고 까만색일 뿐이었다). 둘이 앉아 찢어 먹으며 마냥 행복했던 기억이 생생하다. 그때 우리는 대학생이었고, 그저 서로에게 푹 빠져 있었다. 우리에게는, 너무도 운이 좋게도, 서로에게 온전히 집중해서 사랑할 수 있는 시간이 주어진 것이었다. 하루종일 고시촌을 돌아다니며 놀아도 걱정이 없던 시절. 하~ 그리운 시절이여.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그때의 나와 h.
이 모든 것은 영화 <꽃다발 같은 사랑을 했다>를 보고 떠오른 기억이었다. 영화 속 남녀 주인공은 풋풋한 대학생 시절 처음 만나 연애를 시작한다. 서로에 대해 알아 가느랴 밤이 깊어가는 줄도 모르고 수다를 떤다. 서로 같은 것을 보고 같은 생각을 했다는 것에 놀라기를 반복하면서 수다 떠는 일을 멈추지 않는다. 눈빛에서는 꿀이 떨어진다. 열애를 하며 취업의 관문을 넘어 사회 생활을 하게 되고, 상처도 받고, 모든 과정을 함께 한다. 초롱초롱 생기로 가득하던 눈망울이 빛 바래져 가는 과정도, 모두 함께 한다. 대학생 시절이 떠오르던 나는 지금 우리의 모습도 함께 돌아봤다. 하고 싶은 것도 많고, 이루고 싶은 것도 꿈이 많은 h. 그런 그를 회사 안에만 가둬두고 싶지는 않다. 작년까지만 해도 꿈을 이야기 할 때 h의 눈은 빛이 났다. 지금의 눈빛은 어떤가.
영화 속 남녀 주인공이 함께 다니던 빵집, 양손에 커피를 들고 수다를 떨던 저녁 산책 길, 집 안에 자리 잡은 쇼파 위에서 보낸 시간들, 버스를 기다리던 정류장, 함박스테이크집. 나와 h에게도 그런 장소들이 많다. 고시촌의 스시집, 백반집, 김치찌개집, 부대찌개집, 만복슈퍼, 장보고 슈퍼마켓... 어째 식당만 기억이 나는지 ^^; 나는 참 먹는 걸 좋아하는 게 맞긴 한가 보다. 연애하는 9년 남짓의 시간 동안 서울 곳곳을 참 많이 누비고 다녔다. 그때의 나와 h의 모습을 떠올려 본다. 주머니에 돈이 없어도 서로 옆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서로를 알아갈 수 있는 시간이 있다는 것만으로 전부였던 시절. 그땐 그랬지. 그때처럼 초롱초롱한 눈으로, 두근거리는 설렘으로 h 옆에 있을 수는 없겠지만, 지금은 이 글을 쓰며 내 옆에서 책을 읽고 있는 h의 모습을 보니 마음에 안도감과 포근함이 스며든다. 이 사람을 만나지 않았다면, 이라는 생각을 하기만 해도 아찔하다. 오늘에 이르기까지 나와 10년의 시간을 함께 해준 h에게 너무너무 고맙다. 앞으로 내 인생의 시간을 모두 이 사람을 위해 쓸 수 있다면 좋겠다. 다 주고 싶다. 줄 수 있는 것은 모두 다!
이 영화를 보길 참 잘했다. 처음부터 끝까지 무엇하나 마음에 들지 않은 것이 없었으니.. 뻔한 로맨스겠지 생각하며 흥미 없이 시작한 영화였는데 h의 추천은 믿고 볼만 하다. 그리고, h에 대한 마음이 또 다시 활활 타오른다. h와 10년 차. 나의 콩깎지는 아직 떠나갈 계획이 없나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