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가 일상이 되어 버린 이후, 둘째 아이는 주 1회 등원을 합니다. 유치원에 가지 못하는 날은 저와 온종일 같이 있습니다. 혼자만의 시간을 갖기 위해 새벽 기상을 시작한 지 1년이 넘었습니다. 아무도 일어나지 않은 이 시간 새벽 공기를 마시며 글을 쓰노라면 그렇게 카타르 생각이 날수가 없습니다.
2016년 11월 5일, 42개월 된 아들 그리고 8개월 된 딸과 함께 인천공항에 도착했습니다. 20ft 컨테이너 가득 짐을 실어 보냈음에도 불구하고 화물용 수화물과 기내용 수화물의 무게가 기준치보다 오버되어 공항에서 몇 번이나 짐을 다시 쌌습니다. 사실 캐리어에 실은 건 대부분이 한국식 식재료였습니다. 있으면 좋으나 없어도 크게 문제 되지 않는 것이지요. 5킬로가 초과되었음에도 간장 2병, 냉동떡 3개 이렇게 자잘하게 꺼내 내려놓고 무게를 재기를 반복하였습니다. 사실 내려놓지 못하는 건 수화물이 아니라 한국에 정 붙였던 마음이었던 것 같습니다.
시아버지 께서는 "아빠 혼자 카타르 가면 돈도 많이 벌어올 텐데 왜 굳이 가족 다 같이 나가서 고생을 하냐?" "너희는 친정 집에 들어가 살고, 아빠 혼자 보내라." "이 기회에 돈 많이 벌어 와서 내 집 장만하면 좀 좋겠니?" 등등의 이야기를 하시며 남편만 카타르로 보내고 저와 아이들은 한국에 남기를 원하셨습니다. 친정 집에 얹혀살면 등 따시고 배부르게 살 수 있는데 굳이 왜 신생아를 데리고 카타르에 가서 고생을 하려고 하느냐는 것이었습니다.
사실 틀린 말씀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신혼 때부터 친정집을 전전하고 때로는 더부살이도 했던 저로서는 어느 순간 친정 집에서 '마음고생'을 할 것인가 카타르의 내 집에서 '몸 고생'을 할 것인가를 결정해야 했습니다. 멘털과 육신이 모두 약한 사람이지만 그중에서 굳이 한 가지를 고르자면 육신이 고생하는 게 나을 것 같아 남편을 따라가기로 마음먹었습니다.
공항에서 한바탕 수화물 전쟁을 치르고 기내에 탑승했습니다. 사람은 4명, 좌석은 3명이었기에 갓난쟁이인 둘째는 제 품에 그리고 남편 품에 교대로 안기었습니다. 자는가 싶어 베시넷에 눕히면 다시 깼습니다. 원래도 밤잠을 자다 한두 번씩 깨는 아기인데 베시넷이 자기 이부자리가 아닌걸 진작 알아차렸는지 더 자주 깼습니다. 그렇게 꼬박 10시간을 안고 눕히고를 반복하며 뜬눈으로 지새우니 도하에 도착했습니다. 기내에서 찌들 대로 찌든 제가 마주한 도하는 습하고 뿌옜습니다.
공항에 마중 나온 운전기사의 차량을 탑승해서 집에 도착했습니다. 집은 겉에서 보기에는 미드에나 나올 법한 정원이 딸린 2층짜리 빌라였지만, 안에 들어가니 뜯다만 이삿짐이 먼지와 함께 나뒹굴고 있었습니다. 주방에는 환풍기 틈으로 들어온 먼지가 더 소복이 쌓여 있었는데 뒤뜰로 나가는 문도 함께 있었습니다. 열어보니 남편이 몰래 숨겨 놓은 음식 찌꺼기가 눌어붙은 냄비가 까맣게 저를 맞이해줬습니다. 그때부터 쉴틈도 없이 제멋대로 널브러진 짐과 아직 뜯지도 않은 박스 중에서 만만한 것들부터 풀고 제자리에 두기 시작했습니다.
제게는 도하가 처음이었지만 남편은 아니었습니다. 프로젝트 입찰을 진행하면서 한 달에 한두 번 꼴로 도하로 출장을 다녔고, 프로젝트 수주 후에는 저보다 먼저 도하로 가서 생활 기반을 닦았습니다. 도하 체류 2개월 차에 가족이 함께 살 집과 차를 구했고, 체류 3개월 차에는 바다 건너편에서 주인을 다시 만나기를 오매불망 기다리던 이삿짐도 집 안으로 들였습니다. 그런 남편에게 도하에 저와 아이들은 대접해야 할 존재였나 봅니다. 시차도 제대로 적응하지 못한 가족들을 대형마트로, 유명 관광지로, 맛집으로 쉴 틈 없이 실어 나르며 낯선 나라, 카타르 도하를 이해시켜주려고 부단히 노력했습니다.
그렇게 자기 몫을 다한 남편은 다시 일상으로 돌아가 출근을 하기 시작했고, 저는 그때부터 진짜 일상이 시작되었습니다. 시차 적응 때문에 늦잠을 자기 시작한 게 습관이 되어 매일 오전 10시에 일어났습니다. 간단히 요리를 하여 첫째에게 아침을 챙겨주고, 캐리어 넘치게 채워온 냉동 이유식을 데워 둘째를 먹이고 치우면 12시가 됩니다. 그럼 그때부터 청소를 하기 시작합니다. 방 4개, 화장실 2개가 딸린 2층 집을요.
첫째는 잠깐 TV를 틀어주고, 둘째는 아기띠로 둘러업고 청소기를 돌리기 시작합니다. 자타 공인 게으름뱅이이지만 첫째는 두발로, 둘째는 네발로 누빌 이 곳을 모르는 척 지낼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청소를 하면 끝이 안보였습니다. 그동안 비워져 있던 집이라 닦아도 닦아도 먼지가 나왔습니다.
그렇게 한 시간은 족히 집을 치우고 나니 점심시간이 되었습니다. 아침을 늦게 먹은 지라 배가 고프지 않은 저는 첫째와 함께 빵이나 시리얼로 간단히 요기합니다. 둘째에게 분유를 주고 나면 어느새 아이들의 낮잠 시간입니다. 그간 고단했던 몸을 누이면 아이들보다 더 빨리 잠이 들었고, 보통 2시간 정도 낮잠을 잤지만 3시간 넘게 잘 때도 있었습니다. 그렇게 낮잠을 자고 일어나면 어느새 해가 져물어 있었습니다. 하루 종일 집에만 있어 몸이 쑤신 저는 그때부터 아이들을 데리고 놀이터로 갑니다.
해가 진 놀이터에는 아이들의 거의 없습니다. 한두 명 남아있는 아이들도 하나 둘 집으로 돌아갑니다. 텅 빈 놀이터에서 아이들과 1시간 정도 놀고 집으로 돌아오면 7시가 됩니다. 저는 그때부터 요리를 하기 시작해서 8시가 다 되어서나 저녁을 먹습니다.
먹은 것을 치울 때쯤 남편이 귀가합니다. 남편이 아이들을 씻기고 나면 10시가 훌쩍 넘습니다. 고단한 일과로 바로 곯아떨어지는 남편에 반해 낮잠을 많이 잔 아이들은 11시가 되어도 잠을 자지 않습니다. 한참을 뒤척이다 12시가 다 되어 잠이 듭니다. 그리고는 다음날 다시 오전 10시에 일어납니다. 늦게 일어나고 늦게 자는 생활은 몇 달간 계속되었습니다.
올빼미 생활을 유지하는 와중에 가끔 강제 기상을 할 때가 있었습니다. 깨진 타일 사이로 자꾸 개미가 나오는 게 신경이 쓰여 maintenance staff(유지 보수 직원)를 불렀는데, 아이들과 저에겐 한창 꿈나라일 오전 9시 꼭 벨을 누르고 집으로 찾아왔습니다. 눈곱도 떼지 않은 부스스한 눈으로 직원을 맞이하였는데 처음엔 좀 부끄러웠지만 나중에는 적응이 되었습니다. 생수 배달 업체인 네슬레 직원 또한 매주 화요일 오전 8시만 되면 벨을 눌러서 저를 깨웠습니다. 다 비운 생수통과 생수 쿠폰을 달라고요.
가족의 생활 패턴이 도하의 일반적인 사람들의 생활 패턴에서 벗어나 있다는 걸 어렴풋이 짐작하긴 했지만 바꿀 여력도 없었습니다. 매일 같은 시각 아무도 없는 놀이터에서 애들을 데리고 놀고 있었는데 어느 날 익숙한 모습의 남자와 아이가 눈에 들어왔습니다. 한국인 아니면 중국인인 것 같다 생각하고 말을 거니 기쁘게도 한국인이었습니다. 그분께 저의 생존 사실을 알리고 아무도 없는 이곳이 너무 외롭다고 하니 부인의 전화번호를 알려줬습니다. 얼굴도 모르는 한국인 이웃과 연락을 한 번씩 주고받다 드디어 모임이 잡혔습니다.
평균 기상시간 10시인데 약속 시간은 9시였습니다. 모임 시간을 미룰까 하다 초면에 예의가 아닌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평소엔 일어날 법하지 않은 7시 반에 알람을 맞춰놨습니다. 피로가 가시지 않은 몸을 겨우 일으켜 씻었습니다. 깨워도 일어나지 않는 아이들을 억지로 안고 내려와 옷을 입혔습니다. 아침 일찍부터 부산하게 준비하여 겨우 약속시간을 맞춰 나간 곳에서 듣게 된 그들의 일상은 저의 일상과 너무도 달랐습니다.
아이를 영국계 국제 학교에 보낸다고 소개하신 그분은 무려 오전 5시 반에 알람을 맞춰 놓고 일어난다고 했습니다. 기상 후에는 간단히 씻고 아이가 학교에서 먹을 도시락 2개를 싸기 시작한다고 이야기했습니다. (간식 도시락 1개, 점심 도시락 1개) 그리고 오전 6시 반쯤 아이를 차에 태워 학교에 데려다준다고 하였습니다. 아니 이들은 대체 왜 이렇게 일찍 일어나는가 싶어 등교 시간을 물어보니 돌아온 대답은 '오전 7시'
"오전 7시? 무슨 놈의 학교가 이렇게 일찍 문을 열어?"
그런데 생각해 보니 학교만 일찍 문을 여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대부분의 공공 기관도 아침 일찍 문을 열었습니다. 주 카타르 대한민국 대사관의 근무 시작 시간은 오전 7시 30분이었고, 병원의 진료 시작 시간은 8시였습니다. 그리고 남편의 출근 시간 또한 7시 30분이었습니다.
하루를 보다 빠르게 시작하고 빠르게 마무리하는 도하에서 저는 누구보다 늦게 하루를 시작하고 늦게 마무리했습니다. 그렇게 주류와 떨어진 생활 패턴을 유지하니 곁에서 소통할 수 있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한국이야 주류에서 잠깐 벗어난들 별로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지켜봐 주고 응원해주는 가족과 친구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타국에서는 소통하고 공감할 수 있는 상대는 스스로 만들어야 합니다. 다들 사는데 바빠 아무도 나에게 먼저 관심을 두지 않기 때문입니다.
도하 생활이 힘들고 서러워 카톡으로 친정 엄마에게 하소연하기도 했지만 그때뿐이었습니다. 제 처지를 겪어 보지 못한 사람의 위로는 알맹이 빠진 위로로 느껴졌습니다. 또한 해외에 있다고 딸내미 걱정을 기본으로 탑재하고 살아가실 부모님께 구태여 걱정을 한 숟갈 더 얹어 드릴 이유는 없었습니다. 그래서 힘들고 지쳐도 속으로 삭히고 삭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