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걔가 나한테 택시비 이만 원을 빌려놓고 안 갚아. 까먹은 걸까? 아 정말 짜증 나. 내가 예민한 걸까?"
"남자 친구가 여사친과 단 둘이 자주 만나는 게 열 받아. 화내면 내가 속 좁은 걸까?"
"나는 걔 생일을 늘 챙겨주는데 걔는 내 생일을 늘 안 챙기는 거야. 솔직히 섭섭해. 이런 감정 내가 소심해서 그런 거니?"
20대 시절, 친구들과 카페에서 자주 둘러앉아하던 이야기의 대부분은 '각자 느꼈던 감정의 불확실성'에 대한 토론이었다. 우리는 남들에게 소소한 것에 연연하지 않는 쿨내 품 품 나는 어른으로 보이는 것에 큰 의의를 둔 것 마냥 화가 나고, 짜증이 난 상황 속에서도 감정을 곧잘 숨겼다. 그런 뒤 마음 편한 친구들에게 "내가 느낀 감정, 나만 느끼는 거야? 너 같으면 어떨 것 같아?" 라며 공감을 갈구하는 듯한 질문들을 쏟아붓곤 했다.
사람 성향에 따라서 별로 신경 쓰지 않을 사안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충분히 화 날 수 있는' 문제들이었다. 심지어 애인이나 지인에게 지속적인 가스 라이팅을 당하면서 느끼는 불쾌감 조차 자신의 문제인 것처럼 여기며 스스로를 궁지로 몰아가는 이들 조차 있었으니, 자기감정을 믿지 못하는 상대를 보며 답답함을 느낀 채 "당연히 화나지! 나 같았으면 줘 팼다!" 라며 함께 성을 내줬다. 본인의 감정에 깊은 공감을 갈구하던 이는 금세 평온한 표정을 지으며 "그렇지? 내가 이상해서 그런 게 아니지?" 라며 환한 안도감을 내비쳤다.
나 또한 부정적인 감정을 느꼈을 때 바로 의사표현을 하는 것보다 그 상황을 곰곰이 생각해보는 편이다. 스스로를 100% 신뢰하지 못하는 것도 있었겠지만 최대한 이성적이면서도 합리적인 어른으로 보이고 싶은 마음이 컸다. 누군가 내게 무례한 행동과 말을 하는 것을 눈치챘음에도 상대가 나를 만만히 보았다거나 싫어한다는 상황을 인정하고 싶지 않아 모른 체하기도 했다. 겉으로는 평온한 척 "에이, 뭐 그런 걸 신경 써" "신경 안 쓸래. 난 저런 사람들에게 연연하지 않아" 라며 쿨내를 뿜 뿜 풍기는 척했고 "넌 정말 마음이 넓다", "이해심이 많다" 등의 별 도움되지 않는 칭찬들에 한 껏 취해버렸다. 하지만 조금씩 무시했던 감정들은 몸속에 켜켜이 쌓여 어느 순간 독이 되었고 그 독들은 한 번씩 크게 터져 나와 걷잡을 수 없었다.
30대인 지금은 전보다 내 감정에 솔직해지려 노력하고 있다. 역시 쉽지는 않다. 지인에게 서운함을 느낀 경우 타인에게 지금 내가 느낀 이 감정이 과하지 않고 합당한 것이냐를 묻는 것을 지양하는 대신, 서운함을 느끼게 한 당사자에게 직접적으로 내 감정에 대해 표현했다. "네가 ~ 이렇게 행동하고 말한 부분이 난 속상했어" 라며 당시 상황과 그에 따른 감정을 담담하게 표현하자 지인 또한 바로 사과했고 섭섭함을 최대한 재빠르게 털어내기 위해 함께 노력하기로 했다. 내가 느낀 감정을 의심하며 남들에게 내 감정을 확인받았다면 내가 느꼈던 것 이상의 부정적인 피드백을 받으며 오해가 더 커졌을 수 있었던 상황이었다.
내가 느낀 그 순간의 감정을 그 자체로 그대로 인정해야 한다. 누군가 나를 괴롭혀 순간적으로 저 인간을 파괴하고 싶을 만큼의 분노가 차오르더라도 굳이 부정하며 스스로에게 죄책감을 더해줄 필요는 없다. 부정적 감정이 바로 폭력적 행동으로 이어진 경우라면 충분히 지탄받아야 함이 맞겠지만, 이성의 끈을 놓지 않는 상태가 기반이 된 채 감정을 인정하고 다독이며 표현하는 방법을 취한다면, 감정의 독은 마음속에 오래 남아 있지 않고 보다 더 빨리 증발될 수 있을 것이다.
내 감정은 내가 가장 잘 안다. 남들은 그저 내가 던져준 몇 가지 사례들을 듣고 보편적인 시각에서의 판단을 내려주는 것뿐이다. 그러다 보면 내가 느낀 감정이 아닌 다른 가짜 감정들이 더해질 수 있다. 타인의 판단과 경험들이 추가되면서 초반에 느꼈던 감정이 점차 더 모호해질 수 있는 것이다.
때에 따라서 내가 느낀 감정을 어떤 방법으로 표현하고, 해결할 수 있을지 믿을만한 지인들의 경험담이나 의견을 참고해보는 것이 필요할 수 있다. 하지만 참고로 활용하는 정도여야 하지 타인의 의견에 그대로 본인의 상황을 대입해버린다면 탈 나기 십상이다. 그러니 본인의 감정을 스스로 정확히 받아들이는 것이 우선되어야 한다.
내 감정을 남에게 묻던 습관들을 서서히 줄이고 오롯이 내 시선으로 받아들이는 연습을 시작하고 있는 지금. 우선적으로 시도하고 있는 방법은 느낀 감정 자체에 대해 '평가' 하지 않으려는 것이다. 사람이기에 긍정적, 부정적인 감정을 모두 느낄 수 있고 개별성을 부여받았기에 남들과 항상 동일할 수 없다는 것을 받아들이니 스스로의 감정을 그대로 받아들일 두려움이 조금씩 줄어들고 있다.
내 감정을 남에게 묻지 말고 줏대 가지기. 유일한 나를 받아들이고 스스로 존중하는 방법 중 하나이다.
[이미지 출처 : Unsplash]