촘촘
평일 오전, 한가로운 날이었다. 달력 빼곡히 스케줄이 적혀 있었는데 6월에는 두어 개 빈칸이 생겼다. 무엇을 하고 보낼까, 하다가 아파트 작은 도서관에서 하는 어반스케치 수업을 들으러 갔다. 마침 첫날이었다.
첫 시간이니 손을 푸는 시간이 주어졌다.
책상에 빈 종이를 올려놓고, 펜과 지우개 하나씩 놓였다. 아무것도 그려지지 않은 하얀 바탕 종이를 보고 있자니 오히려 답답하다. A4용지가 생각보다 꽤 크다. 키보드를 두드리며 A4사이즈 가득 글을 채울 때는 느끼지 못했던 감정이 연필 하나로 솟구친다. 막막하다.
종이 위치를 확인하고 눈을 감았다. 그리고 아무렇게나 선을 그었다. 계획 없이 움직이는 것이 참 불편하구나, 하는 생각을 하면서 연필 잡은 손은 이리저리 움직였다.
가로선, 세로선, 대각선.
눈을 떴다. 강사님은 각자 그림에서 숨은 그림 5개를 찾으라고 했다. 옅게 새어 나오는 한숨 소리가 들렸다. 또 한 번 막막하다. 이번에는 색연필로 찾았다. 처음에 찾은 건 리본이었다. 그리고 숫자 4, 영어 T, H, Z까지.
여기서 끝인가, 싶었지만 그럴 리가 없다. 나는 강의를 하면서 끊임없이 사람들의 생각을 묻고, 표현을 요구한다. 수강생 입장에서 서 보니 이 또한 만만치 않다.
내 그림에서 찾은 숨은 그림 5개로 이야기를 만들어 보라고 했다.
글을 썼다. 누군가에게 다듬어지지 않은 글을 즉석 해서 소개하는 건, 난감하다. 글쓰기가 직업이 되면서 생긴 무거움이다. 앉은 책상별로 한 명씩만 발표하기로 했는데 지목당했고, 사람들 앞에 서서 그림을 보여주며 글을 읽었다.
"글도 그렇지만, 그림에도 성격이 드러나는 것 같아요.
앞에 분들 이야기를 들으니 더더욱 그런 생각이 드네요. 저는 따로 이야기를 설명하기보다, 그대로 읽을게요.
저는 그림 속에서 리본, 숫자 4, 영어 T, H, Z를 찾았어요.
쓴 글을 읽을게요."
우리는 서로 어딘가에 걸쳐진 사이.
숫자, 모양, 알파벳은 떨어 트려 놓고 보면 아무 상관없는 남이지만, 길을 따라가다 보면 모두 만난다.
지금 만나지 않았더라도, 언젠가는 마주 볼 수도, 혹은 스쳐 지나갈 수도 있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