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둘 중에 뭐가 예뻐?" 단톡방에 친구가 가방 사진을 올리며 물었다. "결혼기념일 선물로 받으려고 하는데 결정장애가 와서." "다른 사진은 없어?" 다른 이가 물었다. 이윽고 올라온 사진은 연예인 수지가 가방을 멘 사진. 우리는 이구동성으로 "수지가 들면 뭔들 안 예쁘겠어."라고 말했다.
친구는 친구라고, 다섯 명 중 세명이 왼쪽 가방을 골랐다. 나 또한 왼쪽 걸 고르며 무심결에 말했다. "근데 나는 생일 때 특별히 갖고 싶은 게 없어서 안 받았는데..." 이 대답에 한 친구는 선물은 받을 수 있을 때 받아야 하는 거 아니냐 왜 안 받았냐며 따졌고, 또 다른 친구는 남편이 평소에 이것저것 잘 선물해주는 거 아니냐 했다. 둘 다 아니었다. 나는 언제부터인가 소비를 즐기지 않는 사람이 되었다. 선물도 사치라고 생각해 남편이 생일 때 사준다는 에어 랩을 마다했다. 그는 그런 나를 의아하게 생각했다.
필요하지 않아서 안 받은 건데,라고 생각하다 내가 언제부터 선물에 무심해졌나 생각해 봤다. 나도 한때는 돈 쓰는 걸 좋아하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보통의 20대가 그렇듯 나도 과거엔 외모 꾸미기에 관심이 무척 많았다. 월급의 일부를 화장품, 옷, 가방을 사는데 쓰며 '이런 게 돈 버는 낙이지' 했다. 지갑과 관련해서 아직도 또렷하게 기억하는 일화가 하나 있다. 나는 당시 유행하던 에나멜 지갑을 벼르고 벼르다 샀다. 백화점에서 물건을 사는 게 처음이었던 나는 반짝거리는 조명에 매혹당했고, 판매원의 친절한 서비스에 감탄했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게 빛나는 것은 내 에나멜 지갑이 아닐까 생각했다. 씻고 잠이 들 때까지 윤기가 좌르르 흐르는 베이지색의 그것에서 눈을 뗄 수 없었고, 꿈에서도 그 지갑을 마주했다. (그렇게 아끼던 지갑은 지금 여기저기 뜯어졌음에도 버리지 못했고, 현재 8살 난 아들이 그걸 물려받아 쓰고 있다.)
그렇게 나는 소비를 좋아하고 쇼핑을 즐기던 사람인데 왜 그렇게 변했을까. 돈 쓰는 게 진짜 아깝고 싫은 걸까, 에 생각이 미치자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불과 반나절 전 첫째의 크리스마스 선물로 10만 원짜리 인라인 스케이트를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산 게 나였으니까. 고민을 하긴 했다. 인라인은 가격대가 싼 건 4만 원, 비싼 건 20만 원까지 했으니. 뭘 살까 고민하다 그 중간대인 10만 원짜리를 골랐다. 이게 나를 위한 것이었다면 장바구니에 담아두고 하루 종일 고민했을 거다. 그리고는 '이 나이에 무슨 인라인이야' 하며 장바구니에서 슬며시 삭제했을 거라는 것도 안다.
이쯤 되면 소비를 즐기지 않는다고 쓴 걸 정정해야 할 것 같다. 나는 소비는 할 때 가성비를 엄청 따지는 사람이라고. 절약정신이 투철한 집안에서 자란 덕택 때문인지 나는 쇼핑을 치러야 할 시험 같은 거라고 여겼다. 최저가를 골라 쿠폰과 카드 할인까지 받으면 100점, 최저가로 샀지만 쿠폰 적용을 못하면 90점짜리 쇼핑. 싸게 사서 좋은 건 남편한테 자랑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전업주부로써 '나 살림 야무지게 하는 사람입니다.'를 증명하기 위해 아껴 써야 했고, 적게 써야 했다. 꼭 필요한 게 생겨 사려면 할인받아 사야 했다. 중고도 좋아했다. (지금도 좋아한다.) 당근 마켓이 나오기 전에는 맘 카페에 특정 키워드로 알림을 설정했다. 중고품을 사는데 모든 시간과 에너지를 썼다. 할인 쿠폰을 찾기 위해 검색의 바다를 몇 시간이고 항해했다. 저렴하게 사는 것에만 급급해하던 나는 점점 쇼핑의 즐거움에 둔감하게 되었다. 옷이며 신발, 가방을 좀처럼 사지 않게 되었다.
소비의 즐거움을 잃어버린 게 좋은 것만은 아닐 수도 있다는 것은 얼마 전 그림책을 보고 나서였다. 지우 작가의 <나는 한때>엔 머리를 커튼처럼 드리운 사춘기 소녀가 있고, 빨간색으로 염색한 방황하는 소년이 있다. 어부바 한 아기에게 머리를 뜯기는 엄마도, 머리가 빠져 정수리가 훤한 이도 나온다. 한때 나는 빨갛게 염색한 소녀처럼 내게 관심이 많고, 잘 나보이고 싶은 사람이었는데. 미용실 가는 게 돈 아깝다고 머리를 기르는 나를 보며 나는 누구 일까 생각하다 '난 원래 그런 사람이야'라고 어물쩍 넘겼다.
그런데 어느 날 밥을 먹는데 문득 친구의 오래전 말이 떠올랐다. "넌 원래 화장 안 하고 다니는 거 아니었어?" 대수롭지 않게 지나갔던 그 말이 왜 지금 갑자기 생각났는지. 그게 뭐라고. 그런 적이 없었는데 그날따라 화장은 어떻게 하는 건지 궁금했다. 뷰티 유튜버의 동영상을 보고 화장품을 주문했다. 난생처음 쉐딩이라는 것도 해봤다. 화장하고 난 얼굴은 역시나 어색했지만 저녁쯤 되니 제법 어울리는 것도 같았다. 다음 날엔 보풀이 난 옷을 버리고 새 옷을 샀다. (나는 그간 옷에 난 보풀을 보풀 제거기로 제거해 가며 입었다.) 남들은 못 알아보겠지 하며 옆 가죽이 다 까진 채로 2년 넘게 신던 부츠도 버리고 새 부츠를 샀다. 환경도 중요하고, 절약도 소중하지만 가끔은, 아주 가끔은 인생의 몇 안 되는 즐거움을 느낄 수 있어야 할 것 같아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