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리까지 기르던 긴 머리카락을 짧게 잘랐다. 선선한 가을바람이 목덜미를 간지럽힐 때마다 알 수 없는 해방감에 괜스레 웃음이 터져 나왔다.
아주 오래전 일이지만 귀밑 5cm 두발 제한 규정이 있던 학교에서 중학생 시절을 보냈다. 당시 짧은 머리를 고수해야 한다는 압박감이 컸던 탓일까. 고등학생 때는 다행히도 머리카락을 기를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갓 스물을 넘긴 앳된 성인 시절. 단발머리는 슬픈 일이 있을 때만 택해야 하는 스타일이라는 강박에 사로 잡혀있었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단발병'이라는 단어가 유행하면서 '단발머리' 또한 세련된 스타일로 각인되었다. 이십 대 중반쯤이었을까. 반복된 염색으로 푸석해진 긴 머리카락들이 참을 수 지겨워 퇴근 후 회사 앞 미용실에 가 단발머리를 시도했었다. 타의적으로 머리를 짧게 잘라야 했던 중학생 시절 이후 처음 자발적으로 시도한 단발머리였다. 우려와 달리 단발머리는 꽤 잘 어울렸다. 특히 팔이 떨어져라 드라이기를 들고 무거운 머리카락을 말리던 고된 노동 시간을 감축시켜줬다.
도수 있는 안경을 쓰고 통실 통실 살이 올라있던 중학생 시절. 30cm 자를 들고 다니며 귀밑 5cm 기장을 준수하는지 칼 같이 체크하던 학주 (과거의 학생주임=학생부장)를 마주치기만 해도 심장이 턱 막혀왔다. 머리카락이 셔츠 깃에 닿는다는 이유로 문구용 가위로 뭉툭하게 머리를 잘린 채 엉엉 울던 같은 반 아이를 바라보며 질겁해 학교를 마치자마자 미용실로 향했다. 자를 것도 없는 짧은 머리를 자르고 또 자르기를 반복하다가 졸업을 했다. 현재의 상식으로 비추어봤을 때 도무지 이해되지 않는 상황이었지만 그때는 다 그랬으니까. 몇백 명의 애들이 다 시부렁대면서도 동그란 얼굴이 더 동글동글해 보이도록 머리카락을 자르고 또 잘랐으니까. 현실에 순응하고자, 혼나지 않기 위해. 성인인 지금보다 미용실에 더 자주 다니며 짧은 머리를 유지했다.
중학교 시절 강요에 의한 단발머리를 지겹게 유지한 탓에 성인이 되어 토실토실 올랐던 살이 빠져 얼굴형이 갸름해졌음에도 불구하고 짧은 머리는 항상 두렵게 느껴졌다. 이러한 내게 첫 번째 자발적으로 시도한 단발머리는 심리적인 거부감을 깼다는 부분에서 큰 의미가 있었다.
가끔씩 충동적인 시도에 나조차 당황스러울 때가 많지만 이번에도 갑자기 허리까지 기른 머리카락을 댕강 자르고 싶었다. 선선한 바람에 흩날리는 머리카락이 둔탁한 것보단 가벼웠으면 좋겠어서. 운동을 할 때 긴 머리를 여러 번 올려 묶는 행위가 귀찮으니까. 드라이기로 머리를 말릴 때마다 팔이 아파서. 트리트먼트를 지금의 반의 반만 짜서 사용해보고 싶어서. 단발만이 연출할 수 있는 그 댕강한 반 묶음 스타일을 해보고 싶어서. 그냥. 갑자기. 미용실을 예약했다. 그리곤 짧은 머리에 잘 어울릴 것 같은 셔츠를 입고 가서 헤어 디자이너에게 요청했다.
"단발로 잘라주세요"
몇 년 만에 다시 자발적으로 시도한 단발머리. 거울 속 모습이 낯설지만 묵힌 체증이 시원하게 내려간 듯한 느낌은 왜일까. 머리카락이 어깨에 닿아 밉게 뻗치기 시작할 때면 '아, 내 머리카락 언제 다시 자라냐'며 찰랑찰랑 긴 머리의 여성들을 부러워하며 변덕을 부릴 게 뻔하다. 하지만 잠시만이라도 자발적인 시도 하에 변화된 내 모습을 충분히 즐겨보련다. 더 이상 타의적 상황에 의해 내 머리카락의 길이를 통제받아야 할 상황은 없으니까. 내 마음을 오롯이 따른 시도는 언제나 짜릿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