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축 아파트이지만 낡고 정겨운 우리 집

우리 동네, 우리 집 이야기

by 재연



작년에 나는 두 번의 이사를 했다. 한 번은 결혼식 전후로 본가의 짐을 조금씩 신혼집으로 옮기는, 승용차 한 대로 왔다 갔다 짐을 날랐던 말하자면 세미 이사 정도이고 두 번째는 새로운 신혼집으로의 이사다. 첫 집에서 겨울과 봄, 여름을 보내고 처음 그 집을 만났던 가을은 보지 못한 채 이사를 하게 됐다.



이사 온 곳은 성남시 분당. 훗날 남편과 이곳에 살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을 어렸을 적 분당에 대한 기억을 잠시 되짚어 보자면. 첫 기억은 삼촌이 하시는 치과가 정자동에 있어 노란 수인분당선을 타고 가끔씩 왔었던 중학교 시절이다. 그땐 신분당선도 없었을 때고 활동 반경도 넓지 않아 삼촌 치과에 가는 날엔 지하철 여행을 떠나는 것처럼 그 길이 길게 느껴졌다. 정자역 출구를 나오면 바로 보이는 8차선 도로와 허허벌판 같은 탄천의 풍경은 먼 길을 떠나왔음을 실감하게 했다. 그땐 그저 한 번 오기 위해서는 반나절 이상이 걸리는 먼 곳이었던 것 같다.



두 번째 기억은 대학생 때 분당에 사는 친구를 만나러 왔을 때. 서현역 AK플라자를 중앙으로 양쪽으로 펼쳐진 상가와 광장을 걸었는데 왜인지 2000년대 초반을 떠올리게 하는 모습이었달까. 분명 번화한 곳인데 시간을 거슬러 올라간 기분이었다. 그러니까 잘 찾아보면 디델리, 캔모아가 있을 것만 같은. 옷 가게에는 당시 유행했던 밀리터리 바지와 스키니진이 있었을 것 같은. 종종 인터넷에서 이때를 그리워하는 사람들을 본다. 학교에 '놀토'로 주 6일 다니고, 지금은 안전상 이유로 없어진 정글짐에서 모두가 기초 체력을 다졌을 때. 위에는 팝치킨, 아래에는 콜라가 있는 콜팝을 시켜 먹고 슬러시를 사 먹었을 때. 그때 학창 시절을 보낸 우리 또래에게는 모두가 마음 한 구석에 어떤 버튼이 있는 것 같다. 누군가 던진 한마디로 그 버튼이 눌렸을 때 서로 "맞아 맞아 그때는~ " 한참을 이야기하고 손뼉 치며 공감하다가 잠시 그리움에 빠지게 되는 그런 버튼. 아마 그때도 익숙한 풍경에 그 버튼이 내 안에서 잠시 눌렸었던 것 같다.



아주 어렸을 때 우리 가족은 일산에 살았었다. 주말엔 일산호수공원을 가기도 하고, 당시 가장 핫했던 복합쇼핑몰 라페스타를 누비기도 했다. 그 시절에 대한 향수랄까, 젊은 30대 부부였던 부모님과 세상에서 제일 좋아 졸졸 따라다녔던 언니와 살던 그때의 추억 때문인지 일산은 언제나 그곳에 시간이 멈춘 채로 나를 기다리고 있을 것만 같은 동네다. 그 동네를 떠나고 한참 시간이 흐른 성인이 되고 나서도 그 기억을 태엽처럼 감아 가족끼리 놀러 가기도 하고 남자친구와 데이트를 하기도 했다. 마두동 학원가에 있는 단골 쌈밥집부터 지금은 '밤리단길'로 불리지만 그 명칭이 어색하기만 한 정발산 뒤 주택가에 있는 월남쌈집, 파스타집.. 길을 걸을 때마다 신나게 롤러블레이드를 타고 다니던 내가 눈에 선하게 보인다. 고향이라는 게 이런 거구나. 밑그림 위로 지금의 풍경을 계속 겹쳐보는 것. 이 길 내 등굣길이었는데, 여기에서 방방이 많이 탔어, 이 문방구에서 맨날 불량식품 사 먹었다? 이 육교에서 코에 콧방울 맺힐 정도로 울었었는데 뭐 때문에 그렇게 울었었지.. 겹쳤을 때 달라진 것도 많지만 어쩌다 여전히 그대로인 모습을 만났을 때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다.



다시 분당으로 돌아오자면, 어렸을 적 이 기억들 때문일까 이곳은 처음부터 마냥 낯설지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분당과 일산은 비슷한 시기에 계획적으로 조성된 1기 신도시이다. 반듯한 도로를 사이에 둔 낡은 아파트 단지들과 긴 세월 자라 10층집 거실도 가릴 것 같은 높고 울창한 나무들. 덕지덕지 붙은 상가 간판들 사이로 지금은 사라진 빛바랜 옛날 가게 이름들. (실제로 며칠 전 생과일 빙수 전문점 간판을 보고 이름이 너무 귀여워 검색했더니 이미 없어진 지 한참 지난 곳이었다.) 'O리단길'이라는 요즘 이름은 없지만 'OO 먹자골목'이라고 버젓이 표지판까지 있는 주택가와 딱 봐도 동네 단골이 많을 것 같은, 그것도 아주 오래된 단골일 것 같은 이곳 터줏대감 격 식당들. 걷다 보면 반가운 친구를 만난 것처럼, 기분 좋은 기시감이 드는 구석이 참 많은 동네다.



지금 사는 아파트는 1995년에 지어진 구축 아파트다. 구축에 복도식 아파트를 살다 보니 불편한 점도, 좋은 점도 있다. 불편한 점은 춥고, 영하권의 날씨엔 동파 위험에 세탁기를 돌릴 수 없다는 점, 자잘한 하자들이 있다는 점. 하지만 사람은 역시 적응의 동물인 건지, 아니면 벌써 그 사이에 이 집에 정이 든 건지, 어쨌든 좋은 점이 더 많이 느껴지는 요즘이다. 일단 문밖을 나서면 바로 밖이 보이는 덕에 계절의 풍경을 놓치지 않고 볼 수 있다. 처음 이사 왔던 가을엔 무심코 연 문밖으로 멋들어지게 치솟은 단풍나무들이 보여 한참을 봤던 기억이 난다. 가끔 현관문을 열어 고정해 두고 집 환기를 할 때면 문이 액자가 되어 바깥 풍경을 감상하게 된다. 겨울엔 마치 장난감 자동차처럼 주차되어 있는 차들 위로 소복이 쌓인 눈을 보는 재미도 있다. 금요일마다 작게 열리는 아파트 장터도 또 다른 재미.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집으로 들어갈 때 가끔 문 앞에 잠시 서서 복도 사진을 찍기도 한다. 옆동의 귀여운 세모 지붕, 지는 해가 늘어지게 쬐는 복도와 문, 고요함 속에 들리는 새소리 같은 것들이 '지금 너 되게 호시절이야' 말해주는 것만 같아 어쩔 수 없이 사진이라도 남기게 된다. 찍는 동안 깨닫는다. 우리 이 집, 나중에 떠나고 나서도 오래오래 이야기할 것 같아.



재건축, 재개발이 모두의 관심사인 요즘, 이곳이 완전히 바뀌었을 먼 미래를 가끔 생각한다. 반듯한 도로와 어울리게 더 반듯하고 세련된 새 아파트가 들어서면 어떨까. 지금의 낡은 상가들도 통창 유리 상가로 바뀌고, 오합지졸처럼 느껴졌던 간판들이 정리된다면. 아파트 흙밭 놀이터가 분수까지 나오는 테마파크처럼 바뀐다면. 현재의 모습이 하나도 남아있지 않게 된다면. 그런 생각을 하면 야금야금 아껴 먹어야 할 서랍장 안 사탕처럼 지금 이 시간이 애틋해진다. 언젠가 바뀔 테고 바뀌어야 하지만 그렇다면 더 잘 기록해두고 싶다. 낡고 정겨운 이 동네는 시간도 조금 느리게 흐르는 것만 같다. 그렇게 느리게 흐르다 나중에는 사진 속으로만 존재하는 멈춘 시간이 될 때 추억할 수 있는 것들이 내 손에 많이 남아있으면 좋겠다. (사진과 글로 많이 남겨둬야겠다고 또 다짐한다.)



이 집에서 첫가을을 보내고, 지금은 겨울을 지나고 있다. 탄천을 따라 벚꽃이 흐드러지게 필 봄과 누렇고 황량했던 잔디밭이 점차 연둣빛으로 물들 초여름, 매미가 목청 찢어져라 맴맴맴 울어댈 한여름이 기대된다. 우린 또 어떤 시간을 보내게 될까. 확실한 건 머릿속 기억 저장고에 이 시절을 담을 짱짱한 보관함이 만들어지고 있다는 것. 먼 미래의 내가 곱씹고 또 곱씹을 시절을 앞두고 있다는 것. 그런 생각을 하면 괜히 닭살이 오소소 돋다가 또 마음이 말랑말랑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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