챠챠
가까운 마을 사람들이 모여 어반스케치를 한다. 주제는 '마을'이다. 매번 종이에 그림을 그리다가 오늘은 에코백이 바탕이 되었다. 에코백, 패브릭 마카. 투박한 재료였다. 섬세한 표현이 어려운, 우둘투둘한 에코백 위에 선이 굵은 패브릭 마카로 뭘 그리기가 더 조심스러웠다.
사람들은 저마다 그리고 싶은 그림을 프린트해서 가지고 왔다. 내 옆에 앉은 사람은 여러 가지 공구를 연필로 그려 낸 봉투를 꺼냈다. 남편이 공구로 뭘 만드는 걸 좋아해서 최근에 라디오를 만들어 주었다고 말했다. 그분은 남편에게 돈을 줄 일이 있어서 봉투에 공구 그림을 그리고 돈을 담아 주었다. 그런데 남편이 그림을 보고 정말 좋아했다는 이야기를 꺼냈다. 에코백에도 공구 그림을 그려서 공구 넣는 가방으로 쓰라고 선물할 거라고 했다. 에코백에 망치, 작은 톱, 드라이버, 전동드릴, 목장갑, 못, 니퍼 등을 그리고 그 아래 남편이름까지 적었다.
또 다른 분은 친정 엄마가 그린 그림을 가져왔다. 두 손녀를 스케치한 것을 다시 에코백에 옮겨 그렸다. 에코백에 그림을 그려 친정 엄마에게 선물하겠다고 말했다. 친정 엄마의 건강이 좋지 않아 다른 취미는 못 즐기지만 그림 그리는 건 곧잘 하신단다. 에코백에 그림 그리는 도구를 넣어 선물하겠다고 말했다.
내 왼편에 앉은 분은 남편과 아이가 한 곳을 바라보며 앉아 있는 사진을 준비했다. 남편이 아이의 어깨에 손을 얹고 다정하게 바깥을 보는 모습이 예뻐서 남기고 싶다는 거였다.
내 앞 옆에 앉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다 듣고 나니 내 그림이 부끄러워졌다. 나는 아무런 사연이 담기지 않은 그림 샘플을 준비했기 때문이다.
오늘 장맛비가 줄기차게 내렸다. 수도권 집중호우로 비 피해에 주의하라며 문자가 왔고, 예보대로 비가 퍼부었다. 그림을 그리는데 이따금씩 개구리울음소리가 들렸다. 아파트 도서관에서 비와 개구리 소리를 들으며 그림을 그리던 차였다. 몰아치듯 하던 일이 잠깐 소강상태라 내 몸은 물 먹은 종이 마냥 늘어져 대부분 침대나 소파에 척 들러붙어 시간을 보냈다. 그 시간이 길어지면 안 되겠다 싶어서 겨우 그림을 그리러 나왔지만 몰입할 정도의 에너지는 없는, 동굴 속을 벗어나고 싶은 몸부림으로 도서관에 들른 것이었다. 뭐라도 하면 나을까 싶어서 겨우 고양이 도안과 양파, 당근 도안을 가지고 갔다. 어반스케치라 대부분 사람들은 손이 많이 가는 정교한 건물그림을 택했다. 아마 내가 건물을 그리고자 했더라면 완성하기 전에 무너져 버렸을 것이다.
R강사님이 내가 가져온 그림을 보더니 고양이는 너무 쉬워 보인다고 말했다.
"고양이 말고, 양파를 그려보세요. 양파에 꽃이 피었네요."
언뜻 공처럼 보이는 양파꽃. 실제로 본 적이 있던가. 초록색 꽃대 위에 몽글몽글한 하얀 꽃이 피어 있었다. 보통 뿌리만 먹으니 그 모습만 보다가 동그랗게 맺힌 꽃을 보니 예뻐 보였다. 인터넷 검색을 해봤다. 소비자들은 양파꽃을 쉽게 볼 수 없다는 글이 있었다. 양파는 뿌리를 먹기 때문에 꽃과 무관한 식물이기 때문이다. 과일은 꽃이 피고 꽃가루받이를 해야 열매가 맺히지만 양파는 그렇지 않다. 양파는 암 수가 있는데 암양파는 우리가 마트에서 보는 동글동글한 양파이고, 수 양파는 꽃대가 올라와서 오래 보관하지 못하고 뽑아버리거나 양파즙을 낸단다. 수양파는 길쭉하다고 하니 마트에 가면 자세히 봐야겠다.
양파를 그리고 옆에 작게 당근 두 개를 그렸다. 요리 시 색을 낼 때 당근을 쓴다. 그래서 당근은 좀 진하게 색칠했다. 3시간 수업인데 나는 한 시간도 채 되지 않아 그림을 완성했다. 뒷 면에 고양이까지 그렸는데도.
양파 꽃대를 초록색으로 색칠했는데 페브릭마카 색이 예쁘지 않아 영 마음에 안 들었다. 강사님 말에 따라 테두리를 그렸다. 그리고 사람들이 다 그릴 때까지 한참 기다렸다. 정성스레 한 줄 한 줄 그어 가는 모습이 진지해서 내 그림은 점점 부끄럽게 느껴졌다.
모두 그림을 완성했을 때, 그림을 그린 이유에 대해 이야기해 보자고 했다. 그런데 어떤 분이 내게 물었다.
"당근과 양파를 그린 이유가 궁금해요."
아마 당연한 궁금증이다. 다른 작품에는 저마다 이유가 있고, 말하지 않아도 알 것 같은 그림이었기 때문이다.
나는 이미 가까이 앉아 있는 사람에게 이 그림을 선택한 이유를 말했다. 쉬운 그림을 골라서 그렸다고, 쏟을 에너지가 없어서 빨리 끝내고 싶어서 그렸다는 비루한 변명 같은 말을 늘어놨다. 그런데 내 왼편에 앉은 분이 나보고 성격이 밝고 쾌활할 것 같다고 했다. 그림에서 느껴지는 느낌이 그렇다고 했다.
아무튼 많은 사람 앞에서 그리기 싫어서 빨리 끝날 그림을 스케치했다고 말하기가 애매했다. 다들 내 그림을 보고 특별한 이유가 있을 것 같다는 눈빛을 보냈다.
"이유를 생각해 볼게요. 음..."
내가 글 쓰는 사람이라서 더욱 기대를 한다는 걸 알고 있었다.
"작년에 화성시 로컬푸드 취재를 했었어요. 화성시에 로컬푸드직매장 있는 거 아시죠? 생산자를 만나 인터뷰하고 매장을 돌아다녔는데, 로컬푸드 관리를 얼마나 깐깐하게 하던지 믿음이 가더라고요. 불시에 물건을 검사하고 관리하거든요. 게다가 이른 아침에 들어와서 그날 대부분 소비가 되니 신선하고요."
집 근처에 로컬푸드직매장이 있는데 이용해 보지 않았다는 반응이 대부분이었다.
옆에 앉은 분이 말했다.
"아까는 그렇게 말씀 안 하셨는데."(웃음)
"그러니까요. 제가 지금 열심히 이야기를 쥐어짜고 있어요. 음... 그러니까 로컬푸드를 먹어 보세요. 저는 채소살 때는 되도록이면 로컬푸드직매장에서 사려고 해요. 가격도 저렴하고 정말 좋거든요."
편하게 그릴만한 그림을 찾았지만, 마음 한 언저리에 못다 펼친 채소 이야기가 남아있었을 거라고 생각한다. 취재하는 동안 일정이 겹쳐 계획대로 다 다루지 못했던 사연이 많다. 양파꽃이 피어 열매를 맺어야 다음 해에도 양파를 수확할 수 있다. 양파꽃이 얼마나 예쁜지 말하는 사람은 없었지만, 우리는 함께 나누고 꽃을 피웠다. 양파꽃이 피는 계절, 여름날 우리는 함께 그림을 나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