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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nna Mar 22. 2021

내가 썼던 자기소개서를 외면하고 싶었다

조만간 퇴사를 앞두고 있는 요즘, 그간 잊고 있던 이력서를 펼쳐 보았다.


이런저런 글자의 조합들을 읽는 것을 즐겨하는 내가 유독 읽기 싫어하는 글은 바로 내가 썼던 자기소개서다. 경제, 기술 관련 글들은 어려운 내용이 길어지면 책을 금방 덮곤 하지만 의식적으로 가끔이라도 펼쳐보려 한다. 그러나 자기소개서는 애초에 열고 싶지가 않다. 왜냐면 그 안에 표현내가 진짜 내가 아닌 것 같아서다. 아니면 내가 좋아하지 않는 모습이어서 일 수도 있겠다.


처음 이력서라는 것을 만들기 시작할 때가 떠오른다. 이력서 란의 기본정보, 학력, 경력, 자격증 및 수상 내용 등은 객관적인 정보에 기반하여 채워 넣으면 되니 어려울 것이 없었지만, 자기소개서를 작성할 땐 한 줄 이상 쓰기 버거웠다. 포장하지 않은 날 것의 내 모습을 소개하는 글을 쓴다면 회사에서는 매우 달갑지 않아 할 것임에 분명했으니까.


유해 보일 수 있으나 나는 내가 옳고 그르다고 생각하는 문제에선 똥고집이 엄청나다. 게다가 아닌 건 아니라고 소심하게라도 반항해야 속이 시원하고, 내 일하기에도 벅찬 상황에서 다른 동료의 일까지 발 벗고 도와줄만한 포용력 따위는 없다. 내가 하고 싶은 요소에선 자발적으로 열정이라는 것이 발휘되는 편이나 누군가 계속해서 채찍하고 강요할 땐 그나마 능동적이었던 태도마저 수동적으로 바뀌곤 한다. 이런 모습을 그대로 적었다간 나라는 인간은 어느 곳에서도 밥벌이하기 어려울 것이라는 생각에 회사라는 조직이 좋아할 만한 요소로 꾸민 글들로 빈 화면을 채웠다.


초등학생 때 적어냈었던 가훈 '최선을 다하자'를 아주 부풀려서 항상 최선을 다하는 능동적인 인재의 이미지를 표현했다. 또 내향인에 가까운 내 모습은 차분하단 말로 바꿔 표현했고 동시에 최대한 외향인 처럼 묘사하려 했다. 또 학교 다니며 틈틈이 했던 아르바이트 및 중등부 성당 교사 경험을 거의 동화처럼 아름답게 미화시켜 누구와도 사이좋게 지내고, 포용력이 엄청난 천사 같은 이미지로 표현했다. 사실 아르바이트를 하며 진상들을 마주칠  때마다 뒤돌아서 상욕을 하기도 했고, 성당 교사는 내 깜냥에 맞지 않는다며 약 2주 정도만 했을 뿐인데 말이다.


그다지 존경하지 않는 누군가의 사례를 예시 들며 그가 열정을 불태우는 모습에서 감동을 받았다는 문장을 쓸 땐 팔에 오돌토돌 닭살이 올라와 주먹을 한번 꾹 쥔 채 책상을 한번 세게 친 뒤 한숨을 한번 크게 쉬며 타자기를 두드리던 순간이 떠오른다.


끝없는 자기 관리를 한다며 나를 어필했지만 사실 나는 늦잠 자는 걸 너무나도 사랑하고, 방에서 뒹굴며 영화를 보거나 이런저런 소설책들을 넘겨보는 것을 좋아하며, 친구들을 만나 맛난 걸 먹고 떠드는 걸 더 좋아하는 자기 관리와는 거리가 먼 인간이었다. 가끔씩 주말 아침에 일어나 무언갈 해보겠다며 새벽 6시로 알람 설정을 해두기도 했지만, 다음날 알람이 울림과 동시에 매몰차게 알람을 꺼버리는 '작심 일일'을 몸소 실천하는 내가 끝없는 자기 관리를 하고 있다고 쓰다니. 양심이 쿡쿡 찔렸지만 그래도 가끔은 운동도 하고 책도 읽으니까 이 정도면 나름 자기 관리하는 것 아냐?, 남들도 다 이렇게 쓰겠지? 라며 스스로의 모습을  있는 포장하고 있는 를 합리화해보곤 했다.




이렇게 몇 년 전 완성되었던 자기소개서는 회사에 재직하게 됨과 동시에 최대한 꺼내어 보지 않는 내 유일한 글이 되었다. 이직의 사유로 자기소개서를 검토해야 하는 순간이 올 때면 그 꾸며진 자기소개서의 글을 펼쳐 읽는 것이 불편했다. 문구 일부를 현재에 도태되지 않는 말로 트렌드 있게 바꾸는 것 외에는 나를 미화시킨 글들은 대부분 그대로 보존됐다. 왜냐면 나는 돈을 벌어야 했으니까! 돈을 벌려면 나를 조직이 좋아하는 모습으로 표현해서 회사라는 조직 속에 속해있어야 했으니까.


다행히도 이 고민은 나만 하는 것은 아니었다. 내가 이런 이야기를 할 때면 지인들은 손뼉을 한번 착! 치며 "나도 나도!"를 외치곤 했다. 요즘에도 취업 준비를 하는 갓 졸업한 동생들이나 이직 준비를 하는 친구들이 가장 많이 토로하는 고민 중 하나는 '자기소개서' 쓰기다. 또 '이건 내 모습이 아닌데.'라는 생각에 현타 (현실 자각 타임)가 오기도 한단다.


내가 인사 관리자가 아니라 정확히 알 순 없지만, 소문에 의하면 채용 담당자들도 바쁘기 때문에 자기소개서를 다 읽어보지도 않는다는데 차라리 자기소개서란을 없앨 의향은 없는 건지 원망을 해보기도 했다. 하지만 여전히 자기소개서란은 대부분 회사의 이력서 양식에서 사라지지 않았고 각종 포털 사이트에는 '자기소개서 작성법', '자기소개서 합격 작성 팁' 등의 글들이 인기다. 대행 전문 업체들도 있으니 많은 이들이 얼마나 자기소개서라는 것에 어려움을 느끼고 있는지 알 수 있다.




'경력 N 년, 연봉 N,000만 원, 만 3N세' 숫자로 축약된 정보로 시작하는 이력서 속 내 모습이 낯설다. 동시에 그간 경험했던 근무처들의 기록들을 살펴보며 '아, 그래도 나 하고 싶은 거 찾겠다면서도 현실적인 수익을 위해 뭔가를 계속하면서 살았구나.'라는 마음이 들며 찡해졌다. 이력서 안에는 당시 내가 느꼈던 감정, 고뇌, 고민 등 주관적 요소들은 모두 배제되어있고 객관적인 내용에 기반한 정보들로 구성되어있었지만, 나 만큼은 당시의 내가 어떤 심정이었고 그 상황들을 어떻게 이겨냈는지 알고 있었으니까.


내 단점들을 어떻게 장점으로 승화하여 표현할까 한가득 고민하며 한 문장씩 작성해나갔던 자기소개서 속 글들을 찬찬히 읽어본다. 그동안 꼴도 보기 싫다며 민망해하던 글들이었는데 그래도 내 노력의 흔적들이 보여 기특하고 과거의 붉으락푸르락하던 내가 귀엽게 느껴진다.


이력서 속 자기소개서에 기재한 글들은 나의 진짜 모습들을 100% 반영할 순 없다. 사회에서 선호하는 특징 위주로 아주 긍정적으로 쓰여있을 테니까. 지금 봐도 내가 썼던 자기소개서 속 글들은 대체적으로 민망하지만 스스로를 사회에서 원하는 모습으로 포장하기 위해 노력했던 내 모습이 '누군가에게 기억되는 당시의 나' 일 수 있고, 조직의 한 일원으로서의 역할을 다하기 위해 아등바등하던 과거의 모습일 수도 있다. 자기소개서 속 내가 썼던 글들을 외면하고 싶은 마음은 여전하지만, 적어도 당시 '노력했던 내 모습'만큼은 외면하지 않다.




[이미지 출처 :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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