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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nna Mar 04. 2021

당신에게 벅찬 일은 남들에게도 벅차다

무례한 인수인계 요청에 대하여

월급이라는 것을 받기 위해 회사에 소속된 채 노동력을 제공하다 보면 다른 이가 담당하던 일을 내가 맡게 될 수도 있고 또 내가 맡던 업무를 다른 이에게 넘기게 되는 상황이 오기도 한다.


충분한 합의로 인한 공정한 업무 배분을 바라지만 현실은 내가 맡던 업무는 계속 맡아야 하는데 남들이 맡던 업무만 더해지는 상황들에 자주 맞닥뜨리게 된다. 이런 상황에 익숙해지다 보니 인수인계라는 단어만 들어도 중압감에 심장이 쿵쾅거린다.




본인이 하기 싫은 업무는 다른 이에게도 하기 싫은 업무일 가능성이 크다. 본인이 하기 싫은 업무를 털어 내기 위해 예의 따윈 밥 말아먹고 무례하게 업무를 떠넘기는 일부 인간들을 접하다 보면 여러 번 분노가 터지곤 한다.


무례한 인수인계 요청의 표본을 보여주었던 H군이 떠오른다.


그는 마케팅 부서 소속이었으나 주로 MD 업무를 담당하고 있었다. 그와 같은 부서가 아니었기에 속마음을 자세히 알 수는 없었으나 입사 시기 본인이 예상했던 일과 전혀 다른 일을 진행하게 된 이유로 사측에 불만이 가득해 보였다. 나 역시 그와 같은 불만을 일부 가지고 있었던 상황이라 속마음을 조금이라도 터놓고 서로의 고충을 나누었다면 좋은 동료가 되었을 수 있었겠다. 하지만 그는 이 회사에 소속된 존재들을 꺼려하는 듯 혼자 있는 것을 선호하는 듯했고 얼굴을 맞대고 대화를 섞는 것보다 메신저로 소통하는 방식을 좋아하는 듯했다. 나 또한 그의 성향을 파악했기에 거리를 유지하고 업무적인 상황 외에는 다가가진 않았다.


말 수가 없던 그는 어느 날 다른 팀이었던 나와 더불어 다른 직원에게 갑작스러운 미팅을 제안했다. 어떤 미팅인지 설명도 없이 5시에 회의실에서 보자는 그의 태도에선 상대방을 존중하는 일말의 배려도 보이지 않았다. 어떤 내용의 미팅이냐는 우리의 질문에 그는 '제가 하는 일이 벅차서 두 분께 인수인계해드리려고요.'라는 세상 무례한 대답을 펼쳤다. 팀장이나 상사가 사전 고지 없이 업무를 떠맡게 해도 씩씩 거릴 판에 그저 다른 팀의 수평적인 관계의 동료였던 그의 태도는 마치 전쟁을 선포하는 것과 다름없었다. 합리적인 사유를 바탕으로 업무의 일부를 나누자는 것에 대한 의견을 구하는 것도 아닌 '난 힘들어 죽겠으니 너희가 좀 해줘.'라는 투로 접근해온 그는 마치 마치 384 개월 아기 같았다.


그의 무례한 인수인계를 제안받은 우리는 당연히 거절했다."저희도 벅차서요."라며 그가 던진 무례한 말을 그대로 되갚아주었다. 얼마 뒤 똥줄이 탄 듯 한 그는 메일로 본인의 업무들을 쭉 나열하며 번거로우시겠지만 그중 일부만이라도 나누어 줄 순 없는지 의견을 구해왔다. 약간의 비굴모드에 도입한 듯한 그의 연기와 어느 정도의 상식을 갖춘 접근 방식에 마음이 조금 흔들렸다. 게다가 H군의 팀장이 내가 소속된 팀장보다 더 높은 위치에 있었기에 나의 팀장 또한 우리가 그의 일부 업무를 이관받아 진행해줄 것을 바랐다. '하긴 혼자서 힘들기도 하겠지.'라는 오지랖을 펼치며 그가 벅차다는 일들 중 50% 정도를 받아와 나와 다른 직원이 감당한 선에서 나누어 진행하기로 했다.


며칠 동안 평소와 다른 감사한 태도로 우리를 대하던 그는 어느 순간 다시 기존의 무례한 태도를 일삼았다. 본인이 하기 싫은 업무는 누군가 해주는 게 당연하다는 발언을 여러 번 일삼았고 미처 넘기기지 못한 업무들에 대해 큰 불만이 남아 있는 듯 책임감 없는 태도를 보였다. 결국 참지 못한 나는 날카로운 감정을 드러내며 그와 의견 대립을 펼치기도 했다.


여러 번 본인의 팀장에게 개선책을 요청해도 소용이 없었던 것인지 혹은 더 좋은 일자리가 생긴진 모르겠으나 어느 날 그는 업무 카톡방에 '저는 퇴사합니다.'라는 문구만 남긴 채 자취를 감춰버렸다.




그의 벅차 죽겠다는 업무 중 50% 가 내 일이 돼버린 지 1년 정도가 지났다. 가끔 나도 그 일이 하기 싫어 죽을 것 같을 때면 자취를 감췬 그가 떠오르기도 했고 그의 후임자에게 다시 업무를 넘길까 하는 고민을 하기도 했다.


그런데 오늘. 나의 팀장은 황당하게도 이미 내가 H군에게서 받아와 1년 동안 진행하던 일을 언급하며, 그 일을 H군이 소속되어있던 팀으로부터 인수인계받아 오라는 내용을 메일로 지시했다.


엥? 내가 내용을 잘못 본 건가? 눈을 비비고 모니터를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팀원들의 업무보다 본인의 안위에 더 관심 많고 줏대 없는 성향의 팀장이었지만, 구두상 혹은 보고서상 여러 번 언급했던 내용이었기에 당연히 우리가 다른 팀의 업무를 일부 받아와 일하고 있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있으리라 확신했다. 게다가 1년 전 H군 불만 많으니까 도와주라며 지시했었던 장본인인데 이걸 기억하지 못한다고?


그의 새삼스럽고도 황당한 지시에 허탈감과 더불어 분노를 느꼈다. 내가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도 모르는 자가 나를 평가하고 그 결과를 바탕으로 내 성과가 측정되고 있다는 현실이 모두 불합리하게 느껴졌다. 무조건 보고가 목적인 일을 하자는 것은 아니지만 담당한 업무 안에서 평가를 받고 그에 합당한 연봉을 받는 돈벌이 노동자인 내 입장에선 내가 무슨 일을 하는지 파악 조차 하지 못하는 자가 나를 평가하고 있다는 사실이 객관화되자 참을 수 없이 억울해졌다. 애초에 무례하게 떠넘기려 했던 H의 일을 잠시 상식적인 가면을 썼다며 좋은 마음으로 받아왔던 내가 어리석었던 것 일까.


회사에 다니면서 여러 이유로 퇴사 욕구가 샘솟곤 하지만 이렇게 내가 한 일이 내 성과가 아닌 다른 이의 성과로 치부되고 있었다는 사실이 선명히 인식될 때면 당장이라도 이 공간을 박차고 나가고 싶어 진다.

 



회사는 퇴사하는 자들의 업무를 어떻게든 남아있는 인력들을 통해 돌리려 한다. 최소한의 인력으로 최대한의 이익을 창출하려는 행태에는 일부 이해할 수 있는 바이다. 하지만 도가 지나칠 경우 조직 내 퇴사의 악순환을 불러일으키기 시작한다.


퇴사한 인원들로 인해 담당자가 공석이 된 업무를 이어받으라는 강요에 가까운 업무 지시를 받을 때면 명치에 묵직한 통증이 내려앉는 듯하다. '바쁘시겠지만.' , '어려우시겠지만.' 등의 틀에 박힌 예의를 갖추어 지시해도 화가 차오를 판에 '다음 주까지 업무 배워 놓으세요.'라는, 당신의 생각 따윈 필요 없다는 것에 가까운 태도가 실망스럽다. 업무를 요청하기 위해선 적어도 그 일을 맡게 될 팀원이 기존에 진행하고 있는 업무에 대해 기본 파악을 하려는 노력 정도는 해야 하지 않을까.


성과에 따른 보상을 늘 언급했으나 작년 나의 연봉 인상률은 그나마 물가 상승률에 비례하는 정도였을 뿐이다. 일부는 코로나 시대에 삭감이 아닌 것에 감사하라고 할 수 있겠다. 혹은 팀장의 시에 내 업무 성과나 태도가 만족스럽지 않았을 수도 있겠다. 하지만 적어도 내가 무슨 일을 하는지 조차 파악하지 못한 자로부터 평가받고 있다는 사실에 모욕을 느낀다.


헛된 희망을 주는 입에 발린 사탕 같은 소리를 쉽게 내뱉으며 비어버린 업무를 떠넘기는 배려 없는 행동들에 실망을 거듭하며 허탈함 느끼는 이런 날 일 수록 회사 밖의 세상에 눈을 돌리려 하지만 속상한 건 어쩔 수 없다. 적어도 '당신이 힘든 것 안다.'라는 기본적인 공감 능력을 갖춘 태도 정도라도 취해주었다면 이 정도의 허탈감은 들지 않았을 것 같다.


가만히 있다 가마니 된 여러 사례들을 보며 내가 감당할 수 있는 업무와 도무지 감당할 수 없을 업무들을 나누어 본다. 무례하고 갑작스러운 요구이지만 나라도 상식적인 태도를 유지해보고자 정신을 가다듬는다.


존중 따위 없는 무례한 요구들엔 최소한의 상식만을 갖춘 채 납득이 어려운 부분에 대해선 거절할 줄 아는 자세를 유지하고자 한다.




나에게 무례한 인수인계를 요청했던 H군의 후임자 중 J양이 퇴사를 한다. 그만큼 감당하기 힘든 업무인 것엔 동의하는 바이다. 퇴사하는 그녀는 사회생활을 시작한 지 얼마 안 된 미래 가능성이 무궁무진한 이다. 벅찬 업무로 따듯한 말 한번 주고받지 못했지만 다른 담당자들이 갑작스레 요청하는 일들을 군말 없이 해내며 형언할 수 없을 만큼의 중압감을 느꼈을 것이다.


그녀에게 용기 내어 그동안 고마웠다는 말과 더불어 더 밝은 미래를 응원하는 말을 전했다. 그녀가 어떻게 받아들일 진 모르겠지만 내 진심이다. 적어도 내 일이 벅차면 남들도 벅찰 거라는 최소한의 상식과 배려를 갖춘 였기에.





[이미지 출처: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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