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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주영 Mar 22. 2021

부모님을 마주보기엔 낮았고, 미나리를 내려보기엔 높았던

영화 미나리 리뷰

영화를 볼 때 나름의 기준이 있다. 내가 겪어보지 않은 삶을 겪게 하는지, 내가 생각해보지 않은 관점을 제시하는지, 내가 보지 못했던 각도와 시간의 풍경을 보여주는지, 그렇게 내 시야를 넓혀주는지 따위의 기준으로 영화를 살핀다.

미나리는 만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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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속 모든 인물들이 패배한다. 단 한 번도 실리를 얻지 못한다. 한국에서 사는 게 힘들어서 미국까지 왔는데, 그렇게 서로 도와가며 살자고 손을 잡고 왔는데, 돈이 쥐어지지 않는다. 농사가 어렵다. 부부 사이도 소원해져 간다. 일은 힘들고 교회는 생각보다 위안이 되지 못한다. 어머니를 모시고 왔는데, 어머니가 아프다. 아프게 된다. 전쟁통에 남편을 잃고 홀로 키운 외동딸은 미국 땅에 가서 한참 고생을 했다. 딸을 찾아가니 손주들은 달갑게 반기지 않고, 취미라고는 TV 밖에 없고, 아프고, 뇌졸중에 몸 가누기 힘들어지고, 역할 한번 해보겠다고 의욕적으로 나서면 그릇을 떨구고, 불이 나고. 아프고, 아파서 뛰지 못하고, 부끄럽고 창피하고 억울한 일들이 집안에 가득하고, 할머니는 쿠키도 못 굽고. 그렇다. 통장 잔고로 따지면 마이너스로 끝났다.

그런데 다섯 모두가 오롯이 잠든 거실 한 바닥이 너무 포근하고 따뜻해 보여서, 서로 끝내 탓하고 미워하고 밀어내질 못하고 그냥 안고 잤던 모습이 너무 아름다워서 할 말을 잃었다. 어떤 이득이나 승리보다 중요해보였다.

  영화에 나온 거의 모든 것에 동의하지 않는다.  그대로 물을 끌어오고야 말았던 아전인수, 무모하고 멋대로인 가장의 야망에도 동의하지 않는다. 싫은 아이에게 억지로 한약을 먹이고 할머니랑 같은 방에 재우고 다그치는 회초리법 교육 방식에도 동의하지 못한다. 아칸소에서 희망을 읽어내지도 못하겠다. 하지만, 안다. 저게 우리의 모습이라는 , 내가 동의하든 동의하지 않든 나와  가족의 모습이었다는 것을 안다.

내 아버지도 내 어머니도 내 할머니도 저런 모습이었다. 옳든 간에. 싫든 간에.

한예리 스티븐 연 배우의 얼굴이 너무 젊었다. 심장이 무너지게 젊었다. 나의 어머니와 나의 아버지가 전셋집을 옮겨가며 어설프게 최선을 다하던 시간들의 얼굴도 저렇게나 젊었다. 그걸 생각하니 마음이 너무 뜨겁고 차가워졌다. 고민하고 싸우고 추궁하는 부부싸움의 얼굴도 저렇게 젊었고, 은행이며 직장이며 교회 같은 곳에서 무릎 위에 단정히 손을 얹고 있었을 모습도 젊었을 것이다. 서툴고, 처음이고, 어려운데, 애들이 있으니까, 그리고 계속 살아야 하고 내일을 고민해야 하니까 무섭더라도 안 무서워하는 척하는 게 다 보이는 그 젊은 얼굴로 살았던 것이다. 내 부모님도. 내 어린 키에는 정면으로 보이는 얼굴이 아니었기 때문에,  그리고 서툰 두려움이라는 것을 읽을 정도로 내가 성숙하지 못해서, 그 얼굴을 이해하지 못하고 그냥 싸우지 마세요,라고 이불을 뒤집어쓰거나 했던 것이다, 나는. 그 얼굴과 등을 읽지 못하고.

공교롭게도 "나 역시 67살은 처음이야"라고 말하는 윤여정 선생님이 이 영화에서 역할하신 일이 근사하게 느껴졌다. 부모의 역할, 아메리칸드림, 아칸소 터전 마련, 아이의 아픈 심장, 어머니의 뇌졸중 모두를 처음 겪어보는 서툰 두 사람, 매일 어려운 도전을 시작하는 얼굴에서 그 말이 자꾸 읽혔다.

우리가 아는 재미교포 1세대들의 흔한 모습들이 생각났다. 한국적 고리타분함은 비행기를 타고 내린 사이에도 보자기에 싸매 들고 단단히 챙겨갔다. 희망에 도전과 열등감이 섞인 서툴고 짧은 영어를 구사한다. 고향에 대한 기묘한 그리움에 음식만은 밥과 김치를 고집한다. 교회 안에서 숨 막히는 눈치와 편견의 한국 사회를 굳이 다시 만들어낸다. 자녀에겐 다른 삶을 기원하면서도 같은 말과 사고로 살라며 회초리를 든다. 민주화 세대와 유리되어 만들어낸 기이하게 견고한 군부독재에 대한 향수와 정치관을 고수해, 한국 뉴스를 보며 혀를 찬다. 그런 사람들을 보고 생각하고, 가끔 그 전형을 벗어나거나 그 전형 그대로인 사람들을 만나기도 했다.

하지만 이 영화로 내가 아는 그 얼굴들의 삶을 다시 그려봤다. 낯선 공기 냄새에 낯선 언어 소리에 휩쓸려 짐과 이정표를 몇 번이고 확인하는 공항에서의 얼굴을 상상해봤다. 말도 안 되는 급여의 직장에서 가장 열심히 일하는 얼굴을 상상해봤다. 동료 중 가장 먼 집으로 돌아가는 자동차의 덜컥거리는 운전석 위의 졸린 얼굴을 상상해봤다. 그러고도 주말이면 부업으로 무언가 다른 땀을 흘리는 모습도 상상했다. 하루 종일 말 한번 섞지 못하다가 혼날 때의 한국어밖에 꺼내지 못하는 아이와의 소통도, 그 삐뚤고 그릇된 관계가 삐그덕거리며 소리를 냈을 수십 년의 주방의 소리도 상상해봤다. 가끔 한국에서 오는 소포 안의 고춧가루와 멸치 따위를 열어보고 굳이 한국 채소와 한국 재료로 고향 음식을 만들며 괜히 고향 뉴스를 뒤적거리는 모습도 생각해봤다. 객관적으로 무모한 선택을 하고 객관적으로 틀린 말을 하던 생애를, 주관적으로 열심히 살아간, 아름다운 앵글과 배경음악 없었을 나날들을 상상했다. 그런 식으로 반도 안의 한국인들도 상상해봤다. 우린 70년간 틀리고도 열심이었던 모든 아버지와 어머니에게서 태어났고, 우리 나름의 틀리고도 열심인 삶을 살고 있다.

외국인 노동자, 낯설고 서툴고 가끔은 모두 내 잘못이고 가끔은 이국 땅의 낯선 공기 탓인 일상을 꾸역꾸역 살다가, 이 영화를 마주한 극장 안의 내 표정도 돌아봤다.

해피엔딩이 아닌데, 마음 안의 누군가가 일어선 느낌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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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국제시장을 싫어한다. 응답하라 시리즈도 싫어한다. 그런 이야기, 고생에서도 좋은 엑기스를 뽑아내어 노력이나 능력이나 희생에 대해 교조적인 내러티브를 구축하는 기억 조작, 괄목상대식의 승리담이나 라떼 서사시를 싫어한다. 인간의 삶에 신파와 로맨스를 뒤집어 씌어 역사와 시간과 생애를 일축하는, 관객과 시청자 대신 생각해주고 정리해주는 이야기를 좋아하지 않는다.

미나리를 보면서... 반가웠다. 고스란히 바라보는 일, 불타는 가든과 쓰레기와 할머니의 뇌졸중 같은 것들을 마주하면서도 다음 날의 미나리를 캐는 모습을 보여주면서, 대사로 설명하지 않는, 이런 차분한 시선이 있었지, 그렇게 우리 역사를 바라볼 수도 있었지. 미나리는 흔하고 질기지만, 미나리를 사랑스럽게 내려다보는 일은 아주 귀하고 드물었다. 반가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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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섯이 함께 평화롭게 잠든 거실의 모습에서 나는 갑자기 웰컴 투 동막골의 비슷한 장면이 기억났다. 점점 다른 나라와 인종도 섞여가는 대한민국에서 한민족이라는 말이 사라질수록 좋다고 생각하지만, 이젠 애국가며 민족주의에 피가 끓는 일은 좋아하지 않지만, 고된 역사를 공유하는 나의 친척이며 그 친척의 친척 사람들 모두가 그 평화로운 아침에 대한 공감 정도는 영원히 공유했으면 좋겠다고 막연하게 기도했다.

미나리 향기를 좋아하는 사람들끼리, 반말과 존댓말과 영어를 섞어가며 사는 사람들끼리, 회초리와 강아지풀 싸움을 기억하는 사람들끼리, 한약의 쓴 맛과 탄산음료의 단 맛을 같이 아는 사람들끼리. 부모님이 고맙다가도 밉고 미안한 사람들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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