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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챠챠 Dec 29. 2022

인생 동화책

춥고 어두운 겨울날들을 위해 햇살을 모으는 쥐 이야기


유아교육과에서 어떤 과목이었는지 기억이 잘 나질 않는데, 아마 유아언어교육이었던가. 담당 교수님 이름도 생각이 안 나지만 둥그스름한 얼굴과 커트 머리, 나긋나긋한 말투, 자주 입던 짙은 베이지색 정장 차림새로 따뜻하게 대해주던 모습이 또렷하다. 당시 실습 과제가 동화책 한 권을 선정해서 판동화, 융판동화, 테이블 동화, 앞치마 동화 등을 만들어 구연하는 것이었다. 과제는 대부분 이런 식이다. 유아수학교육 과목에서는 수학 관련 교구를 만들어 수업시연하는 것, 유아미술교육 과목에서는 미술 관련 교구를 만들어 수업시연하는 것이 과제다. 그 안에는 T, C가 빼곡히 적힌 모의수업계획안이 포함되어 있다. T는 선생님인 나, C는 가상 아이를 말한다. 내가 할 질문과 아이의 예상반응을 넣어 대본처럼 만드는 것이다. 활동명, 활동 목표, 대상연령, 집단형태, 소요시간, 도입, 전개, 마무리 등을 다 적는다. 보통 20~30분 내외다. 외워서, 많은 사람 앞에서, 더군다나 점수판을 들고 있는 교수 앞에서 해야 하니 벌벌 떨면서 땀을 흘리고 어색하기 짝이 없게 입꼬리를 올려가며 애를 쓰곤 했다.

그런데 동화구연이라니. 교수님은 동화책 목록을 주고, 겹치지 않게 한 권씩 맡으라고 했다. 친구들이 동화 구연을 모습을 보는 것도 큰 도움이 되니 되도록이면 다양한 책을 경험하자는 의미였다. 목록 중 인기 있는 책은 존 버닝햄 <검피 아저씨의 뱃놀이>, 마이클로젠 <곰 사냥을 떠나자>, 다다히로시 <사과가 쿵!>등이었던 것 같다. 반복되는 구절이 많고 유아들이 좋아하는 책이다. 외우기에 부담도 덜하다. 동화구연 시 완벽하게 외울 필요는 없지만, 흐름을 알아야 다음 장면 전환이 쉽고 매끄럽게 이어진다. 재미있는 대사에 치고 나갈 정확한 타이밍도 알아야 한다. 

내가 택한 동화는 레오 리오니 <프레드릭>이다. 

표지에 흰 바탕에 새빨간 양귀비 꽃 한 송이를 들고 졸린 눈으로 바위 뒤에 동그마니 앉아 있는 프레드릭이 있다. 아이들보다 어른이 더 좋아하는 책, 알록달록 돌담 사이에 짙은 회색 쥐 프레드릭을 보니 다른 책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판동화로 프레드릭만 펠트지로 만들어 찍찍이로 붙였다 떼었다 하며 읽어야겠다고 정했다. 사실 판동화는 다른 것보다 만드는 데 시간이 오래 걸린다. 하드보드지에 한 장, 한 장 그림을 그려서 배경을 만들어야 하는데 프레드릭은 콜라주라 나도 같은 방법으로 제작했다. 프레드릭은 다른 쥐들과 다르다. 쥐들이 겨울 양식을 모을 때 햇볕 아래에 누워 햇살을 모은다. 춥고 어두운 겨울을 위해. 색깔을 모으고, 이야깃거리를 모은다. 겨울이 되고 모아 놓은 음식이 동이 나고 쥐들은 프레드릭을 찾는다. 프레드릭은 모아 두었던 이야기를 꺼낸다. 다른 쥐들은 눈을 감고 가만히 이야기를 듣는다. 프레드릭의 이야기가 끝나고, 친구들은 말한다. 

"프레드릭, 넌 시인이야!"

"나도 알아."

아마, 내가 <프레드릭>을 선택한 이유는 "나도 알아."라고 말한 당당함 때문이었을지도 모른다. 

지금 생각해보면 프레드릭처럼 살고 싶지만 그러지 못했던 욕망이 나도 모르게 튀어나온 것 같다. 마음의 양식과 물질적 양식 둘 사이에서 고민하다가 마음을 내려놓고 유아교육과를 선택했던 아쉬움이 프레드릭에 투영되었나 보다. 주변에서 양식을 모아갈 때 의연하게 자신이 생각한 대로 할 수 있는 용기. 내가 가지지 못한 것이었다. 눈치를 주지 않아도 마음속으로 주변 사람을 의식하고 앞서서 상대방 마음도 고려하는 피곤한 삶. 나만 누리는 것이 미안해서 참고 지낸 생활이 몸에 착 달라붙어 떨어지질 않았다. 

고등학교 때까지 글을 쓰다가 손을 놓은 이유도 주변 시선에 영향을 받은 탓이었다. 다른 반 선생님이 내 글을 보고 정말 내 글이 맞는지 물었던 것, 혹시 다른 글을 내서 상을 받는 게 아니었냐고 들려오는 의심. 학교 대표로 나간 글쓰기 대회에서 탈락. 글쓰기 대회에 나갔을 때도 나만 혼자였다. 다들 글쓰기 선생님과 동행해서 대회장 앞에 서 있을 때, 옆에서 조언하는 소리를 아무렇지도 않게 스치며 지나쳤더랬다. 혼자인 내가 너무 초라하게 느껴져서 그때 어떤 주제로 글을 썼는지도 기억에 없다. 남은 기억이라곤 대회가 열렸던 장소와 많은 사람 사이에 외따로 있었던 나. 괜찮은 척했지만 얼굴이 굳어서 느껴질 지경이었던 기분뿐. 아무도 날 신경 쓰지 않았지만 모두 나를 의식하는 것만 같았다.


동화구연하는 날까지 나는 <프레드릭>을 수십 번 읽었다. 외우려고 했던 건 아니었는데 교수님이 외웠냐고 물을 정도였고, 점수는 A+를 받았다. 마지막 구절, "나도 알아."를 읽는 순간 나는 프레드릭이 되어 있었다.

지금 당장은 아니더라도 언젠가는 그렇게 될 것이라는 의지가 있었다. 그리 오래가진 않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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