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기장을 사면 늘, 매번, 당연하게도, 빼곡한 앞장과 하얗고 빳빳하게 남아있는 뒷장으로 끝난다.
아마 제대로 일기장을 써본 건 초등학교 때 방학 숙제가 처음이자 마지막일 것이다. 전국 초등학교 선생님들이 다같이 짠듯 방학 숙제에서 빠지지 않는 것이 바로 일기 쓰기였다.
여자 아이들은 대체로 인형들과 하트가 잔뜩 그려져 있는 분홍색 일기장에, 남자 아이들은 자동차와 공룡 캐릭터로 뒤덮인 하늘색 일기장에 방학의 일상을 줄 하나의 높이에 꽉차는 크고 삐뚤빼뚤한 글씨체로 썼다.
맨 위에 연월일을 쓰고, 해, 구름, 비, 눈 네 가지 중 그 날의 날씨에 동그라미를 치고 그 날의 일과를 시간 순으로 보고하듯이 써내려갔다. 가족들과 호수공원에 갔는데 엄마가 솜사탕을 사줬다. 맛있어서 기분이 좋았다. OO이랑 인라인스케이트를 타다 넘어졌다. 아파서 슬펐다. 무엇을 했는지 한 줄, 그래서 기분이 어땠는지 한 줄, 단순한 두 줄 레퍼토리의 반복.
며칠 밀린 날에는 날씨는 해와 구름 중에 나름 고른 분포로 해-구름-해-해-구름-구름 번갈아 골라주고 무엇을 했는지 기억을 더듬다가 어떨 땐 그럴 듯한 상상으로 꾸며 쓰기도 했다.
숙제는 안할 수 없으니 꾸역 꾸역 개학 전 날까지 채워 제출하면, 담임 선생님은 늘 종이 아래 쪽에 "우리 재연이 가족들과 정말 재밌는 방학 보냈구나. 재연이 일기를 읽으면서 선생님은 내내 기분이 좋았어"와 같은 따뜻한 메모를 남겨주시곤 했다.
해-구름-해-해-구름-구름 규칙적인 리듬감이 느껴지는 날씨 동그라미들과 앞장에 비해 어딘가 엉성한 전개의 글들을 선생님께선 눈치채셨을지도 모른다.
연말연시만 되면 서점 입구부터 예쁜 다이어리들이 오와열을 맞춰 쭉 진열된다. 귀여운 캐릭터들이 그려진 다이어리부터 단색 가죽 다이어리까지 해마다 종류는 더 다양해지는 것 같다. 1,2월만 열심히 쓰이다 버려질 불상사를 피하기 위해 반기별, 분기별 다이어리도 있다. 매달 1일이면 달라지겠다며 다잡는 마음은 새해가 되면 더 강렬해져 번번이 이 구간을 지나치지 못하고 새해 다이어리를 고른다.
이건 칸이 너무 작아서, 너무 두꺼워서, 너무 무거워서, 색이 질릴 것 같아서, 등등 깐깐하게 심사해서 산 다이어리는 고민한 것이 민망할 정도로 빠르게 잊힌다. 1월에 있는 내 생일과 언니 생일에 예쁜 스티커를 살포시 붙여놓고 예정되어 있는 1월의 약속들을 신중하게 옮겨 적은 후 혼자 뿌듯해하다가, 비로소 새해가 되어 포부 따위를 첫 장에 꾹꾹 눌러 적고 덮으면 그 길로 먼지 이불을 덮은 채 일 년 내내 방치되는 다이어리들이 지금까지 몇 권이었는지.
올해는 어차피 못 채울 거, 차라리 종이라도 아끼자는 마음에 다이어리를 사지 않았다. 일정이야 핸드폰 달력 어플이 훨씬 편하고, 일기야 매일 쓰지 못할테니 가끔씩 이렇게 쓰는 글로 대체하자고 그럴듯한 합리화를 했다.
그렇게 올해는 정말 안사려나 했는데 어느 새 5년 다이어리를 주문해버린 나. 예전부터 '5년 다이어리'라는 것이 있다는 건 알고 있었는데 어느 날 문득 1년 전 오늘, 2년 전 오늘을 한 눈에 볼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 인터넷으로 가족들과 남자친구 것까지 총 5권을 주문했다.
내가 좋아하는 클래식한 진녹색 표지에, 한 장 한 장 넘길 때 스르륵 다시 덮어지지 않게 완전히 180도로 젖혀지도록 만들어진 질 좋은 종이 다이어리다. O월 O일 아래 5년 간 쓸 수 있는 형식인데, 한 해 분량이 4-5줄만 써도 꽉차는 크지 않은 칸이라 부담도 덜 하다.
작년 오늘 봄 기운이 처음으로 느껴졌구나. 산책가서 꽃이 피었다고 좋아했네. 그 전년도 오늘은 아직 쌀쌀해서 패딩을 입고 다녔구나. 여행도 갔었네? 그보다 전 년 오늘은 생각이 많았었나보네. 맛있는 걸 먹으면서 스트레스를 풀었구나. 3월 20일이라는 하루의 5년치를 한 눈에 볼 수 있다니 마치 나의 역사를 담은 책같다.
쓰다보면 괜히 다음 칸에 눈길이 간다. 내년 오늘은 뭐하고 있을까, 벌써 궁금하다. 어디서 무얼하며 무슨 생각을 갖고 있을지 모르겠지만, 지금보다 더 행복하다면 더할 나위 없겠다. 그리고 가장 마지막 칸, 4년 후 오늘은 내가 정말 많이 바뀌어있겠지. 4년 후는 정말 상상도 안 가 두려운 마음이 들기도 한다. 앞자리가 바뀌어 30대 초반이 된 나의 가장 큰 고민과 행복은 무엇일까. 지금의 나와 얼마나 달라져있을까, 더 좋은 사람이 되어있으면 좋겠다, 막연한 기대도 생긴다. 분명한 건 그때의 나도 4년 전 오늘 일기를 보며 기억을 더듬어 보고 웃기도 할 것이다.
4년 후 12월 31일, 이 한 권의 다이어리가 4년이 지나서야 비로소 완성되면 엄청나게 소중한 보물이 될 것 같다. 이번에는 다르다. 이번 다이어리는 5년 동안 잘 채워볼 수 있을 것 같다. (제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