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쓰기의 의미

by 재연



난생처음 북토크를 다녀왔다. 문학살롱 초고라는 공간은 생각보다 작아서 놀랐지만 또 그만큼 옆 사람들과 앞에 앉아계신 작가님의 표정과 호흡을 모두 느낄 수 있어서 좋기도 했다. 맥주 한 병씩 짠하면서 책과 글에 대한 이야기들을 나누는 시간이었다. 술과 책의 조합이라니, 이보다 잔잔하게 쾌락을 즐길 수 있을까. 요즘 들어 글쓰기라는 것의 의미가 나에게 더 커져서, 최근에 보낸 시간 중 가장 충만하고 벅찬 시간이었다.




이제 와서 생각하면 나에게 글쓰기의 역사는 아주 옛날로 거슬러 올라간다. 초등학교 3학년에 아빠의 주재원 발령으로 간 영국에서 턱수염이 하얗고 수북한 영국인 할아버지에게 에세이 과외를 받았었다. 과외라고 하기도 민망한데, 학교에서 에세이 과제가 많은 친언니가 수업을 받고 나면, 나는 그 주에 내주신 주제로 쓴 글을 첨삭만 받고 끝나는 식이었다. 그때 썼던 글들은 전혀 기억도, 남아있지도 않지만 크게 머리 굴리지 않고 그냥 슥슥 써 내려갔었던 것 같다. 손녀 같아서, 아직 자라나는 꿈나무니까 더 좋게 좋게 말씀해 주셨을 테지만, 수업이 끝나면 몇 번이나 엄마에게 재능 있는 아이라고 말해주셨다 한다. 그냥 썼는데 잘한다 잘한다 해주니, 내 인생 첫 글쓰기 기억은 쉬웠고 재밌었고 일기 같았다.



그러다 한국에 돌아왔고, 중학생이 된 나는 수많은 대치동 입시학원 사이에서 조금 뜬금없는 독서 학원을 다녔다. 아마 중학생들이 읽기엔 다소 어려운 책을 매주 읽고 매주 독후감을 쓰게 하면서 사고력과 독해력을 동시에 올려주겠다는 목적의 학원이었겠지? 나 말고는 모두 외고나 특목고를 준비했던 친구들이었던걸 생각하면 그것도 결국 고등학교 입시학원이긴 했나 보다. 그렇지만 약한 주장과 근거를 잡아내어 이기고 지는 독서토론 학원이 아니라 자유롭게 글을 쓰고 그에 대해서 찬반 없이 순수하게 각자의 감상을 주고받을 수 있는 곳이어서 좋았다. 데미안 같은 지금 읽어도 어려운 책도 읽어보고, 이게 도통 무슨 의미인지 모르겠는 영화를 보기도 하고, 그 후엔 나의 생각을 한 편의 완성도 있는 글로 써서 매주 같은 반 아이들과 하나씩 낭독하고 이야기를 나누는 곳이었다. 내가 받은 사교육 중 가장 값어치 있었다고 생각한다.


각 학교에서 꽤 날고긴다는 아이들이랑 선의의 경쟁을 하면서 더 멋들어지고 화두를 던질 수 있는 글을 쓰려고 처음으로 글쓰기라는 행위에 공을 들였던 것 같다. 어떨 땐 그게 과해서 다시 읽으면 알맹이는 없고 기교만 난무하고 힘이 잔뜩 들어간 글들이 나오기도 했다. 글쓴이가 인생이란 무엇인지, 인간이란 어떤 동물인지, 세상의 빛과 그림자 등등 철학적인 고민을 하고 글을 써 내려가는 스스로가 제법 멋지다고 생각하고 있는 게 글에서 뚝뚝 떨어질 때도 있었다. 인생의 가치와 허무를 동시에 온몸으로 버티고 있는 것만 같은 단단한 착각에 빠져 스스로에게 도취된 중학생 작가. 스스로 중2병을 겪은 적이 없다고 생각하는데, 어쩌면 그 시기에 휘몰아치는 생각들을 모두 글로 뿜어냈기 때문에 순탄하게 넘어갔던 것 같기도 하다. 그리고 그런 내 글들을 누구보다 진심으로 봐주셨던 선생님을 만난 것도 큰 행운이었다. 선생님은 나를 2년간 봐주시면서 "재연이의 글은 재연이를 꼭 닮아 참 따뜻해"라고 말씀해 주셨는데, 몇 날 며칠 그 말을 곱씹고 또 곱씹었다. 미래의 내가 어떻게 성장해 있을지 매 글마다 상상을 하게 되고 기대가 된다고 글 말미에 써주신 코멘트는 활자를 벗어나 마음 깊숙이 날아와 박혀버렸다. 글쓰기는 여전히 내가 잘하는 거구나, 글로 표현하는 건 여전히 재밌구나 싶었다.



그렇게 몇 년이 흘러 대학생이 됐고, 글쓰기에는 꽤 오랫동안 손을 놓아버렸다. 세상에 재밌는 게 너무 많아 혼자 조용히 사색하고 글을 쓰는 건 뒷전이 됐다. 그러다 한 번씩 마음이 허한 날이면, 블로그에 글인지 고해성사인지 모를 텍스트덩어리(?)를 남기고 도망갔다. 글을 읽으면 글쓴이가 어떤 사람인지, 지금 어떤 심리 상태인지가 어렴풋이 느껴지는데, 그 당시 글들은 스스로도 정리가 안돼 감정을 배설하고 간 흔적들 같다. 울적한 날에 해소하려는 수단으로만 글을 쓰다 보니 글은 점점 무거워지고 어두워졌다. 기분이 좋다가도 읽으면 우울에 침잠해 버리게 되는 그런 글이었다. 나 슬프다 힘들다 징징거리는 글. 쓰고 나서도 마음에 들지 않아 비공개, 삭제를 반복하고 누군가가 읽으면 내 밑천을 들킨 기분이었다. 글에서 느껴지는 내가 너무 나약하고 뻔했다. 내가 쓴 글을 다시 읽고 또 읽는 편인데, 다시 읽고 싶지 않은 글들이었다. 글 쓰는 건 더 이상 자신 있는 일이 아니었다.




북토크에서 작가님이 에세이가 좋은 이유는, 어떤 사람이 한 시절동안 가장 깊게 생각한 것들을 정제된 형태로 남긴 것이기 때문이라고 하셨다. 그 말을 듣고, 내가 한없이 어둡게만 썼던 그때 글들도 그냥 그 시절을 담은 것뿐이구나, 위로가 됐다. 내가 어두운 자아성찰적 글만 쓸 줄 아는 사람이 아니라 그냥 그런 때가 있으면 그런 글이 나올 수밖에 없는 거구나. 억지로 다른 주제로 전환해보려 하는 것도 어쩌면 그만큼 부자연스럽고 솔직하지 못한 글만 만들어낼 수도 있겠구나. 내가 무슨 노벨 문학상 받으려고 쓰는 것도 아니고, 인문학계의 혜성처럼 등단한 작가로 세계인들의 칭송받고 싶은 것도 아니고, 그냥 마음 가는 대로 써보자. 똥을 싸도 박수갈채받는 유명 작가는 안 돼도 내 글을 읽은 사람들이 잠시나마 시원하게 묵은 볼일을 해결한 기분이 들면 그걸로 된 거 아닌가?



여전히 글을 잘 쓰는 것은 어렵고, 나는 한참 부족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잘 해내고 싶다. 한 명이라도 내 글을 읽고 당장이라도 어떤 글이라도 쓰고 싶은 마음이 불쑥 솟는다면 성공적인 글 같다. 읽는 동안만큼은 그 사람을 둘러싼 무형의 공간에 오로지 글과 사람만 존재할 수 있는 글은 훌륭한 글이다. 그런 잘 쓴 글을 쓰고 싶다. 욕심이 생기니 잘 쓴 글을 동경하게 되었다. '탐닉'이라는 단어가 딱 어울릴 것 같다. 잘 쓴 글을 탐닉하고 있는 요즘이다. 하고자 하는 말, 표현하고자 하는 무언가를 읽는 사람이 최대한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도록 다듬고 또 다듬는 작업이 너무 어려우면서도 너무 재밌다. 나조차도 두루뭉술한 어떤 느낌은 대체 어떤 단어를 써야 선명해질까. 분명 살면서 모두가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느꼈을 이 감정은 어떻게 활자로 옮겨야 진부한 문장이 아닌, 가슴을 후벼 파서 어딘가에 적고 싶게 만드는 울림이 될 수 있을까. 글쓰기는 마치 얼음으로 조각을 만들 때처럼 이리저리 다듬어 더 정교하고 세밀하게 만드는 세공작업 같다. 수많은 비즈 중에 예쁜 것들만 고르고 골라 예쁜 팔찌를 만드는 것처럼, 머릿속을 부유하는 생각을 하나 골라잡아 고르고 고른 단어들을 모아 한 문장으로 꾀어내는 일. 잘하고 싶은 일이 또 하나 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