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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재연 Mar 06. 2023

내가 잘난체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독감에 걸려 크리스마스 당일을 하루종일 침대에서 보낸 해가 있었다. 크리스마스 이브날 친구들과 얇은 코트 하나 걸친 채 밤늦게까지 바깥을 열심히 돌아다닌 것이 화근이었다. 그때가 대학교 2학년 연말이었으니, 3학년부턴 무언가 완전히 달라져야 할 것 같은 압박에 제대로 놀 수 있는 마지막이라는 비장한 각오로 거리를 배회했다. 모두 하나같이 곧 죽어도 포기하지 못하는 살색 스타킹에 치마를 입고 겨울옷이라기엔 방한의 기능이 전혀 없는 얇고 나풀거리는 코트를 두른 채 대학가 앞 술집 골목을 우루루 몰려다녔다. 이브에서 크리스마스로 넘어가는 새벽엔 거리마다 우리같은 혈기왕성한 젊은 이들로 가득했고 저마다 추위를 잊은 채 한껏 빨갛게 상기된 얼굴로 휘청거리고 있었다.

다음 날 아침 눈을 떠보니 머리는 돌덩이를 올려놓은 것처럼 무겁고 온몸이 밧줄로 묶인 것처럼 옴짝달싹 못하겠는 느낌이 심상치 않았다. 정수리가 화산 꼭대기에서 용암이 흘러나오는 것처럼 뜨끈하고 눈 주변은 뻐근하다 못해 경직된 느낌이었다. 단순히 코가 막히고 목이 아픈 감기가 아님을 직감했다. 크리스마스에 독감이라니 박복하기도 하지.


엄마는 "으이구 웬수야"하면서도 감기약과 이온음료를 한가득 사들고 와 침대 옆에 두고갔다. 잘 먹어야 빨리 낳는다며 빨갛게 잘 익은 딸기를 씻어 방에 넣어주고, 딸기를 아직 다 먹지도 못했는데 아빠랑 산책 나갔다 사온 설탕이 솔솔 뿌려진 꽈배기까지 간식으로 두고 갔다. 좋은 곳으로 한껏 멋부리고 놀러나간 남들의 크리스마스를 이불 속에서 핸드폰으로 손가락만 까딱까딱하며 훔쳐보는 내 모습이 감옥에 갇힌 죄수 같으면서도 맛있는 간식이 이렇게 시도 때도 없이 배식되는 감옥도 없을 거라며 속으로 허탈하게 웃었다.  


열이 펄펄 끓었다가 좀 괜찮아지기를 몇 번 반복하다가 다행히 12월 31일은 가뿐히 일어나 새해 타종을 가족들과 들을 수 있었다. 2n년을 살면서 감기는 수도없이, 독감은 아주 가끔만 걸렸지만 이때가 유독 기억에 남는다. 졸지에 아무 잘못없이 크리스마스날 간병인이 된 엄마가 물 적신 수건을 들고 내 방을 드나들때마다 매번 멋쩍게 웃으며 "엄마 고마워..미안...." 하면서도 은근히 마음 한 구석이 포근했다. 아플 때 이렇게 챙겨주는 엄마가, 웬수라며 등짝을 때리면서도 내가 먹을 꽈배기까지 꼭 사오는 엄마가 있음을 그때 유난히도 더 느꼈다. 아파도 이렇게 극진한 챙김 받으니 아픈 것도 나쁘지 않은 것 같다했다가 한번 더 등짝을 맞았지만.






엄마랑 산책을 하다보면 온갖 질문 세례를 받곤 한다. 아줌마들은 뭐가 그리 궁금한 게 많은걸까. 대체 이 집이 맛있는지 내가 가보지도 않았는데 왜 매번 물어보는걸까. 매번 걷는 동네에 어쩜 저렇게 늘 호기심이 많을까. 저 가게는 뭐하는 곳이냐고 물어볼 때면 나는 조용히 네이버 검색창을 킨다. 대충 대답을 얼버무리기도 하고 엄마에게 물음표 살인마라는 별명을 붙여주기도 한다. 세상에 대해 궁금한게 가장 많은 집단에는 두 부류가 있다. 이제 막 입을 뗀 어린이들과 할머니, 할아버지들. 이건 뭐야, 저건 뭐야 같은 질문으로 엄마 아빠를 괴롭히는 어린 아이의 호기심만큼이나, 우리나라 아줌마, 할머니, 할아버지들은 참 궁금한 게 많으시다. 어느 날 흐드러지게 핀 꽃밭에서 휠체어에 앉은 할머니의 초롱초롱한 눈망울을 봤을 땐, 어쩌면 저 눈은 호기심이 아니라 죽음 앞에서 주변의 모든 것이 그저 경이롭고 아름다워 어떻게든 눈에 더 소중히 담고 싶은 마음일수도 있겠다는 생각에 서글퍼지기도 했다. 사람은 일방통행으로 나이 드는 것이 아니라, 나이를 먹으면서 오히려 역방향으로 돌아오는 것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종종 한다. 죽음은 흔히 흙에 묻힌다는 표현으로 묘사되는데 그렇게 자연으로 서서히 돌아가는 과정에서 다시 어린 아이로 회귀하는 것 같다. 혼자서 할 수 있는 것들이 점점 줄어들고 슬프게도 모든 것을 남의 손을 빌려 해결해야만 할 때가 오니까.


내가 엄마에게 물어보는 것보다 엄마가 나에게 물어보는 것이 더 많아질 때마다, 같이 걷는 산책길에서 문득 옆을 봤을 때 예전보다 키가 조금 더 작아진 것 같은 엄마를 볼때마다 이젠 내가 부모님을 더 보살펴야 하는 시점이 언젠간 온다는 사실이 덜컥 실감난다. 독감 걸린 크리스마스날 엄마가 밤낮으로 나를 들여다보고 간 것처럼, 병원에 갔을 때 간호사들이 늘 나의 보호자로 불렸던 부모님의 보호자는 언젠가 내가 되어야 한다는 사실에 벌써 가슴이 철렁하기도 한다. 나는 여전히 내가 보살핌만 받아도 될 정도로 어렸으면 좋겠고, 엄마 아빠는 늘 나의 보호자로 강인했으면 좋겠다. 하지만 나는 조금씩 작아지는 두분보다 어느새 키가 훌쩍 더 커있었다.  




이 글은 나중에 부모님이 지금보다 훨씬 더 약해졌을 때 내가 마음을 바로 잡기 위해서 쓰는 다짐의 글이기도 하다. 그때의 내가 엄마 아빠에게 자주 잘난체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두 분이 알던 세상은 어느 순간 따라잡을 수도 없이 변해있을 것이고, 모르는 건 많아질 것이다. 어리둥절한 두 분 앞에서 내가 답답해하거나 가르쳐들지 않았으면 좋겠다. 이건 뭐야? 저긴 뭐하는 곳이야? 질문이 쏟아져도 짜증내지 않고 "응 엄마 이건 뭐냐면~" 하고 예쁘게 대답하는 딸이 되고 싶다. 한 부모는 열 자식을 키워도 열 자식은 한 부모를 못 모신다는 말이 있다. 넘치게 해드리려 해도 내가 기억하지 못하는 어릴 적 시간들 속에서 엄마 아빠의 모습보다 늘 부족만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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