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네 도서관의 맛

우리 동네, 우리 집 이야기

by 재연



근 몇 년 간 꽤 많은 책을 읽었다. 쉽게 읽히고 슴슴한 에세이는 흥미가 떨어지기 전에 여러 권을 빠르게 전환해 주면서 병렬 독서를 했고, 조금 더 깊이 빠져야 하는 소설류는 한 권씩 집중해서 읽었다. 회사에서는 내내 쓰는 일을 했기 때문에 쓰기는 잠시 멈췄어도 읽는 건 꾸준히 놓지 않았다. 재밌어서도 있고, 아웃풋이 많다면 그만큼 인풋도 더 많이 넣어야 한다는 약간의 강박 때문도 있었다. 어느 순간부터 채워도 채워도 빠져나가는 구멍 난 독이 된 것 같아 빠져나가는 양보다 넣는 양이 더 많을 수 있게 계속, 계속.



책을 좋아하는 습성(?)이 언제부터 시작되었는가 거슬러 올라가 보니 초등학교 저학년 시절부터인 것 같다. 그 시절에 대한 기억은 대부분 흐릿하지만 책을 좋아하고 도서관을 자주 들락날락했던 건 선명한 사진처럼 남아있다. 하교 시간에 도서관에 가면 하루 종일 시끌벅적한 학교에서는 보기 드문 고요함을 느낄 수 있었다. 책장 넘기는 소리, 구석에서 킥킥 웃으며 소곤거리는 두세 명 아이들의 소리, 바닥에 톡톡톡 탁탁탁 실내화 닿는 소리만 없었다면 정지 화면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조용했다. 책장과 책장 사이를 한참 서성거리다가 한 권을 소중하게 골라 쪼그려 앉아 있기도 하고 두꺼운 책인 날엔 사서 선생님께 소심하게 내밀어 대출했다. 얼른 집에 가서 읽을 생각에 품에 안고 종종걸음으로 집에 왔던 기억이 난다. 종이 냄새가 섞인 도서관 특유의 낡은 냄새, 길게 늘어진 햇빛을 받아 반짝반짝 둥실둥실 떠다니던 먼지, 이런 것도 잔상처럼 남아있다.



이런 날씨에 집에만 있을 순 없지, 할 정도로 봄 예고편 같았던 날. 산책을 갈까 아예 카페를 갈까 고민하다가 문득 도서관을 떠올렸다. 분당에 있는 도서관을 얼른 검색해 보니 마침 집에서 가까운 도서관이 규모가 있는 편이고, 소장된 책도 많다는 평이 눈에 띈다. 걸어서 가기에도 괜찮은 거리다. 지하에는 구내식당도 있고 싸 온 음식을 먹어도 된단다. 점심 전에 가서 책을 읽다가 도시락 먹고, 나른한 오후 시간까지 있다 와야겠다. 간단하게 도시락을 싸서 가방에 넣고 출발했다. 가는 길엔 왜인지 조금 설렜다. 도서관이라는 곳을 몇 년 만에 가는 건지 모르겠다. 최근에는 주로 교보문고, 알라딘 같은 오프라인 서점을 가거나 그것도 귀찮은 날엔 태블릿으로 밀리의 서재를 이용했었다. 좋아할 것이 틀림없는 곳을 가는 중이어서일까, 한 때 좋아했던 사람을 먼 훗날 다시 만나러 가는 사람처럼 발걸음이 설렜다.



얕은 언덕길을 올라 도착한 도서관은 1층에 있는 작은 카페 덕분에 들어서자마자 기분 좋은 커피 향이 풍겼다. 2층에 있는 문헌정보실로 가는 내내 커피 향이 따라왔다. 책과 커피 향이라.. 진짜 좋다. 책 읽는 공간은 아직 보지도 않았는데 벌써 좋다. 벌써부터 오늘 하루가 마음에 쏙 든다.

이른 오전부터 사람이 꽤 많이 차있다. 800번대의 문학책들이 빼곡히 있는 책장들 사이로 조용히 걸으니 사잇길로 뒷산이 보이는 창가가, 그다음 사잇길에는 창가를 향해 앉아있는 뒷모습들이 보인다. 기억 속 옛날 도서관의 모습 그대로다. 짙은 나무색 책장에는 언제부터 이 자리에 있었을지, 한 번이라도 누가 꺼내 들었거나 빌려간 적이 있었을지 의구심이 드는 두꺼운 법전부터 따끈따끈한 베스트셀러 신간까지 보인다. 한 자리에 오래 머무를 계획으로 마음에 드는 책 몇 권을 골랐다. 규칙이라도 있는 것처럼 4인 테이블에 대각선으로 앉아있는 사람들 사이로, 나는 그 규칙을 깨고 젊은 여자분 옆자리에 앉았다. 창가가 보이는 방향에 안고 싶었으니 어쩔 수 없다. 다행히도 필사에 열심히 집중하시느라 크게 개의치 않아 보인다. 창가밖으로는 운동기구가 몇 개 있는 완만한 뒷산이 보였다. 지금은 앙상한 나무들이 삐쭉삐쭉 서있지만, 초록이 우거지는 계절엔 이 자리에서 보는 풍경이 얼마나 예쁠지 생각했다. 그땐 꼭 더 일찍 와서 가장 명당에 앉아야지. 책을 읽다 고개를 들었을 때 푸른 나무가 넘실넘실 거리고 있을 장면을 떠올리니 벌써부터 아침잠이 싹 사라진다.

월요일도, 금요일도 아닌 일주일의 딱 중간 수요일. 연차 내기에도 어정쩡한 평일인 수요일, 회사가 아닌 도서관에 있는 사람들은 대부분 학생이거나, 아이와 함께 온 젊은 엄마 거나, 나이가 지긋한 어르신들이었다. 들어오자마자 있는 책상은 신문 보기에 딱 알맞게 크고 비스듬했다. 각종 신문사의 종이신문이 비치되어 있는 그곳은 신문 전용석인 듯했다. 머리가 희끗한 노신사들이 옹기종기 모여 앉아 침을 묻혀 종이 신문 페이지를 촤라락 넘기고 있는 풍경이 귀여웠다. 전부 아빠랑 비슷하거나 조금 더 많아 보이는 나이대의 노신사들이다. 여기 오니까 아빠 생각난다고 보낸 카톡에 '은퇴한 할아버지들의 놀이터지^^' 아빠가 답장했다.

노트북은 꼭 노트북 전용 자리에서 이용해 달라는 안내문 앞에서 기어코 노트북을 켜 정치 유튜브를 보고 계시는, 아니 틀어놓고 꾸벅꾸벅 졸고 있는 아저씨. 잠은 집에 가서 자는 게 더 편하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내내 엎드려 자는 학생. 엄마랑 같이 와 숙제를 하고 있는 초등학생. '일본어 첫걸음'이라고 쓰여 있는 책을 가져와 표지 뒷면의 지은이 약력을 아주 한참 동안, 손가락을 따라 읽으며 살펴보시는 할아버지까지. 평일 도서관의 풍경은 느릿느릿했다. 세상만사 복잡한 일들로부터 어떤 막으로 단절되어 있는 공간처럼 느껴질 정도로 느릿했다. 책에 파묻히기엔 더할 나위 없이 완벽한 곳이다.



한식백반 6천 원, 특식은 7천 원이라고 쓰여 있는 구내식당으로 점심시간을 약간 비껴간 느지막한 시간에 갔다. 특식은 무엇인고 하니 돈가스다. 한식백반은 하얀색 식판, 특식은 특별히 연두색 식판이다. 싸 온 도시락을 풀러 먹으면서 옆자리 애기와 엄마가 먹는 식판을 쓱 구경했다. 계란물 묻힌 분홍 소시지, 육개장,.. 뒷구르기하면서 봐도 급식 메뉴다. 급식만의 매력이 있지, 다음엔 구내식당 메뉴 먹어볼까 생각하던 찰나에 맛없다고 투정 부리는 애기의 말이 들린다. 그럼 딱 한 번만 도전해 봐야지.

밥을 먹고 나서 자리에 돌아와 다시 책을 읽고 있다 보니 하나둘씩 빈자리가 다시 채워진다. 점심시간이 지난 오후가 되니 오전보다 한층 더 고요해졌다. 각자 식곤증과 사투 중인 까닭이다. 종이 넘기는 소리가 현저히 잦아들고 꾸벅꾸벅 주기적으로 고개가 푹 떨어지는 게 느껴진다. 햇살도 조금씩 깊숙이 들어온다. 옅은 숨소리만 나는 이 고요한 공간에 있는 사람들이 마치 책장에 가만히 꽂혀 있는 책 같았다. 그러니까 책과 사람이 아니라 책들만 있는 공간처럼. 이따금씩 핸드폰 벨소리를 켜둔 어떤 아주머니의 신명 나는 통화 소리에 그 적막이 깨지긴 하지만.



도서관에 소장된 책은 후기대로 많았다. 읽고 싶은 책이 많으니 자주 와야겠다고 마음이 앞선다. 내친김에 회원가입도 하고 도서대출증도 발급받았다. 이 많은 책을 빨리 독파하려면 빌려가서 집에서도 읽어야 한다. 내심 옛날 추억을 떠올리며 실물 카드로 받고 싶었지만 젊은 사람은 모바일이 훨씬 편할 거란 친절한 직원 분의 말에 "감사합니다"하며 모바일 어플을 설치했다. 가벼운 에세이 세 권과 두꺼운 소설집 모음 하나를 골라 대출 기계 앞에 섰다. 이 공간과 정말 어울리지 않는 신식 기계에 책 4권을 놓으니 한 번에 제목과 번호를 인식한다. 일일이 바코드를 안 찍어도 된다는 사실에 놀라면서, 낡은 도서관에 대한 내 편견이 너무했나 싶어 얼른 책을 집어 들었다. 요즘 리뉴얼되거나 새로 생기는 도서관은 복합문화공간처럼, 세련된 카페처럼 짓는다. 입장료 없이 이용해도 될지 황송해질 정도로 멋진 도서관이 많다. 그런데 동네 주민들이나 올 법한 이 낡고 오래된 도서관에 하루 만에 정이 들었다. 도저히 베일 수 없을 정도로 끝이 닳아있는 책. 언젠가 아빠의 책장 구석에서 봤었던 것 같은 그런 책들. 옛날 대학 강의실 같은 책상과 의자. 종이 냄새가 세월을 따라 켜켜이 쌓여 만들어내는 이 쿰쿰함은 새 책으로 가득한 곳이 흉내 낼 수 없는 향이다. 시종일관 나른한 공기에 잠이 솔솔 올 것 같은 이곳. 주말마다 카페에서 공부하는 남편에게 다음엔 카페 대신 같이 와 보자 했다. 돌아가는 길 가방은 살짝 무거워졌다. 책 4권, 대출 기간은 2주. 집에 가서 얼른 읽고 반납하러 와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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