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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J YP Dec 22. 2020

영화 #내가죽던날 이야기

롱리뷰, 스포 있습니다

영화 포스터


요새는 영화를 볼 때 일부러 정보를 안 찾고 가는 편이다. 그래서 사실상 영화의 내용을 짐작하는 유일한 도구가 영화의 ‘제목’인 경우가 많다. 일단 제목만 봤을 때는 이 영화가 내 취향은 아니었다. 너무 문어체라고 해야 하나? 그래서 괜스레 뻣뻣한 영화가 아닐까 생각했었다.


근데 막상 보고 나니까 너무 좋았다. 왜 제목이 이렇냐는 원망이 들 만큼 (그러고 보니 여름철 내가 재미있게 봤던 ‘다만악’도 제목은 마음에 들지 않았었다) 일단 추리물로서 정말 좋았다. 거의 끝까지 스스로 추리하면서 진상을 생각하게 만든다. 이 생각하게 만든다는 게 써놓고 보니 보통일이 아닌 것 같다. 대개는 추리랍시고 시작해도 중간에 뭐가 뭔지 몰라서 포기하게 되거나 슬래셔 영화처럼 예상되는 결말로 쿵쿵 옮겨가는 전개를 기대하는 방향으로 흘러가게 마련이다. 어떻게 영화 중반까지 미스터리를 끌고 와도 영화 속 주인공 버프가 선을 넘으면 그때부턴 알아서 능력자 배틀 물 감상으로 전환된다거나 하는 경우도 있고.


그런 면에서 일단 영화는 페어플레이다. 주인공 버프? 주인공이 받아들이는 정보와 관객이 받아들이는 정보는 거의 동일하다. 거기서 주인공이 퀀텀 점프 같은 각성을 통해 벽을 돌파하는 전개로 가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그것이 능력이 떨어지는 탐정임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엘리트 경찰’이라는 대접이 아깝지 않을 만큼 행동과 대사의 질이 좋다. 아 진짜 ‘엘리트’라면 저 상황에서 저렇게 했을 것 같다! 는 그 영역을 딱 맞췄다.


하지만 김혜수 배우의 역할은 단순히 관객을 안내하는 가이드에서 멈추지 않는다. 김혜수 스스로 지닌 이야기의 강도도 크고 무엇보다도 그 설정이 관객의 적극성을 앞서게 만든다. 김혜수는 분명 이 사건에 몰입할만한 동기가 있다. 관객 입장에서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동기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김혜수는 온전히 믿고 따라갈 수 있는 탐정이 아니다. 투명한 가이드가 아닌, 자신의 프리즘으로 사건을 바라보는 것이기에 프리즘 너머 진상에 대해 더 적극적으로 생각하게 된다.


이렇게 보면 점점 생각할 거리를 던져주며 무게를 가중시키는 영화 같지만 그렇게 느껴지지 않게끔 만드는 구성의 묘가 좋다. 스케일을 갑자기 키우거나 홱홱 돌려가면서 사람을 헷갈리게 하지 않고 천천히 용의자들에게 포커스를 맞춰 가며 그림을 생각하게 만든다. 그러니까 다시 이야기하지만 페어플레이다. 관객으로서 도전하고픈 마음이 생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회 차에서(?) 온전히 진상을 확신하는데 까진 시간이 걸릴 것이다. 바로 여기서 영화는 장르에서 손을 뻗어 주제로 이어진다. 나는 이 지점에서 이야기를 통해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와 그를 활용하기 위한 수단을 깨닫게 되는 순간부터 각본에 대한 존중심이 들었다.


이 이야기를 추리물로서 풀어낸 것은 단순히 이야기가 재미없을 까 봐 감추기 위한 자극이 아니다. 아니 자극은 자극이지만 적어도 관객에게 사무적인 미소를 띠기 위함은 아니다. 죽음을 결심한 소녀의 이야기를 관객의 마음속에 살려 내기 위한 도전에 가깝다.


영화의 진상이 그 자체로 숨겨둔 퍼즐이 모조리 들어맞는 쾌감을 불러일으키는 부류는 아니다. 하지만 이야기 안에 머무는 지적 쾌감을 뛰어넘는, 한 인간을 마주하는 벅찬 감동이 있다. 그리고 영화 속 추리의 목적과 궤적을 복기하게 만든다. 이 추리들은 정답 공개 후 의미를 잃는 랜덤박스 잡템 같은 게 아니다. 그 과정들 모두가 의미를 가지기에 추리로서도, 이야기로서도 가치가 충만하다. (다만 명탐정 김혜수 시리즈를 기대했다면 다른 의미로 실망했을 수도…) 그리고 영화를 보기 전에는 정말로 싫어했던 제목까지 다시 생각하게 만든다.


좋은 이야기가 그에 맞는 장르를 만났다. 거기에 둘 모두를 사랑하면서 동시에 이해하지 못한다면 닿을 수 없을 성취다. 만듦새에 단단한 자부심이 느껴진다. 차분하게 정제된 색조과 끈덕지게 때를 기다리는 카메라의 움직임에서도 우아한 자신감이 드러난다. 올해의 영화들을 꼽을 때 반드시 이야기하고픈 작품이다.


여담, 설정상 김혜수 캐릭터가 기운 빠진 모습으로 나오지만 사실 생각해보면 형사로서도, 탐정으로서도 영화 속에서 할 거 다 한다. 심문이면 심문 잠복이면 잠복...



<다섯글자 느낌>

보는게고통 / 허접합니다 / 기본만한다 / 무난하네요 / 양호합니다 / 아주좋아요 / 내인생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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