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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주영 Nov 23. 2020

감사는 삶의 박스에 귀중품 스티커를 붙이는 일

2020년 10월 28일 오전 01:54

나는 신과 운명과 지정된 역할들을 믿지 않는다. 내가 얻은 것은 대체로 적당한 요행 덕이거나 나도 모르는 복잡한 확률들 덕이고, 내가 잃은 것은 나도 모르는 확률의 총체 탓이거나 능력이든 준비든 미비했던 탓이었다고 생각하는 편이다. 그래서인지, 생각해보면 최소한 최근에는 한 번도 신과 세상에 다행스럽거나 감사하지 않았다. 심지어 기진맥진할 정도로 노력한 어느 하루의 나 자신에게도 별로 감사하지 않는 편이었다. '해야 했으니까 한 거지 뭐. 별 수 있나. 후회하고 싶지 않을 뿐이지, 뭘 바란 것도 아니고.' '일어나야 했으니까 일어났겠지. 내가 뭘 해서 뭘 안 해서 일어날 정도로 결정적인 일이 어딨다고.'

하지만 후쿠오카 생활 2년째, 함께 회사를 다니면서 정도 많이 든 친구가 한 명 있는데 그가 아주 깊게 신을 믿고 있다. 그리고 그는 매일 매번 식사 전에 기도하며 감사해한다. 그리고 그는 오늘에 대해 말하든 평생에 대해 말하든 감사하고 운이 좋다고 여기는 것들을 많이 자주 얘기한다.


물론 나라고 감사함을 전혀 모르는 후안무치는 아니었다. 누군가에게 고맙다는 말은 상당히 잦게 했다. 친구에게도 가족에게도, 회사의 동료들에게도 거의 항상 입버릇처럼 마무리에 두는 말들이 '감사합니다, 고마워요, 아리가또 고자이마스'였으니까. 그들의 호의와 친절과 안부인사와 노력과 마음 씀씀이는 고마운 것들이었으니까.

하지만 새삼스럽게 되짚는 삶에 대한 감사는, 내가 가끔 함께 식사하는 이 친구에게서 보는 감사는 조금 다른 성질의 것이라고 느꼈다. 설명하자면, '이것은 잃고 싶지 않은 것, 이것은 존재 자체로 기쁨이 되는 것, 이것은 잃을지라도 내게 의미 있는 것'이라고 마음속으로 이름 스티커를 붙이는 일과 같다고 생각했다.


그 탓인지 모르지만 이 이틀 정도, 감사에 대해서 생각해봤다. 내가 가진 것 중 좋거나 감사하거나 다행스러운 것들이 얼마나 있지. 스티커를 붙일만한 것들, 스티커를 붙이고도 떼어내야 했던 것들. 그렇게 이 이틀 정도, 누워서 검은 천장에 그 마음을 붙이거나 떼면서 잠들었다. 그래서 감사함을 떼어내야 했던 순간들에 대해서 생각했나 보다. 내가 괜히 애착을 덜어냈던 일과 사람들에 대해서, 감지덕지 감사하고 싶지 않았던 관계들과 상황들에 대해서 생각해봤다.

그 어리광과 배은망덕에 대해서 진지하게 고민해봤다.


삶에는 욕심을 내고 더욱 요구하는 자세만큼이나 감사하고 품어내는 자세도 중요하다. 지금의 난 과연 그 둘 중 어느 쪽일까 생각해봤는데, 어느 쪽도 아니라는 것에 조금 놀랐다. 난 더 이상 욕심 내고 싶지도, 그렇다고 마냥 만족하고 싶지도 않았다. 힘들고 그냥 쉬고 싶고, 어쩌면 더욱 노력하기에도, 그대로 노력하기에도 지쳤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삶은 아직 한참인데.

물론 이렇게 전신과 마음에 힘을 뺀 지금이 무조건 나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난 이유 없이 살지 않았으니까, 이 지금이 대책 없고 통제 없는 미숙함일지라도 나에게 무조건 감점을 줄 수는 없다. 나는 모자란 나 자신을 들여다봤다. 이 짧고 미숙한 서른 해 남짓에도 포기를 해야만 하는 순간이 있었다. 견해마저 통제할 수 없었기에 엇갈린 벗이나, 곁에 두고 싶었지만 강제할 수 없었던 사람의 마음, 부당한 대우를 겪는 순간에 했어야 할 마땅한 정의 같은 것들, 돈벌이가 될 수 없다는 확신 탓에 차마 밀어붙이지 못한 일말의 약소한 재능과 같은 것들. 과거의 것들. 포기했던 것들과 낙담하고 뒤돌아섰던 길목들에 대해서 생각했다.

난 그런 걸 지나치게 많이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후회하지 않는다고 말하기 위해, 후회까지 포기하면서.


생각해보면 삶에는 세 가지 자세가 가능하다. 더욱 원하거나, 그대로 품거나, 아니면 품어내지도 않거나. 나를 저 셋 중 하나로 딱 잡아 말할 수 있을까. 난 포기와 낙담에 대해 말하긴 했지만 분명 충분히 욕심내기도 했고, 때로 아주 겸허한 적도 있었다. 포기가 잦았던, 어쩌면 포기해도 다치지 않을 준비를 하고 살려고 한 것이 최근 아주 잦아서 그렇지. 새삼 생각해보니 알 것 같긴 했다.

어쩌면 삶은 한 가지 자세로 계속 살아갈 수는 없다. 마음이든 생애든, 물도 주고 볕도 주고 내버려 두기도 해야 하지 않을까 싶다.


그렇다. 태세 전환은 자주 이뤄져야 한다.

가끔 원해야 한다. 원하면 이룰 수 있는 것들을 미처 원하지 못해서는 안되니까. 자주 겸허히 받아들이고 즐겨야 한다. 감사해야 할 것들에 감사하고 쉬지 않으면 삶은 계속 지치는 소모전의 연속이니까. 때로는 완전히 깨끗하게 포기해야 한다. 도저히 얻을 수 없었던 관계와 상황과 조건과 결과들에 대해 궁리하는 것은 정말로 우울이나 강박이나 편집증으로 미치는 지름길이니까.


그러니까. 그래서. 나는 함께 식사하던 친구의 기도하는 모습을 보며 삶의 세 가지 자세 정도에 대해서, 며칠 고민해봤다. 나는 오늘이든 언제든 최근이든 어떤 신에게든 감사인사를 했던가, 내가 차린 식탁과 내가 씻는 그릇들의 시간 사이에서 내가 느끼는 감정의 색채는 무엇이었을까. 이 삶에 나는 스티커를 잘 붙여놓고 있는가.


'취급주의. 파손주의.' 그 정도 애착의 표시라도 달아놓고 잘 살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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