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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재연 Mar 17. 2023

불타는 허벅지를 즐긴다


하기 전엔 어떻게든 안할 궁리를 하다가도 막상 하고 나면 뿌듯함에 돌아가는 발걸음이 가벼운 것이 있다. 바로 운동이다.

여기서 발걸음이 가볍다는 것은 물론 심리적인 느낌이다. 물리적으로 가벼운 발놀림을 하기엔 허벅지와 종아리가 터져버릴 것만 같아 기저귀 찬 아기처럼 어기적 어기적 걷기 때문이다.

일주일에 두번씩 필라테스를 하고 있다. 작년부터 해왔지만 남들은 새해를 맞이하여 새로운 마음 가짐으로 운동을 시작할 때 나는 필라테스 수업 들으러 가기 너무 춥다는 가당치도 않은 이유로 잠시 수강권을 정지시켰다. 그리고 날씨 핑계도 더 이상 댈 수 없는 3월, 물러날 곳이 없다는 심정으로 다시 운동을 시작했다.

내 몸이 두달 사이에 다시 굳어버린 건지, 아니면 내가 빠지니 회원들의 평균 실력이 너무 높아져 그에 맞춰 수업의 강도가 세진 건지 모르겠지만 수업 후에 집에 돌아가는 길은 어김없이 기저귀 찬 아기의 모습이 된다.

'불 타는 허벅지'라는 말은 대체 누가 만들었을까. 하체 운동 후의 증상을 이보다 더 잘 표현할 수는 없다. 뜨겁게 데운 돌맹이를 양 허벅지 안 근육에 넣은 느낌이다. 알싸하다는 말은 맛을 표현할 때나 쓰는 말이지만, 정말이지 허벅지가 알싸해지는 느낌.

활활 타오르는 허벅지로 힘겹게 땅을 눌러내며 집에 도착하면 바로 미지근한 물로 샤워를 한다. 허벅지 '안'이 타는 것이기 때문에 물로 몸을 지지는 건 별 도움이 되지 않고, 얼른 샤워를 끝내고 머리를 말린 후 침대로 퐁당 들어가 누워야 조금 나아진다.

그렇게 누워있다보면 은근한 뿌듯함이 밀려온다. 뚝뚝 흘린 땀으로 온몸의 불순물이 빠져나간 것 같아 상쾌하고 보송하게 새로 태어난 기분이 든다. 얼얼한 허벅지과 옆구리를 풀어주면서 희미하게 미소가 지어진다.

고통을 즐기는 변태적 기질은 운동 후에 가장 뚜렷해지는 것 같다.






고등학교 시절, 친구들은 나에게 야자실의 붙박이장이라는 별명을 붙여줬다. 야자실에서 보내는 시간과 공부 실력은 절대 비례하지 않지만, 그 성실함을 높이 산다는 의미에서 순수하게 출석률로 매겨지는 상을 고등학교 2학년 이후로 매학기마다 받았다.

내가 다닌 고등학교는 공부를 못하는 학교였기 때문에 대부분의 학생들이 야자를 신청하지 않고 하교했기 때문에 휑해진 학교가 내 세상이 된 것 같은 기분을 만끽하며 친구들과 석식을 먹고, 함께 야자실에서 공부하는 게 나름 즐겁기도 했다.

(이때 기억은 내가 학창시절을 떠올릴 때면 가장 먼저 생각나는 것 중 하나일정도로 따스한 기억이기도 해서 단독 글로 꼭 다시 써야지, 방금 마음 먹었다.)

칸막이 있는 독서실 책상에 저마다 달팽이 집에 들어간 것처럼 얼굴도 보이지 않는 상태로 콕 박혀 공부하는 것이었지만, 우리가 같은 목표로 서로의 숨소리만 옅게 들리는 공간에 같이 있다는 사실이 위안이 되기도 했다.

하지만 야자실의 붙박이장이라는 칭호를 얻기까진 참아야하는 시간들이 더 많았다. 남들이 놀러갈 때도, 무더운 폭염에 집에서 선풍기 앞에 널브러져 있고 싶은 방학 때도, 뚫려 있는 교문이지만 나갈 수 없도록 스스로 만든 울타리에 갇힌 답답함을 감내해야했다. 공부가 잘 되는 날도, 종이 한 장이 천근만근 무거워 한 페이지 넘기는 것조차 힘든 날에도 꿋꿋이 앉아있었다.

노란 불 아래 끝없는 문제들과 다대일로 맞닥뜨릴 때면 울고 싶기도 했지만 문제와 씨름하면서 느낀 희열을 분명 기억한다. 오래 앉아있어 엉덩이가 배기고 목은 뻐근하지만 그 아픔이 변태처럼 좋았다. 야자실 불이 꺼질 때쯤 가방을 싸고 친구들과 학교를 나와 깜깜해진 밤하늘을 마주할 때면 그 희열은 더 선명해졌다.






나를 더 나아지게 만드는 고통은 어딘가 즐거운 구석이 있다. 과연 내가 나아지고 있는 것인가 의문스러운 불안감에 그 즐거움이 가려질 때가 많지만, 나아지려고 발버둥 치는 것 그 자체로 삶에 활력이 더해지기도 한다.

어디에 도달할지 모르지만 일단 노를 젓는 것만으로도 뭔가를 열심히 하고 있는 느낌이 들고, 그렇게 열심히 살아내는 것만으로도 내가 내 삶을 꽉 쥐고 있는 것 같으니까.

해야할 일 목록에서 한 줄씩 죽죽 그어낼 때의 후련함과 짜릿함은 그 한 줄을 긋기 위해 머리 싸맸던 시간을 잊게 한다. 자기 자신을 놓지 않고 잘 살아보려는 모습이 대견해 스스로 사랑스러워지기도 한다. 퇴근 후에 잠을 줄여가며 자기 개발에 시간을 쏟고, 춥고 더운 날에도 런닝화 끈을 고쳐매고 나가 뛰며, 하루라는 시간을 누구보다 촘촘히 보내는 사람들은 모두 잘 살아보기 위해 기꺼이 받아들이는 고통의 즐거움을 아는 사람들일 것이다.



불타는 허벅지가 조금 더 잘살아보려는 몸부림으로 얻은 영광의 훈장같아 아파도 필라테스로 나를 끌고 간다.

모레도 나는 운동 시간 직전까지 집에서 뭉개고 있을 것이 뻔하지만, 끝나고 나면 또 갔다오길 잘했다며 아픈 허벅지를 문지르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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