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첫 결혼기념일,

by 재연

"오빠는 결혼하고 나서 상대방이 아닌 내가 바람피울까 걱정한 적 없어?"

조금 이상한 질문을 결혼기념일에 던지니 더 해괴한 질문이 되었다.

"한 적 없는데?"

"아니 생각해 봐. 이제 임종 때까지 한 사람이랑만 살아야 돼. 천년의 이상형이 나타나도 나는 이 사람만 봐야 돼. 자신 있어?"

"어차피 시간이 지나면 다 똑같아. 천년의 이상형이든 누구든. 지금 내가 같이 있으면 좋고, 편한 사람이니까 하는 거지."



언젠가 연예인 이효리가 모 프로그램에서 그런 말을 했었다. 결혼 전 본인이 바람을 피울까 봐 걱정했다고. 남편이 아니라 내가 바람피울까 봐. 항상 2년 주기로 남자친구가 바뀌었었는데, 남은 생을 한 사람과 하는 것이 가능할까 무서웠다고. 꽤 당돌한 걱정이지만 당시 미혼이었던 나는 머리를 한 대 맞은 것 같았다. 헉, 나도 나중에 어떡하지. 모르긴 몰라도 얼굴로 먹고살 만큼 요란하게 잘생긴 남자 연예인들과, 화려한 연애를 질리도록 했을 그녀가 이런 걱정을 한다면 나는? 내가 과연 한 사람에게 그렇게 뚝심 있는 애정을 뿌리내릴 수 있는지 의심스러웠다. 그게 가족이니까,라는 말도 썩 와닿지 않았다. 피 한 방울 안 섞인 이와 가족이 된다는 건 머리로는 이해해도 마음으로도 이해하는 건 또 다른 차원이었다. 그렇게 자기 의심을 마음 한편에 꾸깃꾸깃 쑤셔두고 결혼한 지 이제 1년, 첫 결혼기념일을 (다행히도) 맞이했다. 만난 지 8년, 결혼한 지는 1년. 100일부터 2000일까지, 그간 수많은 날을 챙겼지만 부부로서는 첫 기념일이다.



옛날 캠코더를 하루동안 빌릴 수 있는 곳이 있다 해서 망원동을 잠시 들리고, 미리 예약해 둔 식당을 갔다. 기념일이라서 기쁜지, 그 명분으로 평소보다 더 맛있는 걸 죄책감 없이 먹을 수 있어 기쁜 건지, 약간의 주객전도된 감이 없지 않아 있지만 아무렴 괜찮다. 맛있는 걸 먹으면 행복하고 기념일에 행복하면 된 거니까! 허겁지겁 먹으려다 말고 잠시 정신 차려 "1년 축하해!" "1년 동안 수고했다 앞으로도 잘 부탁해" 덕담을 나누고, 잔을 부딪히고 다시 식사에 집중했다. 이거 맛있어 먹어봐, 대게만 한 접시 가득 먹어도 뽕빼겠다, 캠코더 이거 재밌는데 어제 봐둔 카메라 진짜 살까? 지금 얼굴 달걀귀신처럼 나와, 먹으면서 식곤증이 오네, 이따 전자랜드나 가보자, 나중에 임신하면 디저트 줄여야 하는데 어떡하지, 맥락 없는 대화를 주고받는다. 어떨 땐 대화라기보단 각자 할 말만 하고 있기도 하다. 캠코더 줌인은 아직 손에 익지 않아 화면이 순식간에 앞에 앉아있는 오빠의 콧구멍으로 꽉 찼다. 아랑곳하지 않고 열심히 먹어 빵빵해진 얼굴을 더 확대하고 낄낄 웃으며 녹화했다. 길을 걷다가 추우니까 마트나 들어가 볼까- 하고, 마침 집에 땅콩버터 다 떨어졌는데 쿠팡보다 싸다며 신나게 집어오기도 했다.


스크린샷 2026-02-24 오후 2.44.24.png 먹고 짠 먹고 짠
스크린샷 2026-02-24 오후 2.43.26.png 연희동 사러가에서. 반값 할인 특템 !


오랜만에 각자 조금씩 꾸미고 나왔지만 집에 돌아가서는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 헐렁한 모습으로 복귀했다. 힘들이지 않고 당연하게 흐르는 시간이, 누구 하나 머릿속으로 계산하고 있지 않은 이 시간이 편안했다. 이런 편안함에 점차 스며들면 나중엔 눈 돌아가는 것조차 귀찮아지려나, 자려고 누운 침대 위에서 문득 그날 오빠에게 던졌던 질문을 다시 떠올렸다. 활활 타오르는 장작불보다 은은한 숯불을 오래오래 쬐는 것이 더 기분 좋게 따뜻하다는 걸 알아차리게 될 때. 신나게 여행을 하고 돌아와도 집 현관문을 열 때 '역시 집이 제일 좋다!' 외치며 행복하게 쓰러지는 것처럼 익숙함이 새로움 못지않게 좋아질 때. 매일 입는 옷이 지겹기보단 애착템처럼 느껴질 때쯤엔 이 사랑만으로도 여생은 충분하다고 느끼려나.



그날 저녁에는 '또또'라는 홍제천의 요리주점을 갔었다. 불 꺼진 카센터, 어두운 벽돌집들 사이로 북적북적한 소리가 새어 나오는 곳. 막내딸이 사장님이고 어머님은 조리실장으로, 아버님은 홀서빙을 담당하는 직원으로 고용했다는 재밌는 가족사업(?) 이야기에 꼭 오고 싶었던 곳이다. "어서 오세요 반갑습니다 -" 지긋한 나이의 아버님이 기본 안주로 잡채를 내어주시며 반겨주셨다. 젊은 손님들로 가득해 언뜻 보면 다른 요리주점과 다를 바 없지만 어쩐지 가게 주변으로 안전한 울타리가 쳐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옆테이블에는 우리보다 조금 더 나이가 있어 보이는 커플이 앉아있었다. 겨울인데 슬리퍼를 신은 걸로 보아 아마도 동네 주민인 듯하다. 이미 술 몇 병을 해치운 흔적도 보인다. 신나게 술을 기울이던 둘은 "감자전 남은 거 아까운데 포장해서 이따 집에서 더 먹을까?" "어제 남은 반찬도 같이 안주로 쓱삭?" "좋지 좋지" 야무지게 세우는 2차 계획도 엿들었다. 영락없는 부부의 모습이다. 어디에 사는 뉘신 지는 모르지만 검은 비닐봉지를 신나게 흔들며 집으로 돌아갈 둘의 모습이 잠시 그려졌다.


캠코더로 찍은 또또
봄나물 냉이가 올라간 쭈꾸미 볶음. 또 가면 민자 부대찌개도 시켜봐야지



옆테이블의 젊은 부부, 딸과 함께 가게를 하는 노년의 부부와 그들이 꾸린 가족. 우리의 가까운 미래와 조금 먼 미래 같은 모습들을 보면서 그런 생각을 했다. 연인의 사랑이 가족의 사랑으로 사랑의 모양이 바뀔 때 어쩌면 나는 더 큰 행복을 느끼게 될지도 모르겠다고. 더 크고 안전한 행복. 그럴 수 있을까에서 그럴 수도 있겠다로, 작은 단서가 생긴 듯한 하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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