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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드림별 Oct 13. 2021

이 시대의 출가외인

시어머니가 던진 그 한마디에 대해서

5년 전, 가족들과 다 함께 카타르에 살 때 내내 마음 졸이며 하던 걱정이 하나 있다. "할머니 돌아가시면 어쩌지?" 하는 걱정. 멀쩡히 살아계시는 할머니를 두고 죽음을 떠올리는 게 죄송하긴 했지만, 할머니의 나이를 생각하면 아주 말이 안 되는 상상도 아니었다. 혹여라도 그런 일이 발생하면 나는 당장이라도 비행기표를 끊은 후 장장 10시간의 비행을 거쳐 장례식장에 갈 수 있을지. 남편은 갑작스럽게 휴가를 낼 수 있을지. 아이들은 어쩌지 하며 꼬리에 꼬리를 무는 질문을 하다 '내가 별 쓸데없는 상상을 다 하고 있네.' 하며 생각을 툭툭 털어버렸다. 일어나지 않을 일을 걱정하는 것만큼 어리석은 이도 없지 않을까 하며. 우리 가족은 회사일이 마무리되자 한국으로 들어왔다. 연로하신 할머니는 다행스럽게도 여전히 건강하셨다. 식사 후에는 여전히 밭으로 가 풀을 뽑으셨다. 평상에 쭈그리고 앉아 담배를 태우던 모습도 그대로였다.


무병장수 하실 것 같았던 할머니에게 병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건 올해 여름이다. 복통을 호소하시는 할머니를 모시고 병원에 가니 느닷없이 '췌장암 말기' 진단을 받았다. 의사는 "당장 돌아가실 건 아니니 너무 염려 마세요. 6개월에서 1년 정도는 사실 겁니다."라고 했다. 그러나 하루가 다르게 병세가 악화되어 가는 할머니를 보며 가족들은 초조해했다. 유동식을 드셨던 할머니는 시간이 지나자 고통에 몸서리치며 아무것도 드시지 못했다. 아빠는 더 센 진통제를 가져다 드렸지만 별 소용이 없었다. 평생을 병원이라면 손사래를 치던 분이지만 고통에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할 정도가 되자 결국 자기 발로 병원에 데려달라 하셨다. 그리고 응급차의 들것에 실려나가던 고목나무 같은 할머니의 모습이 내가 본 그녀의 마지막 모습이 되었다.


"할머니가 돌아가셨어." 엄마는 할머니의 병명을 알렸을 때와 동일한 방법으로 단톡방에 할머니의 죽음을 무심히 알렸다. 하던 일을 황급히 마무리하고 내려간다는 동생들과 달리 나는 남편의 답을 기다렸다. 그는 회사에서 휴가가 나오면 지금이라도 바로 내려가자고 했다. "알아봤는데 처 조모상엔 휴가가 별도로 안 나온데." 어쩔 수 없이 휴가를 써야 하는 그는 오늘은 근무를 하고 내일과 모레 이틀 연차를 쓰겠다고 했다. 나는 그와 오늘 저녁에 내려갈지 내일 오전에 내려갈지 의논을 했고 결정을 내리지 못했다. 남편과 전화를 끊고 나서 어쩐지 시부모님 생각이 났다. '집안의 큰일은 시댁에도 알려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전화기를 들었다. 시어머니는 할머니의 상태를 알고 있어서 그런지 그리 놀라는 눈치가 아니었다. 우리 부모님 걱정을 하시며 잘 위로해 드려라, 우리가 올라가야 하는데 코로나라 못 올라가서 죄송하다는 말씀을 전해드리라고 했다. 나는 알겠다고 하면서 오늘 저녁에 장례식장에 내려갈지 내일 오전에 내려갈지 고민 중이라 했다. 그러자 시어머니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아이고 코로나가 걱정이다. 너는 애들도 있고 하니 내일 내려가라.
요새는 조문객도 별로 없어서 거들 일도 없어. 출가외인이라는 말 잘 알지?
내 말 잘 듣고 내일 내려가.


시어머니의 출가외인이라는 말이 어찌나 서운하게 들렸는지 전화를 끊자마자 눈물이 주룩주룩 쏟아졌다. 할머니가 돌아가셨다는 말을 들었을 땐 나오지 않던 눈물이었다. 그런데 시어머니의 이러한 말씀이 오늘이 처음이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때는 내가 첫 아이를 임신했을 때, 만삭의 몸을 이끌고 과외를 하러 다닐 때였다. 정류장에서 버스를 기다리는데 동생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언니, 외할아버지가 돌아가셨어. 우리는 엄마 아빠랑 장례식장으로 가는 길이야. 언니는 형부랑 같이 와야 하지? 언제 올지 확인하고 알려줘." 외할아버지는 지병이 있으셨지만 그 누구도 죽음을 예측하지 못했다. 갑작스러운 소식을 듣고 망연자실 한 채로 수화기를 들어 연락한 건 아이러니하게도 시어머니였다. 그녀는 임산부는 장례식장에 가는 게 아니라면서 남편만 혼자 보내라고 했다. 나는 어쩔 줄 몰라하며 엄마에게 다시 연락을 했고 엄마도 여기저기 알아보더니 "너는 안 와도 될 것 같아. 남편만 보내."라고 했다.


근엄하셨지만 볼 때마다 용돈을 쥐어주시며 맛있는 거 사 먹으라고 하셨던 외할아버지, 복덕방에서 소란을 피워도 화 한번 안 내시고 통에서 사탕을 하나씩 꺼내 주셨던 그였다. 그런 그의 마지막 가는 길을 나는 함께 하지 못했다. 엄마가 외할아버지의 유골함을 맞닥뜨리자마자 실신하셨다는 것도 남동생을 통해 건네 들었을 뿐이었다. 그 이야기는 잠깐이라도 장례식장에 얼굴을 비추지 못한 나에게 마음 빚으로 남았다.


코로나가 걱정된다고만 해도 알아들을 터인데 아무리 생각해도 '출가외인'이라는 말은 너무 했다 싶었다. 상견례 자리에서 시어머니는 우리 엄마에게 우리는 딸이 없으니 며느리를 딸같이 여기겠다고 하지 않았던가? 나는 내 안의 슬픔과 짜증을 꾹꾹 눌러 담았다. 서러운 감정에 예의를 탑재하여 카톡을 보냈다.


'어머님의 염려는 충분히 이해가 가고 저도 조심할 예정이지만 출가외인이니, 외가 쪽은 넘 신경 쓰지 말라 하는 말은 섭섭해요' 이 시대의 출가외인이 살아가는 방법이었다. 시어머니는 메시지를 읽고도 한동안 답변이 없으셨다. 몇 분이 지나자 '가지 말라는 소리가 아니다. 오늘은 준비도 하고 그런 과정에서 그랬지 다른 생각으로 그런 게 아니다. 옛날 사람이고 세대차이가 나서 그런가 보다 생각해라. 섭섭하다고 생각지는 말라.'라고 답변을 보내셨다.


나는 결국 다음날 오전에 장례식장으로 갔다. 전날 저녁에 출발하려니 비가 너무 많이 와서였다. 장례식장에는 우리 부모님과 고모, 고모부 내외들, 사촌오빠가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고모의 딸들인 사촌 언니들도 하나둘 모이기 시작했다.  소식 모르고 지내던 친척 언니, 동생을 다시 만난 것이다. 어릴 때는 할머니 댁에서 다 함께 봉숭아 꽃물을 들이고 놀던 사이였는데 다시 만나니 낯설었다. 난생처음으로 상복 차림을 해서 엄마 꽁무니를 쫄쫄 쫓아다녔다.


조문객들은 하나 같이 "백세요? 아휴, 천수를 누리셨네요."라고 이야기했다. 문득 시어머니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할머니는 손주, 증손주까지 보셨잖아. 그 정도 사셨으면 됐지." 위로라고 건넸던 그 말에 위안받지 못했다. 세상엔 괜찮은 죽음이 있을까?


다음날 아침, 제사를 지내고 화장터로 향했다. 시신과 마지막으로 작별인사를 고하는 순간에 고모들은 술렁였고, 엄마는 소매로 눈물을 훔쳤다. 할머니는 한 줌의 재가 되어 유골함에 담겼다. 관보다 훨씬 작은 사이즈의 유골함이었지만 아빠의 어깨는 어쩐지 더 무거워 보였다. 나는 오후 4시에 온라인 수업이 예정되어 있었다. 남편은 몇 푼 안 되는 강의 미루면 안 되냐고 했다. 그러나 나 대신 누가 강의를 할 것인가? 내가 수업을 못하면 그 기관의 강의 일정이 꼬임도 물론이. 집안에 일이 생겨 강의를 못하겠다는 말이 목 끝까지 찾으나 차마 내뱉지 못했다. 나는 발인을 까지만 보고 집으로 발길을 돌렸다. 동생들에게 내 몫까지 다해 달라는 부탁과 함께였다. 나머지 식구들이 할머니의 유골함을 할아버지가 계신 선산에 묻어드렸다. 외손주도, 친손주도 모두 함께였다.

작년 봄, 봄나물 캐시던 할머니의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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