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폭의 굴레
얼마 전, 딸아이가 속해 있는 단톡방에서 한 아이(A)가 다른 아이(B)를 험담하는 식의 말을 꺼냈다. A는 B복수방이라고 단톡방 제목을 바꾸자고 제안했다.
B는 그 방에 속해있지 않았다. 아이들은 그러지 말자든지, 다른 이야기를 꺼낸다든지, 그도 아니면 짧게 대답하고 마는 식으로 대화 주제를 돌렸다. 별 관심이 없었던 것이다.
학교에서는 단톡방을 문제 삼았다. 같은 단톡방에 들어가 있는 자체로도, A를 말리지 않았다는 이유로 방관자라는 틀을 씌웠다.
아이들은 담임선생님께 불려 가서 사건 조사를 받고 진술서를 작성했다. 조사과정에서 몇몇은 울고 나머지는 겁이 나서 잘못했다고 시인했다. 담임은 딸아이에게 왜 그 방에서 나가지 않았냐고 물었다. 딸아이는 그냥 어떤 일인지 궁금했다고 대답했다. 방에서 나가려고 했으나 한 친구가 붙잡아서 그냥 남아있었다고 말했다. 담임은 그런 행동이 피해학생에게는 상처가 된다고 했다.
담임은 피해학생에게 사과 편지를 써오라고 했다. 학부모인 나에게는 상대 학부모에게 사과할 의향이 있냐고 물었다. 나는 잘못이 있다면, 상처를 받은 점에 대해서는 미안하다고 말하겠다고 의사를 밝혔다.
아이가 내게 물었다. 친구에게 뭐라고 사과하지, 단톡방에 나가지 않아서 미안해라고 쓸까? 또 뭐라고 쓰면 좋을지에 대한 의견을 구했다. 담임이 엄마랑 같이 편지를 쓰라고 했다고 부연설명까지 곁들였다. 나도 모르게 그러게, 라는 말이 나왔다. 피해학생 입장에선 분명히 마음 아프고 힘든 일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본인 의사와 상관없이 사건에 끼인 아이들에게까지 화살이 돌아가야 하는지도 모르겠다. 내가 만약 피해 입장이라면 모두에게 책임을 물었을까. 아니, 나는 그러지 않았을 것이다. 순간 화가 났다. 동조도 하지 않고, 머물러 있었다는 것이 몇 차례 불려 갈 만큼의 문제였던 건지에 관해 생각이 들었다. 딸은 방관자이고 학교 폭력을 배웠음에도 실천을 못한 아이가 되어 버렸다.
얼마 전 <당신이 옳다>라는 책을 읽었다. 학교에서 어떤 일이 있어 혼나고 온 아이의 마음을 읽어주지 못한 엄마의 이야기가 떠올랐다. 학부모는 아이가 다른 아이를 때려서 담임선생님께 혼이 났고 잘못을 인정했다는 전화를 받았다. 학부모는 집에 온 아이에게 먼저 폭력을 쓴 건 잘못이지만 알았으니 됐어,라고 말했다. 그러자 그 아이가 서럽게 울면서 엄마는 그러면 안 되지, 내가 왜 그랬는지 물어봐야지. 선생님도 혼내기만 해서 얼마나 속상했는데, 엄마는 나를 위로해줘야지. 그 애가 먼저 나한테 시비를 걸어서 내가 얼마나 참다가 때렸는데, 엄마도 나보고 잘못했다고 하면 안 되지,라고 말했다. 겉으로 보기엔 정리된 문제가 속마음까지 정리된 게 아니라고.
나는 책을 읽으면서 아이의 마음을 꼭 수용해주는 엄마가 되고 싶었다. 게다가 사정상 임시 담임으로 바뀌자마자 일어난 일이라, 아이들은 자신의 의견을 이야기할 데가 없었다. 잘못했다고 하니까 잘못인 거고, 사과해야 한다니까 사과한 것뿐이었다.
재작년이었던가. 내가 속한 단톡방에서 분란이 있었다. 사건의 중심은 나였다. 몇몇은 불만은 있으면서도 직접적으로 터드리지 않았다. 나는 참지 못하고 내가 모임에서 나가는 것으로 모든 일을 마무리 짓고 싶었다. 내가 이의를 제기한 순간까지도 대부분의 사람들이 침묵했다. 공감을 받고자 하는 건 아니었기 때문에, 나는 단톡방을 빠르게 빠져나왔다. 어떤 사람은 나보고 섭섭하다고 했다. 모임에 들어오자고 한 건 너이면서 왜 상의 없이 혼자 나갔냐는 것이었다. 도리어 내게 화살이 날아왔다. 그렇게까지 일을 만들었어야 했냐고 물었다. 나는 무엇이 나를 화나게 했는지 아는 사람이 방관했다는 사실에 기분이 상하기도 했지만 어쨌든 사람 마음이라는 게 다 내 마음 같지 않으니까 그것마저도 수용했다. 단톡방에 함께 있는 사람들에게 서운할 수는 있지만, 그렇다고 잘못 한 것도 아니고. 방관이라고 말할 수도 없었다. 어른이기 때문에, 단톡방을 나가는 것에 대한 판단이 가능했다. 모임에서 빠져나가는 일이 세상의 전부가 아니라는 걸 아는 나이가 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10살짜리 여자아이들에게 그걸 기대하기에는 무리가 있다고 생각한다.
담임은 아이들이 방관한 것은 정말 잘못이라고 했다. 친구의 잘못을 직접적으로 말하지 못하는 건 나쁜 행동이고, 학교에서 배웠으면서 지키지 못한 건 문제가 된다는 말에 화가 났다. 담임은 내게 지금은 단톡방에서 별 이야기가 없었더라도 혹시나 나중에라도 나쁜 말이 오가면 어쩔 거냐고 물었다. 나중에 나쁜 일이 일어날 수도 있지만, 아이들을 바로 일상 대화로 옮겨갔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는데 만약에라는 가정은 안 좋은 쪽으로만 씌우는 건지 모르겠다. 선생님의 시선이 최악의 상황으로 향해 있는데, 아이들에게서 희망이 보이기나 할까.
선생님, 나이는 열 살이지만 작년에는 단체 생활도 못하고 2학년과 다를 바가 없어요. 아직 제대로 된 판단을 하기에 미숙한 나이 아닌가요. 아이들을 다 같이 몰아세우면 단톡방을 만든 A에게 화살이 돌아가요. 그러다가 또 무슨 일이 생기면 선생님이 책임지실 건가요? 아이들을 훈육하더라도 분리해서 해야지요.
너무 답답해서 한참을 따져 물었다. 학교에서 다 배운 거라 잘못된 걸 알면서도 단톡방에 남아있는 는 게 문제라는 말만 자꾸 반복하기에, 그러는 선생님은 학교에서 배운 대로만 살았냐고 묻고 싶었다. 그리고 교육받은 결과가 이것이냐는 말도 하고 싶었다. 차마 못하고 참았지만.
A아이는 사건에 별 관여하지 않은 아이에게 사과까지 했다고 한다. 관여하지 않은 아이들의 화살은 단톡방을 만든 아이에게 돌아갔다.
- A때문에 우리가 자꾸 선생님한테 불려 가잖아. 왜 초대해서 귀찮게 만들어.
염려했던 일이 벌어졌다. 일을 키울 문제였던 가에 관해 또 생각하게 했다.
아무리 피해아이 입장에서 일을 해결해야 한다고 해도, 내 아이가 피해를 입었더라도 이건 아니다. 정말 이래서는 안 된다. 교육하는 사람들은 어른이지 않는가.
나는 학교 폭력 규정을 묻지 않을 수 없었다. 초등학교에 내려온 지침이 있는지, 순서대로 진행이 되고 있는데 내가 문제를 삼은 것인지를 물었다. 예상대로 딱히 없었다. 일주일 동안 아이들에게 했던 일은 선생님의 판단이었다.
담임은 아이들을 불러 물었을 때, 다들 잘못한 걸 인정하는데 어머님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세요,라고 했다. 분위기가 이미 아이들의 큰 잘 못으로 몰아갔는데 어떤 간 큰 아이가 나는 잘 못이 없어요라고 말할까요? 선생님은 그렇게 할 수 있어요? 난 못할 것 같은데요.
어떤 일이든 평정심을 유지하고 논리적으로 대처하고 싶었는데 오늘은 그러지 못했다. 감정이 여기저기 뻗치고 돋아났고 어른들의 시선에 갇혀 아이들을 판단하는 모습에 감정이 격해졌다.
방관자: 일에 관여하지 않고 곁에서 보기만 하는 사람.
진짜 방관자는 누구인지 잘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