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bti를 아십니까

통제형 J

by 재연





MBTI의 네 가지 알파벳에서 내가 유일하게 고개를 끄덕일 수 있는 건 끝자리 J다. 김영하 작가님이 유 퀴즈에 출연하셨을 때 본인이 하는 MBTI는 믿지 않는다고, 오히려 남들이 나를 보면서 그 긴 체크리스트를 작성해주면 보다 입체적으로 내 성격을 알 수 있다고 하신 말에 깊이 공감한다. 사람은 생각보다 선입견과 고정관념에 취약한 존재라, 남한테도 색안경을 끼지만, 자기 자신에 대해서도 제대로 알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나인데 내가 아닌 가상의 존재를 만들어놓고 그게 나라고 생각하면서 살아간다. 나는 소심한 사람이라고 생각하지만 주변인들에겐 강단 있고 배짱 있는 사람일 수도 있는 거다. 그래서 남들이 보는 나와 내가 보는 나를 잘 버무리면 그나마 진짜 나에 가까워질 수 있지 않을까 싶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확신 있게 말할 수 있는 건 나는 J다. J는 계획형이라는데, 부정적인 의미를 살짝 가미하면 통제형에 가깝다. 그래도 안심하시라, J들이 남을 통제하는 걸 좋아하는 건 아니다. 본인이 세운 계획에서 무엇인가 엇나가거나 예상치 못한 변수들이 생기는 순간 머리가 아프기 시작한다는 의미다. 단적인 예로 나는 병적인 수준으로 노는 계획을 세운다. 데이트하는 날에는 우선 가고 싶은 동네 후보를 최소 세 가지를 생각해낸다. 그다음 그 동네 별로 맛집, 카페, 갈만한 곳들 등등을 점심-점심과 저녁 사이-저녁-저녁 이후 순으로 정한다. 각각의 시간대에 가장 가고 싶은 곳을 다 뽑으면, 그곳이 급작스러운 주인장의 사정으로 휴무 거나, 줄이 너무 길거나 하는 불상사로 가지 못할 경우를 대비해서 각각 항목 별로 플랜 B를 세운다. 2순위 맛집, 카페를 정하는 거다. 마지막 단계는 완성된 동네 후보들 중에서 하나를 치열하게 골라내는 것. 원래도 내가 이런 걸 알고 있었는데, 글로 쓰고 보니 징그럽다. 내가 나를 겪어보니, 세상에서 제일 피곤하게 노는 인간은 바로 가고 싶은 곳이 너무 많은 J다. 가고 싶은 곳은 너무 많고 먹고 싶은 것도 너무 많고, 시간은 한정적이고. 다행히도 지금 만나는 남자 친구는 그런 날 너무 신기해하면서도 불평 없이 다 따라가 주는 온순한 P다.


그런데 이제 문제가 생기기 시작한다. 아무리 철저하게 세운 계획이라도 완벽하게 실행되기보단 조금씩 어그러지기 마련. 또다시 머리가 아파온다. 나의 더 철저하지 못함을 탓하면서(아니 근데 대체 얼마나 더 철저해야 하는데?) 후회와 자책을 시작한다. 온순한 P는 달래주지만 통제형 J는 내 시나리오가 휴지 조각이 될 기로에 서있기 때문에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다. 그러다 결국 플랜 A, B 어디에도 없던 C를 즉석에서 찾아내고, C는 역시나 플랜 A, B만 못해서 속상할 때가 있고, 또 종종 생각 이상으로 너무 좋아서 다른 날의 플랜 A가 될 때도 있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가고자 했던 곳이 너무 성공적이었던 경우만큼이나, 다 실패해서 자포자기의 심정으로 정말 아무 곳이나 간 경우가 기억에 남을 때가 있다. "우리 그때 그랬던 거 기억나?" 하면서. 남자 친구와 처음 보내는 크리스마스날, 야심 차게 분위기 좋은 양식집을 검색해서 기대를 한껏 하고 갔는데, 야속하게도 '개인 사정으로 오늘은 쉽니다'라는 팻말이 걸려있었다. 분명 휴무일도 확인하고, 며칠 전 가게 인스타그램으로 다 조사하고 갔는데? 다른 뾰족한 대안은 없었다. 그 일대의 모든 식당은 날이 날인지라 모두 예약이 차있거나, 휴무였다. 반쯤 포기하고 이거라도 먹자 하고 들어간 파스타 프랜차이즈점은 라스트 오더 시간이 지났다며 우리를 돌려보냈다. 정말 너무하다며, 우리의 첫 크리스마스인데 정말 아무것도 우리를 안 도와준다며 남자 친구 앞에서 닭똥 같은 눈물을 흘렸다. 그렇게 우리는 첫 크리스마스 저녁을 디델리에서 떡볶이와 김밥을 먹으며 보냈다. 그땐 좋은 곳에서 와인잔 부딪칠 남들이 부럽고 이 상황이 너무 어이없고 짜증 났는데, 그 후로 우리는 이따금씩 그때를 회상하며 깔깔 웃었다. "첫 크리스마스 디델리에서 먹은 커플 우리밖에 없을 거야 그렇지?" "근데 그때 떡볶이 맛있긴 했어ㅋㅋ" "나중에 또 갈래?" 하면서.



2019년 4월, 중간고사가 끝나고 엄마랑 처음으로 단둘이 제주도 여행을 간 적이 있다. 생각해보니 그 여행은 처음부터 순탄하지 않았다. 우선 난생처음 회항이라는 걸 해봤다. 아침 일찍 떠나서 밤늦게 돌아오는 알찬 스케줄로 짰는데, 제주도 칼바람으로 우리가 탄 비행기는 제주 상공에서 한참을 빙빙 돌다가 착륙하지 못하고 청주공항으로 회항했다. 아침잠도 줄여가면서 일찍 출발했는데 회항이라니? 결국 우리는 예정보다 몇 시간 늦게 제주도를 도착했고, 차도 없는 뚜벅이 여행객이라 마음이 조급해졌다. 변덕스러운 제주도 날씨는 우리가 여행하는 2박 3일 동안은 심술을 부리기로 작정했는지 설상가상으로 비도 오고 바람도 세차게 불었다. 아름다운 에메랄드색을 기대하고 간 바다는 회색빛에 뿌연 안개로 덮여 있고, 파도는 너무 심해서 실내로 대피해야 했다. 맛있는 거라도 먹자고 시장가는 빨간 버스에 선 낮에 먹은 흑돼지에 탈이 났는지 엄마랑 나랑 둘 다 식은땀을 줄줄 흘리고 이대로 계속 가단 큰 실수를 할 것 같으니 일단 내려서 해결해야겠다는 생각에 어딘지도 모르는 컴컴한 도로에서 하차했다. 그다음 날엔 유채꽃 명소를 가려고 해변가를 따라 걸어가는데 무섭게 생긴 들개가 자꾸 꼬리를 살랑살랑거리면서 쫓아와서 유채꽃을 포기하고 줄행랑치듯이 뛰어 오고 있는 버스를 번호도 안 보고 타버렸다. 다른 여행객들도 있었는데 우리만 졸졸 따라오다니 우리가 옛날 주인이랑 닮았나? 어쨌든 제주도에 유채꽃이 만발하는 4월에 여행을 가서 유채꽃은 구경도 못했다. 엄마랑 단둘이는 첫 여행이었는데. 그것도 여행하기 제일 좋은 4월에. 계획대로 된 건 거의 없었고, 어딜 가도 바람 싸대기를 맞느라 정신이 없었다. 그런데 엄마와 나는 자주 그때 그 여행을 얘기한다. 둘이서 거의 시트콤 찍었다고 해도 무방할 정도로 사건 사고가 많았던 여행. 개 한 마리에 혼비백산으로 뛴 것도 웃기고 회항해서 항공사 측에서 양해 부탁드린다며 준 초콜릿바를 흔들며 해맑게 사진 찍은 것도 웃기고. 쌩쌩 달리는 버스에서 거의 '태극기 휘날리며'의 명장면처럼 "엄마 난 안될 것 같아.."라고 세상 아련하게 내뱉으며 배탈 난 배를 움켜쥐고 가쁜 숨을 몰아쉬던 것도 웃기고.



날씨도 타이밍도 모든 것이 다 계획대로 착착 진행됐던 여행도 분명 있었는데, 우리가 그때 그 제주여행을 계속 회상하고 이야기하는 걸 보면, 남자 친구와 처량하다고 생각했던 크리스마스가 하나밖에 없는 추억이 되는 걸 보면, 우리는 가끔 예상했지 못했던 것에서 더 많은 걸 얻는 것 같기도 하다. 발 가는 대로 가다가 우연히 발견한 호젓한 길이 너무 예쁠 때가 있고, 끝도 없이 줄 선 유명 맛집 옆에 있는 허름한 식당이 나만 아는 맛집이 될 때가 있고, 둘이 어떻게 알게 되었냐는 질문에 설명하면서도 스스로 신기한 사람과 오래오래 한결같은 친구가, 때로는 연인 사이가 될 때도 있다. 그렇게 생각지도 못한 것들이 날 전혀 다른 세상으로 이끌 때가 있다.



타고난 성격은 고치기 여간 쉬운 게 아니라, 여전히 무언가를 시작할 때 유난스럽게 계획을 세우고 그게 마음대로 흘러가지 않으면 스트레스를 받고, 그게 더 심해지면 혼자 분해서 눈물이 그렁그렁 맺힐 때가 있다. 하지만 이젠 내가 미리 그려놓은 직선 밖에 찍힌 점들도 예쁜 장식이 되기도 한다는 걸 안다. 오히려 어떨 땐 그 그림을 떠올릴 때 점부터 생각날 때가 있다는 것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