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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챠챠 Dec 28. 2022

그냥 경력단절여자

다시 나를 찾는 시간

나는 마을기록을 하면서 책을 만드는 사람이다. 지금에 와서 사람들이 내게 궁금해하는 건, 어떻게 일을 시작했느냐이다. 일인출판사 대표, 인터뷰어, 마을 기록, 강사. 나를 소개할 때 쓰는 단어다. 장황하게 늘어놓으려는 건 아닌데 말하다 보면 뭐 하나 빼놓을 수가 없다. 성인은 내 소개를 듣고 나서 시작을 궁금해하고, 학생들은 방법을 궁금해한다. 내가 말한 성인은, 직업을 가져본 적이 있는 20대 이상을 말한다. 그들은 이미 직장을 구하려고 고군분투했고 사회생활을 어느 정도 해봤다. 그리고 결혼을 하고, 아이를 키우면서 경력단절이 된 여자들은 더더욱 다음 시작이 어렵다고 입을 모은다. 

나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저도 선생님들과 같아요,라고 말을 하면 보통 웃음을 짓지만 믿을 수 없다는 투로 대꾸한다. 뭘 잘하는 게 있었겠죠. 아뇨, 하나도 없었어요. 심지어 회사에서 강의하라는 소리에 겁이 나서 회사를 그만두었는데요.

강의를 가면 꼭 내가 이 자리에 서게 된 이유부터 말을 한다. 강의를 하는 것이 대단한 게 아니라 누구든 할 수 있다는 의미에서 꺼내는 말이다. 보통 강의를 들으러 오는 사람들은 주부가 많아서 내 이야기를 더 좋아하는 것 같다. 실제로 강의가 끝나고 물어보면 대다수가 비슷한 반응을 보이기도 하고.


시간을 거슬러 오르면 유아교육과를 졸업하고 국공립어린이집에서 일하다가 유치원으로 옮겨서 5~7세 아이들과 일과를 보내던 내가 있었다. 지금 와서 생각하면 나는 전공을 잘 못 선택했다. 나와 맞지 않은 길, 취업만을 바라보고 갔으니 취업에는 성공했지만 그게 다였다. 19살, 20살의 나는 아주 작았고 집안 형편도 좋지 않았다. 부모님은 고생하면서도 어떻게 해서든 해주려고 해서 되려 장녀인 나는 부담감만 컸었다. 대학 생활 때 단체로 제주도 혹은 일본으로 여행 갈 기회가 있었는데 나는 집안형편이 비슷한 몇몇 친구들과 학교에 남아 있었다. 우리끼리는 가고 싶지 않아서 학교에 있는 거라고 했지만 사실은 자신의 상황을 낱낱이 이야기하고 싶지 않았다는 것을 안다. 입 밖으로 꺼내는 순간 자존심이 바닥으로 치달을 것만 같아서. 고등학교 때 집안형편이 어려운 사람은 신청해서 학비나 급식비를 감면해 줬었다. 그때는 피할 길이 없어 쭈뼛거리며 담임 선생님한테 신청을 했었다. 비밀이 보장되지만 모두가 아는 내 비밀, 부끄러운 일이 아니라고 다독여줘도 아무런 위로가 되지 않은 집안 환경.

아무튼 친구들끼리 따로 이야기하지도 않았는데, 부모님께는 여행에 관해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공사판에서 아빠가 힘들게 번 돈, 엄마가 뷔페 설거지나 청소일을 해서 번 돈을 여행경비로 쓴다는 말을 차마 할 수 없었다. 졸업하고 바로 취업을 했다. 그게 3년제 유아교육과를 선택한 이유였으니까. 국공립어린이집에서 일하며 아동학사를 땄다. 4년을 일했는데 도저히 견딜 수가 없어서 유아교재 회사 연구원으로 이직했다. 연구원 생활을 한 지 얼마 안 되었을 무렵 이사님이 강의를 해보는 것이 어떻겠냐고 제안을 했다. 방문교사를 시작하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하는 강의자료를 준비해서 본인 앞에서 먼저 해보라는 것이었다. 나는 아연실색했다. 누가 봐도 A형, 요즘에는 I라고 하는. 남들 앞에서 입도 못 떼는 나보고 어떻게 강의를 하라고 할 수 있지. 거절했지만 이사님은 단호하게 밀어붙였다. 난 PPT조차 준비하지 못했다. 상황이 너무 공포스럽고 무서웠다. 이사님과 일대일로도 못 할 것 같은데, 연습해서 백여 명 앞에서 한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결국 회사를 그만뒀다. 그리고 결혼을 하고, 살던 지역에서 벗어나며 소위말하는 경력단절여성이 되었다. 아이를 키우며 어린이집도 보내지 않았고 5살이 되어서야 단설유치원에 보냈다. 하루종일 끼고 있다가 오전 3~4시간 정도 내 시간이 생기니 과연 시간을 어떻게 활용해야 하나 싶어 설레기만 했다. 혼자 카페에 가서 브런치를 먹어볼까, 하지만 이건 한 번이면 족하다. 쇼핑이나 혼자 보는 영화도, 매일 할 수는 없는 즐거움이었다. 

문득 나는 무엇을 좋아하는 사람이었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너무 일찍 시작한 결혼에 친구들은 한창 사회생활 중이었고 내게 왜 집에만 있느냐고 물었다. 점점 나는 작아졌다. 운전면허가 있지만 면허를 딴 이후로 차를 몰아보지 않은, 친정에 가려면 남편의 도움을 받아야 하는 내가 너무 싫었다. 고작 5년 일하려고 대학을 졸업한 건가. 아이 손을 잡고 짐을 짊어지고 버스를 타야 바람이라도 쐴 수 있는 기회가 생기니 얼마나 답답했는지. 신도시라 더 그랬던 것 같다. 그러던 중 도서관 동아리 활동 공고를 봤다. 글쓰기 동아리였는데 포스터를 처음 보던 날, 동네 엄마한테 보여줬던 기억이 난다. 취업을 위해 유아교육과를 선택하기 전에 내가 하고 싶은 것은 글쓰기였다. 문예 창작과를 찾아보다가 한순간에 유아교육과로 바꿀 수 없었던 까닭은 '취업'이라는 이유 하나였다. 

내 시간이 생기게 되던 날, 나는 글을 쓰기로 마음먹었다. 이제는 나도 내가 좋아하는 것을 해봐도 되지 않을까. 지금이라도 내가 좋아하는 것을 찾아야겠다고 다짐했던 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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